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환도

_______! 2008. 11. 21. 23:38

1. 환도의 재료에 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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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鐵)


1) 철의 채취


철은 자연상태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자철광(Fe2O3), 적철광(Fe2O3), 갈철광(Fe2O3 · xH2O)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중 자철광은 상대적으로 환원이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철광석이 많지만 주로 자철광이 많은 편이다. 자연상태의 철은 광맥을 따라 채굴되는 철광석(鐵鑛石)과 화성암이 오래 풍화되어 그 속에 있던 철 성분이 바다나 강가에 퇴적된 사철(砂鐵), 그리고 수분이 많은 곳에 형성되는 토철(土鐵)등이 있다. 한반도 선사시대의 유적에서는 아직 사철을 이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따르면 세종 당시 우리나라의 철의 산지는 34개소인데 이 가운데 사철 광산이 21개소이므로 조선시대에는 사철을 이용한 제철이 널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통 장도(粧刀) 제작은 좋은 쇠를 얻기 위하여 사철이 풍부한 지역에서 성행되었음을 볼 때 환도의 경우도 주로 순도가 높은 사철에서 철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철은 대개 산에서 캐내어 물로 일어 비중이 큰 사철만 남게 하는 수도법(水淘法)을 써서 선별하며 철광석은 노천굴에서 캐내며 맥석(脈石)의 비중이 큰 경우에는 광석을 가루를 내고 체로 치는 화도법(火淘法)을 이용하기도 한다.



2) 철의 종류


조선시대에 철의 종류를 일컫는 단어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철의 종류는 다음의 네가지 이다.



가. 무쇠



무쇠란 물쇠, 즉 쇠를 물처럼 녹여내는 선철(銑鐵)을 의미하며 생철(生鐵), 수철(水鐵)이라고도 부른다. 무쇠는 무질부리가마[鑄物爐]에서 1,400도 이상으로 10시간 이상 철광석을 가열하여 얻는데 여기서 얻어진 무쇠는 탄소량 2% 이상인 주철(鑄鐵)이므로 단조 가공은 불가능하며 주물작업을 통해 가마솥이나 농기구를 만든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는 무쇠를 생산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鍊生鐵爐法就風廂左邊橫穿一行風穴 而爐制如熟鐵爐法煉之

不以其法則不成 故煉吹比熟鐵最難云



“생철을 내는 노는 풀무 왼편에 가로로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으며 노를 만드는 방법은 숙철을 부리는 방법과 같다. 부릴 때 옳지 않으면 안 되므로, 풀무질을 하면서 부리는 방법이 숙철과 비교하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무쇠를 내려면 1,400도 이상의 온도를 오랜 시간 유지해야 하므로 기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웠으며 서양에서는 14 세기에 들어서야 무쇠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년경 철기를 사용함과 거의 동시에 무쇠를 생산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주철(鑄鐵)제 도끼가 철기시대 초기부터 나타난다.



나. 시우쇠 : 숙철(熟鐵)



시우쇠는 한자어이며 익을 숙(熟)자가 중국에서 '황(衁)' 입성음(入聲音)이 탈락된 뒤에 들어온 말이다. 철광석을 쇠부리가마[製鍊爐]에서 1,200도 이상 1,300도 이하로 장시간 가열하면 묵철덩어리, 혹은 잡쇠덩이가 바닥에 생기는데 이 잡쇠덩이를 다시 강엿쇠둑[精鍊爐]과 판장쇠둑[鍛造爐]에서 분쇄 가열하여 만든 저탄소강이 곧 시우쇠이다. 우리 대장간에서 단조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철 연장은 시우쇠로 만든다. 이 시우쇠는 연철(軟鐵)인 해면철(海綿鐵)과는 다르며 쇠똥의 형성과정에서 자연 침탄(浸炭)이 일어나고 다시 강엿쇠둑에서 가루상태로 침탄(浸炭)이 일어나므로 탄소량이 해면철(海綿鐵)에 비해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다. 참쇠 : 정철(精鐵)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철을 연성(鍊成: 담금질)하여 된 것으로 정철(精鐵)이 있다. 백번 연성하여 강철이 나온 것은 서남해 산중에 있는데, 상태가 자석영(紫石英)과 같다. 무릇 도(刀), 검(劍), 도끼(斧),끌 등 여러 도구의 날들은 이 강철이다.”라고 하였다. 정철은 시우쇠를 수차례 단조 가공하여 탄소량(炭素量)을 증가시키고 성질을 개선한 강철이다. 시우쇠의 초출품(初出品)을 신철(薪鐵)이라고 하는데 이 신철 1근을 타련(打鍊)하면 정철의 열품(劣品) 4냥이 생산된다고 한다. 이때 제거되는 나머지 6냥은 맥석(脈石)혹은 맥석이 산화철(酸化鐵)과 결합한 파얄라이트(fayalite)가 대부분이다



