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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목숨 걸면 못할 일 없어… 나는 조선의 옻칠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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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1. 17:36
[박종인이 만난 외길인생] 일본 최고 문화재 복원 칠예가 전용복 "백남준 버금가는 藝人 되고 싶어" 3000대 1 경쟁뚫고 日 문화재 '메구로가조엔' 되살려 일본 세이코가 내놓은 야심작도 그의 옻 예술로 치장 "한국에 가면 내 작품 倭式이라 비난 참으로 난감해" 뜨내기 점쟁이의 독설 한 마디에 소년의 인생이 드라마로 변했다. 부모에 버림받아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부산 소년 전용복(全龍福·56). 그가 세계 최대의 옻 작품 일본 문화재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을 복원하고 최고의 칠예가가 됐다. 일본에서 가장 큰 옻칠 미술관을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도 그의 옻 예술로 치장했다. “목숨 걸면 못할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며 살아온 그의 인생을 들어봤다. 큰 형의 죽음 1964년 고향에 들른 뒤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던 경남 울주군 동해남부선 덕하역 대합실. 너덜너덜한 갓을 쓴 ‘도사(道士)’가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전용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큰 일 낼 놈일세….” 그러더니 물었다. “니 장남이제?” “큰 형님 있는데요.” “…느그 형은 죽는다, 니가 맏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바로 멱살을 잡았고 대합실은 난장판이 됐다. “이 영감탱이가 미칬나, 어데 우리 장남 죽일라꼬!” 도사는 말했다. “보소, 장남 안 죽을라면 야가 죽소. 싫으면 갸를 딴 데 보내거나!” 훗날 전용복은 “노인이 화를 내면서 기찻길로 걸어가다 철길에서 사라졌다”고 기억한다. 두 주일 뒤 큰 형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그의 형은 당시 명문 동래고 2학년으로 부산 동래구 복천동 판자촌에 살던 집안의 기둥이었다. 관(棺)이 나가던 날, 정신 놓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 앞에서 손주를 쏘아봤다. “쟈가 우리 손주 지깄다!” 엉뚱한 짓만 하고 말 안 듣는다고 ‘팔푼이’라 불렸던 전용복에게 그 날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인간 이새기’. 벼를 베고 남은 밑동이라는 경상도 사투리다. 인간은 인간이되 형을 죽인 살인범에, 쓸모 없는 이새기.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로 작은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그날부터 알콜 중독자가 됐다. 어머니는 신경쇠약증에 걸려 아들을 박대했다. 혹독했던 어린 시절 부모는 전용복을 정식 중학교 대신에 미국인이 세운 비인가 학교에 보냈다. 동생들을 기르고 병들고 술 퍼 마시는 부모를 수발했다. 풀빵 장사에 산동네로 연탄도 날랐다. 그 돈으로 어머니에게 약을 사 먹이고 공책 사서 겨우 야학에 다니며 공부했다. 유일한 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전용복의 외삼촌은 불꽃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온 ‘불의 화가’ 김종근이다. “다섯 살 때부터 외삼촌 어깨 너머 그림을 배웠다. 그런데 성격 괄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삼촌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전용복은 독학으로 예술을 배웠다.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부모 사랑 못 받은 설움을 그림으로 이겼다. 동생들 먹여 살리는 고달픔도 그림으로 달랬다. 중3 나이가 되었다. 공부에 목말랐던 전용복은 북부산중학교라는 학교에 편입시험을 친 후 부산 동성고 야간에 진학했다. 낮에 공부, 밤에 영어, 수학 과외를 했고 크리스마스 때면 손으로 그린 카드를 팔았다. 솜씨가 좋아 제지회사에서 카드 사이즈로 종이를 잔뜩 받아와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피 속의 예기(藝氣)는 그렇게 농축돼갔다. 옻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동네 가구상에서 옻칠한 장롱을 팔았는데, 할아버지들한테 술 사주면서 꼬치꼬치 묻곤 했다. 옻에 대한 호오(好惡)는 없었다. 그저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형의 그림자는 희미해졌고 부모의 학대도 점차 사라졌다. 전용복이 말했다. “억울해서라도 비뚤어지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덕택에 그 혹독한 시절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가장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 bgcolor='#ffffff' /> 옻과의 만남, 그리고 집안의 부활 해병대에 자원해 군대를 마치고 스물 네 살 되던 1976년 그는 부산 목재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서 다시 옻을 만났다. 