라. 뽕쇠



장도장의 증언에 의하면 장도날의 재료는 철의 원료를 제련할 때 화덕 밑에 응고되고 남은 뽕쇠로 만들며 뽕쇠만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서 부러지기 쉬우므로 시우쇠에 강도 높은 뽕쇠를 물려 넣어서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성질의 칼날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 뽕쇠가 과연 어떤 쇠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바가 없다. 그러나 뽕쇠가 가마 안에 얻어진 고탄소강(高炭素鋼)이라면 이는 잡쇠덩이중 탄소 함유량이 높은 철을 선별해낸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소위 ‘강쇠’나 ‘깡쇠’라고 부르는 전통 공구강과 같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잡쇠덩이는 탄소량이 고르지 않아 그중에는 고탄소강과 저탄소강이 혼재되어 있다. 환도 제작시에는 날 부분에는 경도가 높은 고탄소강이 필요했으므로 일본도의 제조에 사용되는 옥강(玉鋼, 다마하가네)과 거의 같은 성분인 뽕쇠를 잡쇠덩이중에서 별도로 선별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좀 더 확실한 사실은 환도의 재질분석이 있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2. 구리 합금(合金)


1) 황동(黃銅), 놋쇠, 주물유기(鍮器), 퉁쇠, 두석(豆錫)


우리나라에서 황동 혹은 놋쇠라는 단어는 특정 성분의 구리 합금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노란 빛이 나는 모든 구리 합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노란색 콩과 같다고 하여 두석(豆錫)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아연(亞鉛) 합금의 퉁쇠와 주석(朱錫) 합금의 방짜 모두가 광의의 의미에서 황동에 포함된다. 그러나 협의의 개념으로 황동은 구리 60%, 아연 40%의 합금을 의미한다.



2) 청동(靑銅) 유동(鍮銅), 향동(響銅), 방짜유기(鍮器)


청동은 구리-주석계 합금의 총칭이다. 구리70%, 주석30% 혹은 구리 70%, 주석15%, 아연15%의 비율로 합금하여 사용한다. 주석이 소량 함유되면 붉은 구리색이 나다가 30% 가까이 주석이 들어가면 은백색으로 된다. 청동이 황동보다 기계적 성질과 가공성, 색상등이 좋지만 주석은 비싼 광물이므로 주석 대신 아연을 넣은 황동을 쓰는 것이다.



3) 백동(白銅), 백통


조선시대의 백동(cupro-nickel)은 황동과 마찬가지로 특정 성분의 합금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흰색의 구리 합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중국 송대의 과학서인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에는 ‘구리에다 비상(砒霜)을 넣어 제련하면 백동이 된다. 백동은 가공이 어렵고 품질이 좋아 호사스런 사람이 이를 사용한다’라고 하였고 류희(柳喜)의 『물명고』(物名考)에는 ‘백동은 적동(赤銅)과 은(銀)을 연(煉)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백동은 모두 구리, 니켈 합금이며 구리75% 니켈 25% 혹은 구리 58%, 아연 5%, 니켈 37%의 비율로 합금하여 만든 합금이며 주로 은을 대신하여 담배를 재는 대토리와 입에 무는 물초리에 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20년(1438년)에 경상도 채방 별감(採訪別監) 백환(白環)이 울산군(蔚山郡) 달천(達川)에서 백동(白銅)을 채굴하여 구리 1근에 백동(白銅) 8냥쭝을 섞어 쇠돈을 만든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리 니켈 합금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보이나 백동이 민간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에 의하면 초기 담뱃대는 동(銅)제품이었는데 「점점 사치를 다투는 자들이 백동(白銅)과 오동(烏銅)을 써서 만들고 금ㆍ은을 새겨 넣어 치장하니 담뱃대 한 개에 2∼3백 전까지 한다. 참으로 막중한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백동은 장인들에 의해 백통이라고 불리웠으며 상온 단조에 의해 가공되어 장석으로 사용된다.


4) 오동(烏銅), 적동(赤銅)


오동은 검붉은 빛의 구리 합금을 총칭하는 말이다. 고려시대에는 구리-주석 합금(Cu90% - 10% Sn)을 650∼750℃로 가열하여 겉면에 산화제1구리(Cu2O)을 형성시켜 불그레한 검은빛이 나도록 하였으며 향로등의 기물을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오동은 중국에서 유래된 구리, 금 합금으로서 일본에서는 샤꾸도(赤銅)라고 한다. 1834년에 간행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구리 1냥에 금 1푼을 넣어 녹여서 오동을 만든다. 진오동(眞烏銅)은 적동(赤銅) 1냥에 엽자금(葉子金) 5푼 또는 6푼을 넣으면 상품(上品)이 되고, 3푼을 넣은 것은 하품(下品)으로 친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오동은 금이 3% ~ 5% 함유된 구리-금 합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은(銀)을 첨가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金) 대신 은(銀)만을 주로 첨가한 오동은 가오동(假烏銅)이라고 부른다.



구리와 금을 합금하면 붉은 빛의 적동(赤銅)이 되는데 이 적동을 며칠(어떤 기록은 한달) 정도 삭힌 남자 아이의 오줌을 적신 창호지로 감싸 따뜻한 아랫목에 몇 시간을 두면 검은 빛을 띄게 된다. 오동은 주로 담뱃대의 대토리 부분에 쓰였으며 은입사에 의해 화려함을 더했다.





3. 금(金), 은(銀)


금속공예품의 재료로는 오금(五金)이라 하여 금(金), 은(銀), 동(銅), 석(石), 철(鐵)을 꼽는데 이중에도 금(金)과 은(銀)은 희귀 광물로서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초기부터 금을 생산하여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고조선 시기의 팽이그릇과 함께 금제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금 세공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삼국 모두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하고 다양한 금 세공품을 남겼다. 도검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에는 금실과 금판으로 환두대도를 화려하게 꾸민 예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민간인의 금, 은 사용은 철저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도검류 중에서 금으로 장식된 도검류는 매우 드물다. 조선 태조 3년 6월의 기사에서 조정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은의 사용도 일정 용도에 국한해서 허용하였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한 환도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환도의 제작에 금이나 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임진변란 후에 방금(防禁)이 해이해져서 시정(市井)에서 은을 화폐로 삼았으므로 그 이후부터 은의 사용은 흔해졌다 한다.

현존하는 환도중 금으로 장식한 예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은장식이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전통 환도에 관한 설명중 백은(白銀) 운운한 것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백통 장식을 말한다.





4. 목재(木材)


우리나라에서 목공예에 이용된 목재로는 무겁고 튼튼한 목재인 단풍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밤나무와 가볍고 덜 견고한 목재인 오동나무, 피나무, 버드나무등이 있다. 이 밖에도 고급 목재로서 흑단(黑檀)나무, 먹감나무[黑柴], 향나무, 침향목(沈香木)등이 사용된다. 이중에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데 사용된 목재는 주로 강도가 높은 벚나무 등이지만 일본도의 영향으로 오동나무등 가벼운 목재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5. 사어피(沙魚皮)


칼자루나 칼집을 싸는 사어피는 상어의 가죽이다. 본초강목에서는 교어피(鮫魚皮)가 곧 사어피이며 가죽의 겉으로는 진주 같은 반점이 있으며 잔등가죽에는 거친 비늘이 어기 어기 서려 있는데 이것으로 나무를 문지르면 닳는 것이 속새와 비슷하다. 말안장, 칼집, 칼자루를 장식하는 데 쓴다”고 적혀 있다.






<사어피(沙魚皮)>
<매화교(梅花鮫)-일본>




원래 상어는 한자로 사어(攄魚)라고 하는데 魚'의 古音이 옛 이응‘어’였기 때문에 '상어'로 발음하는 것이다. 상어의 껍질이 모래와 같이 거칠다 하여 상어를 사어(沙魚), 사어(娑魚)라고도 한다. 가오리 중에도 우리나라의 저자가오리(Breviraja isotrachys) 동남아 등지에서 잡히는 노랑가오리(Stingray)등은 상어 가죽과 마찬가지로 등쪽에는 작은 좁쌀 모양의 가시가 많아 상어 가죽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가오리 가죽은 다른 가죽과 달리 칼로 찢어도 찢겨지지 않고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특징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사어의 종류가 하교(河鮫), 매화교(梅花鮫), 호표국악교(虎豹菊萼鮫)가 있다고 하였는데 하교는 민물 가오리로 추정되며 매화피는 꽃잎 모양의 돌기가 아름다워 현재까지도 고급품으로 치는 가오리 가죽이다.