웬만한 부잣집은 열자 짜리 자개농을 부(富)의 상징으로 들여놓던 시절이었다. 전용복은 회사에 나무만 팔지 말고 장롱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디자인에 재주가 좀 있으니 내가 디자인하고 옻칠을 하면 된다고 했다.” 회사는 부산 옆 양산에 공장을 설립했다. 전용복은 장롱 디자이너가 됐다. 장롱이 출고되면서부터 회사는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고졸 평사원 전용복은 3년 만에 기획실장으로 수직 승진했다. 망가졌던 집안은 부활했다. 인간 이새기는 어느덧 집안의 기둥이 됐다. “회사에서 내게 재무까지 맡겼다. 무한책임을 준 것이다. 장롱은 만드는 족족 팔렸다. 정말 내가 장인(匠人)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어느 날 회사 사주가 바른말 하는 전용복에게 “대학도 못 나온 놈 키워줬더니 어디다 대고 말을 함부로!”하며 뒤통수에 한방을 갈겨버린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키워준 은인. 하지만 그 찰라적 에피소드에 전용복은 그날로 회사를 때려치우고 부산에 예린칠연구소(藝鱗漆 究所)를 설립했다. 1980년이었다.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과의 만남 당시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에 ‘진짜 옻’은 물량이 너무 적고 비쌌다. 그래서 쉽게 마르고 싸게 만들 수 있는 인공 옻 ‘카슈’를 썼다. 전용복도 마찬가지였다. “카슈가 뭔지, 아니, 카슈가 진짜 옻인 줄 알고 사용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진짜 옻으로 짬짬이 내 작품을 만들곤 했다.” 그 진짜 옻으로 만든 가구와 작품으로 1985년 첫 전시회를 가졌다. 전용복은 한국에서 꽤 잘 나가는 옻쟁이, 아니 칠예가(漆藝家)로 입지를 다져갔다. 전시회를 한창 준비 중이던 1984년, 일본인 한 사람이 네모난 밥상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도쿄에서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이라는 연회장을 운영하는 호소카와(細川)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오젱’이라 부르는 고색창연한 낡은 밥상을 수리해달라는 것이다. 작가로서 남의 것 고쳐주는 게 탐탁치 않았지만 일본 칠예를 알 기회라는 생각에 고쳐줬다. 낡은 그 분위기 그대로 고쳐줬다가 한번 ‘빠꾸’ 맞고 두 번째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주자고 작심하고 제대로 만들어줬다.” 이듬해 메구로가조엔에서 재주문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똑같은 오젱 보수였지만 갯수가 1000개나 됐다. 전용복은 “식당 하나 굉장히 큰가 보다 했다”고 했다. 메구로가조엔의 ‘가조엔’은 한자로 ‘雅敍園(아서원)’, 한국에서 중화요리집 이름으로 흔히 쓰는 이름이 아닌가. 전용복은 “큰 주문 하나 맡았다”는 기분으로 도쿄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는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일본의 자존심,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메구로가조엔은 1930년대 호소카와 가문이 만든 대형 연회장이다. 2.6㏊에 이르는 부지에 벽, 천장, 바닥을 옻 작품 5000점이 뒤덮은 공간이다. 일본 정부가 역사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일본 칠예의 보고(寶庫)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숨이 막혔다. 눈길 가는 곳마다 빛나는 자개 하며 눈빛을 흡수할 듯한 검은 옻색…. 그냥 요리점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메구로가조엔은 지진과 홍수로 붕괴일보 직전이었다. 호소카와가에서는 부술지 복원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품을 만지고 있는데 연회장 입구 위 천마도(天馬圖)를 보고 피가 끓어올랐다.” 굵직굵직한 자개로 말과 천사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오른쪽 구석에 원화를 그린 일본 화가 이름과 옻그림을 완성한 작업자 이름이 있었다. ‘光信’. 거침없고 씨알 굵은 나전 솜씨는 틀림없는 조선시대 나전기법이었고 거기에 식민시대 조선의 장인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칠예작품들은 열 중 여덟이 조선과 고려 기법이었다. 넋을 잃고 있는 전용복에게 메구로가조엔의 고위층이 물었다. “복원하게 되면 입찰할 생각 있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내가 한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니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감독이 되다 “복원 작업의 100분의 1만 맡아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 선배들이 왔을 때는 해봤자 박상, 김상 정도 대접 받았겠지. 내가 복원하면 선생이란 소리를 들을 거 아닌가. 일을 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준비해야 할 거 아닌가. 아는 게 없으면 공부하면 되지.”