6. 기타 재료


1) 대모(玳瑁)


대모는 바다거북이, 특히 대모거북이(Eretmochelys imbricata)의 등껍질이다. 이 거북이의 등딱지는 담흑색의 심장 모양이고 황색이나 황갈색 바탕에 진한 흑색의 구름 무늬가 있다.



2) 옥(玉)


옥은 경옥(硬玉, jadeit)과 연옥(軟玉, jada)으로 나뉘는데 연옥은 각섬석(角閃石)의 일종이며, 경옥은 알칼리 휘석(輝石)의 일종이다. 옥은 한자로 비취(翡翠)라고 쓰며 특히 적색과 녹색 옥을 비취라고 한다. 경옥은 경도가 7.5도이고 연옥은 경도가 6∼6.5이며 단단한 대신 깨지기 쉬운 성질이 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옥을 귀하게 여겼는데 특히 우리 민족은 옥을 귀하게 여겨 마한(馬韓)에서는 “금은이나 비단, 담요 같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조에는 연산군이 보검을 만들도록 명하면서 칼자루를 옥으로 꾸미도록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옥으로 만든 칼자루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대신에 코등이를 옥으로 만든 예가 몇 점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잡방(雜方)에는 “두꺼비기름[蟾蜍肪]을 옥(玉)에 바르면 옥을 조각하기가 납(蠟)을 새기듯이 쉽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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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환도의 전통적인 제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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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칼은 중앙의 군기감에서 일부를 제작하였지만 대부분은 지방에서 제작되어 공납되었다. 세종조 병진년에 병조에서 군기감(軍器監)의 장인을 늘리는 일에 대해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환도장(環刀匠)은 6명이지만 환도장과는 별도로 마조장(磨造匠), 주성장(鑄成匠), 소목장(小木匠), 노야장(爐冶匠), 동장(銅匠)이 있으므로 실제 환도 제작에 참여하는 군기감 인원은 활씬 많았을 것이다. 세조대의 기록으로는 환도장(環刀匠)이 33인을 정액으로 하여 3번(番)으로 나누어 매(每) 1번(番)에 11인씩 일했다. 조선왕조실록의 환도 공납 기록을 보면 특정 지역에서만 칼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방에서 환도를 제작하여 조정에 진상을 하였으며 따라서 일반 보병이 사용한 환도는 소규모 대장간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방 대장장이의 기술은 그리 높지 못하였던 듯하며 당시 문헌에는 칼 담금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열에 너댓 뿐이라고 했다.



조선후기 훈련도감 살수(殺手)의 병기와 군복을 조달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기록한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을 보면 환도 제작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항목
가격
비고

인가(刃價)
1냥8전
칼날 가격

연마공전(鍊磨工錢)
3전
칼날을 숫돌로 가는 비용

마광공전(磨光工錢)
3전
칼날에 광을 내는 비용

양마철가(兩馬鐵價)
3전
코등이 제조 비용

목병가(木柄價)
5분
칼자루(목제부분) 가격, 칼집?

칠가급공전(柒價及工錢)
1전
옻칠 비용

병감기가(柄甘其價)
1전5분
칼자루를 끈으로 감는 비용

두석장식가(豆錫粧飾價)
8전
장식 쇠붙이 제작 가격

환도1병(環刀 一柄)
3냥8전
환도 조달 가격 총계




위의 비목 구분은 환도 제조 공정의 분업 형태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즉, 대장장이, 연사(숫돌질), 마광(쇠로 문질러 광을 낸다), 목공(칼자루와 칼집 제조), 칠쟁이(옻칠), 두석장(쇠붙이 장식 제작)등이 도검 제조에 참여하여 분업적으로 작업하였던 것이다.


1. 강철의 생산


아직 환도 칼날의 시료 분석이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므로 환도 제작에 사용된 철이 어떤 종류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미 언급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지금 향병(鄕兵)들이 휴대하고 있는 검(劍)은 다 호미[鉏] 따위를 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베어도 절단되지 않고 목봉과 부딪쳐도 그만 부러지니 그 용도가 목봉만도 못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향병의 환도는 형편없었음이 분명하지만 반대로 중앙군이 사용한 환도는 시우쇠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있다. 장도(粧刀)의 예로 볼 때 중앙군이 사용한 환도는 시우쇠를 정련한 참쇠[精鐵]로 만들거나 혹은 장도 제작과 마찬가지로 뽕쇠를 참쇠와 단접해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인 참쇠 생산은 쇠부리가마(제련로)공정 - 강엿쇠둑(정련로) 공정- 판장쇠둑(단조로)공정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쇠부리가마에서는 잡쇠덩이를 만들고 이 잡쇠덩이를 강엿쇠둑에서 태워 숯과 쇠똥을 제거하고 난 후 판장쇠둑에서 단련을 통해 맥석(脈石)등 이물질을 압출해내면 참쇠가 된다. 판장쇠둑 공정을 거치지 않거나 적당히 거친 쇠는 시우쇠에 불과한 것이며 판장쇠둑에서 오래 단련을 거듭하여야 정철(精鐵)이 된다.






<가마점> 기산 김준근
<대장장이> 기산 김준근






1) 쇠부리가마 : 제련로(製鍊爐)


쇠부리가마는 잡쇠덩이를 만드는 가마로서 물부리가마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편이며 구조도 간단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는 숙철의 제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我東煉熟鐵爐法 就風廂左邊橫穿九行風穴而冶爐製法

必先築四郭 郭內築九行墻 每行當風廂之每風穴 墻上縱橫置剛炭消息之



“우리 나라에서 숙철을 제련하는 방법은 풀무 왼쪽에 9개의 바람 구멍을 뚫는 제련법인데 우선 4면에 벽을 쌓고 그 상자 안에는 9개의 골을 만들어 각 골마다 풀무구멍과 맞추고 가로세로로 단단한 숯을 두어 풀무질을 한다.”



현재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쇠부리가마는 경주시 월성군 녹동(鹿洞) 토둑이다. 이 토둑은 유명한 토철 산지인 달천 광산(達川鑛山)으로부터 철을 공급받아 1940년대까지도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녹동의 쇠부리가마는 가로 세로 1.2m인 직방체로서 높이는 5m이다. 가마 바닥에서 60cm 높이에는 높이 70cm, 폭 55cm, 들어간 부분의 길이가 약 80cm가 되며 그 속은 20∼30% 정도 좁혀져 있다. 이 골은 바로 하나의 풀무와 이어져 있다. 둑 안(화덕 구덩이) 가마의 벽은 30∼50cm인 돌과 진흙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가마는 도편수의 대장인 골편수 1명, 원불편수, 뒷불편수, 독수리, 쇠대장(걸대장), 숯대장 각 1명, 풀무꾼 16명 등 통틀어 27명이 일하였다고 한다. 골편수는 전주와 함께 가마 자리를 물색하고 축로의 모든 일을 지휘하며 조수격인 독수리를 데리고 골구멍을 짓는다. 또한 가마 바닥을 손질하고 가마의 아궁이 돌인 불목돌을 매만진다. 그밖에 쇳물을 내는 초롱구멍자리를 마련한다. 공장장격인 원불편수는 숯대장으로 하여금 잘 마른 갈비와 관솔을 반반으로 섞은 불사르개를 30cm 두께로 깔고 참숯을 절반쯤 채운다. 고사를 지낸 후 불편수가 불을 지피고 선거리 8명의 풀무꾼은 풀무를 밟으며 이윽고 흰 연기가 피어오르면 걸대장에게 원광을 넣도록 지시한다. 불을 지핀 지 9∼11시간 지나 쇳물이 아래에 고이면 도편수의 명령에 따라 뒷불편수는 초롱구멍을 뚫어 쇳물을 뽑아낸다. 한편 부지기는 가마에 남은 잡쇳덩이를 꺼내어 강엿쇠둑으로 옮겨서 쇠를 다시 불린다.



2) 강엿쇠둑 : 정련로(精鍊爐)


잡쇠덩어리는 탄소의 분포가 극히 고르지 못하여 적게는 0.124%에서 많게는 1.351%이다.

강엿쇠둑에서 잡쇠덩어리를 잘게 분쇄하여 참숯과 함께 섞어 쌓아 올려 놓고 송풍하여 가열하면 잡쇠덩이는 반용해상태로 변하여 마치 열을 받은 강엿처럼 되면서 눅진눅진해진다. 이 과정에서 잡쇠에 박혀있던 숯과 쇠똥등 불순물이 제거되고 탄소량도 전체적으로 일정해진 결과 망치질에 견딜 수 있는 점력이 생긴다. 이것을 강엿쇠덩이라 한다.