복원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용복은 부산의 2년제 성심외국어대 일어과에 등록했다. 부산의 회사는 대충 관리하고 두세 달에 한번씩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 옻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옻쟁이란 옻쟁이는 다 만나고 다녔다. 가슴 속에 녹음기 하나 품고 술 사주며 지식을 훔쳤다. 하루에 100엔짜리 낫또(일본식 된장) 한끼 먹고 다니며 공부했다. 도쿄 역 앞에 있는 삼성당 서점에서 옻 전문서적을 베끼고…수시로 메구로가조엔에 들러서 샘플 조각을 떼서 연구했다…잠은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노숙했다. 텃세 부리는 노숙자들 손봐주고 오야붕 대접 받으며 잤다.” 2년 뒤인 1988년 1월, 마침내 메구로가조엔에서 연락이 왔다. “관심이 있으시니 와서 한번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연구노트와 기획안을 들고 날아갔다. 첫 방일 이후 처음으로 ‘호텔’에서 1주일 대접 받으며 지냈다. 사다리를 타고서 작품 하나하나를 짚으며 ‘복원 가능’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건물 신축을 맡은 건설회사가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작품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말 하게 하지 말라. 싫으면 그냥 간다.” 전용복은 배짱을 부리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허무맹랑한 꿈 때문에 이미 부산 집은 전기도 끊기고 쌀 뒤주도 바닥이 드러난 뒤였다. “그래도 전화세만은 꼭 냈다. 일본에서 전화가 올 테니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갔다. 전용복은 소주와 김치로 속 타는 하루를 보냈다. “잘 때 빼고는 술에 취해서 전화통만 멍하니 바라보고 살았다. 내 키가 182㎝인데, 80㎏이 넘던 몸이 62㎏까지 빠졌다. 4월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첫 마디가 ‘모시모시’였다.” 전용복은 그 때 대화를 지금도 기억한다. ”전 선생, 우리 간부회의에서 복원 및 창작작업에 따른 모든 작업을 전부를 선생에게 맡기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지난달 18일, 도쿄 메구로가조엔 찻집에서 전용복은 이 말을 하다 한참을 울었다. 그날 전용복은 밖으로 튀어나가 지나가는 개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로수에게 절을 했다. “신이라는 게 있구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구나….” 당시 입찰을 했던 일본 장인이 3000명이 넘었다고 했다. “100분의 1만이라도 고마워했을 일을, 전부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꿈이다. 의지만으로도 되겠지만 결국 노력이었다. 노력 않는 자에겐 운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전쟁 같은 복원작업 영어로 ‘옻’을 ‘japan'이라고 한다. 그런 일본의 자존심을 조센징이? 메구로가조엔 복원도 뉴스였지만 직업 총책임자가 전용복이라는 게 더 큰 뉴스였다. 기자들에게 전용복이 말했다. “다른 분들은 가문과 학벌을 내세운 것 같다. 나는 목숨밖에 내세울 게 없다. 조선에서 왔던 장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부끄럽지 않게 복원하겠다.” 1988년 9월 전용복은 가족과 제자 7명을 이끌고 이와테(岩手)현 가와이무라(川井村)의 폐교에 작업실을 열고 복원을 시작했다. 이와테현은 일본 옻의 대표 산지고 가와이무라에는 옻칠의 천적인 먼지가 없었다. 하지만 길거리에 뱀이 기어 다니고 겨울이면 눈이 몇 미터씩 쌓이는 첩첩산중이었다. 송이(29), 혜진(26) 두 딸과 아내 정하영 그리고 가와이무라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현민(20)은 “왜 우리가 여기 살아야 하냐”며 남편과 아빠를 비난했다. 신칸센으로 세시간이 걸리는 오지에서 나중에 100명으로 불어난 전용복 사단은 그렇게 일했다. “공사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정말 목숨 걸고 일했다. 제자들을 보니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들이었다.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옻을 칠하고 금박을 붙이다 보니 얼굴에 옻방울이 수시로 떨어졌다. 우리 모두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랐고 벗겨진 살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3년 뒤인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을 열던 날, 새까맣게 옻물이 든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전용복의 눈 앞에 일장기와 함께 태극기가 펄럭였다. 나이 서른 여섯, 전용복은 그날 기절하고 말았다.