3) 판장쇠둑 : 단조로(鍛造爐)


강엿쇠는 다시 판장쇠둑에서 잘게 분쇄하고 가열하여 이를 모루위에서 계속적인 메질을 한다. 철의 성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물질은 탄소와 맥석인데 이 맥석 및 맥석과 철이 결합한 파얄라이트(fayalite)는 단타(鍛打) 과정을 통하여 부서져 나가거나 혹은 강철 조직안으로 고루 분산된다. 또한 철괴의 안에는 작은 공극(孔隙)등이 존재하는데 이 또한 단타(鍛打) 과정에서 감소된다.





2. 칼날의 제작


1) 단조


참쇠나 뽕쇠가 얻어지면 단조 작업을 통해 칼날을 제작하여야 한다.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을 보면 대장간의 주인인 대장(大匠)이 집게로 달군 쇠를 원통형의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 명의 메질꾼이 쇠를 두드린다 어린 풀무꾼은 발풀무로 열심히 화덕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으며 어린 소년 하나가 깨진 술병의 물을 숫돌에 부어가며 낫을 갈고 있다. 대장의 오른편에는 담금질에 쓰는 나무 구유통 하나가 놓여있고 대장의 뒤편에는 상자 모양의 궤풀무와 여러 가지 도구를 담는 넓은 나무함이 있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대장간 모습은 바로 이러했을 것이다.





<김홍도(金弘道), 단야(鍛冶)>, 세로(세로) : 27.9 cm / 가로(가로) : 24 cm 보물(寶物)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은 몇 군데 남지 않은 한국의 전통 대장간에서는 현재도 조선 시대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서 작업을 하고 있다. 다만, 일손을 덜기 위해서 전동 해머와 연삭기, 전기 풍구 등이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다.






<전통적인 화덕>
<근래의 대장간 화덕>







<풀무> 전통 방식으로 화덕에 바람을 불어 넣는 수동 풀무이다
<전동 풍구>







<원형 모루>

전통양식의 모루이다.
<거북모루>

일본을 거쳐 유입된 서양식 모루이다






<집게> 수천년간 그 형태가 변하지 않은 집게, 대장장이의 상징이다.







<망치>
<전동해머> 일본의 도검장인들도 같은 것을 사용한다.






대장장이는 메질과 담금질을 번갈아 하면서 참쇠를 다듬어 가는데 어느 정도 기물의 형태를 잡는 것을 대장간에서는 “깜을 잡는다”라고 한다. 어지간히 깜이 잡히면 슴베 부분을 만드는데 메질을 계속해 뾰족하게 쇠를 뽑아내는 것이다.



환도의 단조 과정에서 일본도에서와 같은 접쇠(folding) 공정의 적용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접쇠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날의 표면에 뚜렷한 접쇠무늬(Jihada 地肌)가 나타나는데 아직 접쇠무늬(Jihada 地肌)가 있는 날은 발견되지 않는다. 흔히들 일본의 접쇠공정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비감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는 철 제품의 원료가 되는 철정 자체부터가 접쇠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 이후 시기에 접쇠 공정이 사라진 것은 강철 생산 및 가공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접쇠의 필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장도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통적인 방법에 의할 경우 장도날을 만들 때는 경도가 높은 뽕쇠와 저탄소강인 시우쇠를 단접하여 만든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에 의할 경우 칼날에 쓰이는 철은 “ㄷ”자형으로 구부린 시우쇠 판 안으로 뽕쇠판을 물려서 단접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서 단단한 가와가네(皮鐵)를 접어서 U자로 만들고 그 안에 연한 신가네(芯鐵)를 넣고 단접하는 것과 비교하여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장도장의 증언이 정확하다면 이는 뽕쇠를 시우쇠로 완전히 감싸는 것이 아니라 칼날 부분만을 남겨놓고 감싸서 뽕쇠의 칼날이 1/3정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도에도 이와 유사한 와리하데스라는 복합 재질 구조가 있다.





<뽕쇠, 시우쇠 물림 구조, 위 시우쇠, 아래 뽕쇠>




환도 제작시 장도날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뽕쇠와 참쇠를 단접해서 제작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환도 제작에는 장도를 제작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공력과 정성이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환도에도 뽕쇠와 시우쇠의 단접 기술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 환도의 시료 분석을 통해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2) 담금질


칼날의 제작에 있어서 담금질[燒入, quenching]은 칼날의 강도와 경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도의 담금질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상으로 남은 바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통 대장간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철물의 담금질 방식을 참고하여 볼 수 밖에 없다.



담금질이란 강철(鋼鐵)을 변태점(變態點) 보다 30 ~ 50도 높은 온도로 가열한 후 물이나 기름에 넣어 빠르게 냉각시키는 것이다. 담금질을 하게되면 723도 이상에서 오스테나이트(austenite : γ)로 존재하던 철이 탄소를 과다하게 함유한 불안정한 상태의 마텐사이트(martensite)가 된다. 탄소량이 많은 과공석강의 경우는 마텐사이트와 함께 일부의 시멘타이트(cementite : Fe3C)가 함께 형성되고 아공석강은 페라이트(ferrite)가 함께 형성된다. 담금질에 의해 형성된 마텐사이트는 탄소 원자가 철원자의 틈을 꽉메워 주므로(격자 일그러짐) 철원자의 이동이 어려워져서 강도가 높아진다. 반면에 마텐사이트는 깨지기 쉽고 냉각 과정에서 조직 내부와 외부의 냉각속도 차이, 변태속도 차이에 의해 내부 응력이 생기고 균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전통 담금질 방법으로 가장 단순한 방법은 시골 대장간에서 부엌칼을 만들 때 행하는 방식으로서 그저 칼날을 불에 달군 후 칼날 부분만을 수평으로 찬 물에 잠시 집어 넣었다가 꺼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칼날의 경도는 강해지고 칼등 부분은 서냉 과정을 통해 연성이 개선된다.



하지만 장도(粧刀) 제작시에 사용되는 담금질 방법은 좀 더 정교하다. 무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된 장도장 박용기씨의 설명에 의하면, 장도날은 도신 면적의 1/4 정도에 된장을 얇게 바른 다음 화덕에 넣어 800 ~ 900도로 달구며 이를 황토와 물을 3:7로 섞은 물에 칼날의 2/3 가량 정도 담근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된장을 바른 칼날 끝의 1/4는 경강(硬鋼)이 되고 황토물에 들어간 2/3은 중강(中鋼)이 되며 물에 들어가지 않은 부분은 연강(軟鋼)이 된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방법으로는 장도의 도신에 머리카락을 감고 된장과 고추장을 버무려서 도신에 바른 다음 그릇에 황토물을 담아 놓고 칼날 끝부터 칼등까지 일직선으로 담그는 방법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담금질 과정은 일본도 제작과정의 즈시도리(土取)와 야끼이레 (燒入れ)와도 유사하며 환도를 복원 제작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의 환도 복원시 담금질 방법에 관해서는 장도의 담금질 방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되, 계속된 실험을 통하여 환도 제작에 보다 적합한 담금질 기법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3) 연마


칼날을 단련하는 장인은 단조작업을 통해서 칼날의 형태를 잡고 깎칼질 혹은 까끌질과 거친 숫돌질로 칼날의 기본 형태를 잡은 뒤 마조장(磨造匠)에게 칼을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 깎칼질이란 강철 칼날로 금속의 표면을 깎아 다듬는 공정을 말한다.



마조장(磨造匠)은 이미 칼의 형태가 드러난 칼날을 숫돌에 갈아서 날을 세우고 표면의 광택을 드러내게 된다. 조선시대 군기감(軍器監)에는 연마를 담당하는 장인인 마조장(磨造匠)이 별도로 있으며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에는 연마공전(鍊磨工錢)으로 3 전(錢)이 지급되고 있다.



처음 칼을 제작할 때의 칼을 가는 법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녹슨 칼을 가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칼을 가는 데는 물과 추석(麤石)을 써서는 아니되고 마땅히 향유(香油)를 이석(膩石)에 붓고 오래 갈아서 녹을 제거한다."



추석(麤石)이란 거친 숫돌을 말하며 이석(膩石)은 매끄러운 숫돌을 말한다. 칼을 가는데 기름을 쓰는 것은 요즘에도 행해지는 방법이며 기름의 윤활 작용으로 인해 날이 좀 더 곱게 갈아지는 효과가 있다. 일본도의 제작과정을 고려해 볼 때 숫돌은 굵은 연마석으로 시작해서 세밀한 연마석으로 바꾸어가며 칼날을 다듬었을 것으로 보인다.