세계 최대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이와테현에서는 그에게 미술관 운영을 의뢰했다. 이와테 출신의 서양화가가 만들었다가 그의 사후 주차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던 미술관이다. 3년 준비 끝에 2004년 5월 26일 이와테현 모리오카(盛岡)시에 이와야마칠예미술관(岩山漆藝美術館)이 개관했다. 이와테(岩手)의 岩과 부산(釜山)의 山에서 이름을 땄다. “귀화를 권유 받았지만 하지 않았다. 귀화했으면 문화기금 받아서 편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의 옻칠쟁이가 아닌가.” 미술관에는 세계 최대 칠예작품인 ‘이와테의 혼’(18m x 2.42m)을 비롯해 그와 제자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와테현의 문화예술심의위원도 맡고 있다. “이 미술관, 내 것이 아니다. 내년 말쯤이면 들어간 빚도 다 갚게 된다. 그러면 미술관은 이와테에게 돌려줄 거다. 한 예술가가 최선을 다해 바로 세웠다는 거 보여주고, 작가로 인정 받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옻칠할 붓 하나 넣고 봇짐 싸면 된다.” 전용복의 작품 한 점은 몇 천만 원을 호가한다. 한해 수입이 5억 원이지만 생활비 빼고는 모든 수입을 그는 미술관에 바쳤다. ‘돌려준다는 것’, 또 있다. 전용복은 아들 현민의 친구, 니시다 코헤이(西田浩平·19)라는 젊은이를 뒤를 이을 제자로 낙점했다. “예술에 국경이 어디 있는가. 언젠가 현민이도 예술을 할 것이다. 니시다와 함께 옻을 계승 발전하겠지.” 뉴질랜드 명문 오클랜드대 미술사 전공에 합격했던 현민은 오클랜드를 포기하고 서울대 역사교육학과에 외국인 특례전형을 접수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5억3000만원짜리 시계 올 5월 메구로가조엔에서 일본 최고의 시계회사 세이코의 신제품 발표회가 열렸다. ‘Credor 典雅’ 시리즈. 전용복이 옻으로 디자인한 시계 12점 발표회다. 지름 3cm짜리 시계 하나 가격이 5250만엔. 옻을 씌우지 않았다면 400만 엔이었을 시계가 전용복의 붓칠 하나로 열 배 넘게 뛴 것이다. 일본의 자존심 세이코가 칠예 시계를 전용복과 만든다는 뉴스에 일본 공예가들이 광분했다. 메구로가조엔,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에 이어 세이코까지? 결국 지난 9월 세이코에서는 지바현에 있는 본사에서 회의를 열고 전용복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했다. 통보를 받는 순간 어딘가에서 전화가 오고, 전화를 받은 임원 얼굴이 새파래졌다. “12개가 전부 팔렸다!” 며칠 뒤 고위층이 이와테로 사람을 보내 사과를 했고 내년에 만들 새로운 시리즈 계약에 합의했다. 2008년 10월 전용복의 꿈 혹은 恨 18일 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도쿄 메구로가조엔은 그 찬란한 광휘 속에 사람들로 붐볐다. 밤새들이 정원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데, 실내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다. 엘리베이터부터 전용복의 나전칠 작품이다. 문부터 내부까지 공작과 해태가 반짝인다. 벽면에는 ‘전용복 작’이라는 금빛 명패가 선명하다. 스쳐가는 직원들은 걸음을 멈추고 전용복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조선 장인 광신이 만든 작품, 그리고 전용복의 작품들에서 메구로가조엔과 첫 인연을 맺은 작은 소반까지 다 봤다. 전용복이 말했다. “지금 저승사자가 온다면 기꺼이 이리 말할 것이다. ‘이제껏 나를 있게 해줘서 고맙다. 내 기꺼이 그대를 따라가겠다’.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고 할 거다. 내 작품들이 살아 있고 내 아들과 제자들이 살아 있는 한 죽는 게 아니라고.” 흐뭇함 한 켠에 물기가 묻어 있다. “내 부모, 내 형이 묻혀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뿌리가 한국이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이만큼 컸다. 이제 나를 있게 해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20대부터 치열하게 싸워온 장인은 “내 뿌리 한국으로 돌아가, 하늘로 간 예인(藝人) 백남준 버금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 옻칠쟁이라고 천대하고 왜식(倭式) 옻쟁이라고 비난하니 참으로 난감하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고려청자를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치자. 500년 뒤 누군가가 내 작품을 발굴하고서 뭐라고 할 것인가. ‘정말 보존 상태가 좋은 고려청자’라고 할 것이다.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옛것을 흉내낸다고 전통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용복은 단호했다. “전통이란 계승함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하는 가치”라고. 그걸 본인이 하고 있고, 일본 땅에서 그러하기에 한국인임을 내세우며 살고 있다고. 짧은 시간 그의 작품을 일별하고, 그가 목숨 걸고 이뤄놓은 대업의 향기를 맡아본 결과, 기자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옻 붓 하나 봇짐에 넣고 한국인 전용복을 알아주는 세계로 나가거나. [글·사진=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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