4) 마광(磨光)


마광(磨光)이란 금속 제품의 표면 마무리를 위하여 금속의 표면을 문질러 광을 내는 공예기법이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민간에서 칼날에 광을 내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쇠부리둑[鐵爐邊]을 쳐서 떨어진 철아아(鐵蛾兒) 3냥을 목탄(木炭) 1냥에 넣어 수은(水銀) 1전과 함께 가루로 만들어 칼 위에 뿌리고 베조각으로 기름을 찍어 오래도록 문지르면 그 광(光)이 거울과 같다. 그 다음 솜으로 깨끗이 닦아 우유를 발라서 걸어두면 오래도록 녹이 슬지 않는다. 《거가필용》"




철아아(鐵蛾兒)는 똥쇠를 말하는 듯한데 이 똥쇠를 숯과 수은에 섞어 연마제를 만들고 기름 묻힌 삼베조각으로 닦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철금속의 마광(磨光)은 금속 표면을 숯가루로 닦아낸 후 광쇠로 문질러 광을 내는데 위에서 설명하는 방법은 숯가루로 닦아내는 공정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에도 마광공전(磨光工錢)으로 3전을 지급한 것으로 나타난다.





3. 칼집의 제작


1) 목공 작업


환도는 높은 강도가 요구되는 무기이고 특히 칼집은 종종 방어무기가 되므로 벚나무 등 비교적 경도가 높고 무거운 목재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칼집은 두 개의 나무 조각을 각각 칼날에 맞추어 파내서 만들며 이 두 조각을 찹쌀 풀을 이용해서 붙다. 그 다음 종이나 삼베, 무명에 풀을 발라서 칼집을 완전히 감싸면 풀이 마르면서 칼집은 매우 단단하게 고정된다. 우리나라의 칼집은 일본에 비해 나무의 두께가 얇은 편인데 이는 칼집을 전통 한지나 삼베 등에 풀을 발라 단단히 감싸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통 목공 작업에 사용되는 공구로는 깎낫, 오금대패, 송곳, 줄 등이 있다.





<한국 전통 목공구> : 깎낫, 오금대패, 송곳, 줄




2) 옻칠


옻칠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 행해진 전통 칠 예술로서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옻 수액을 나무나 금속 표면에 발라 아름답게 꾸미는 동시에 바탕을 오래 보존되도록 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미 은(殷), 주(周)시대부터 옻칠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청동기 시대에 칼자루와 칼집을 비롯한 각종 도구에 옻칠을 행하였다. 일단 옻칠이 굳으면 산이나 알카리, 염분에 부식되지 않기 때문에 이 천년 이상이 경과한 후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물이 발견된다.



옻칠은 천연 옻을 여과기로 거른 생칠(生漆)과 생칠을 다시 가열 정제한 정제칠(精製漆)로 나뉘며 정제칠은 다시 투명칠(透漆)과 흑칠(黑漆)로 나뉘는데 투명칠에는 각종 염료를 첨가하여 여러 가지 색을 낼 수 있다.



옻칠을 한 칠기는 칠의 바탕, 즉 소지(素地) 혹은 태(胎)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환도의 경우 나무 바탕에 그대로 칠을 한 목심칠(木心漆), 삼베나 무명으로 나무를 감싼 뒤 그 위에 칠을 하는 협저탈태건칠(夾紵脫胎乾漆) 혹은 탈태칠(脫胎漆), 나무에 한지를 바른 후 그 위에 옻칠을 하는 지태칠(紙胎漆) 등이 있다.





4. 칼자루의 제작

칼자루는 칼집과 동일한 목재로 만들고 옻칠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사어피(沙魚皮)로 싸고 가죽 끈으로 감는 작업이 추가된다.



1) 칼자루 감개
칼자루를 가죽이나 끈으로 감아서 손에 쥐기 편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청동기 시대의 간돌검에서부터 나타난다. 간돌검중 자루형 석검에는 끈을 묶기 위한 홈이 한두 개 파여 있다. 또한 환두대도 중 장식환두대도의 칼자루는 금판이나 금은실로 감싸 마무리했지만 일반 병사들이 사용했던 소환두대도는 가죽끈등을 감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무예도보통지 예도편에 그려진 환도를 보면 칼자루에 가죽 등으로 촘촘히 감은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 있고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에는 병감기가(柄甘其價)가 있다. 하지만 세종실록 의 오례군례서례(五禮軍禮序禮)에 나타난 환도를 보면 칼자루에 끈으로 감은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환도중에도 가죽끈으로 칼자루를 감는 것은 적은 편이다. 일본에 비해서 춥고 건조한 기후인 우리나라에서는 칼자루를 가죽끈 등으로 반드시 감아아야 할 필요성은 없었다고 보여지며 칼자루 감기가 보편화된 것은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칼자루를 감는 소재로는 가죽이나 면끈이 사용되며 감는 방법은 일본식 감기와 유사하지만 무예도보통지에 그려진 감기 방식은 한쪽 방향으로 두개의 끈이 엇갈려가면서 감기는 전통적인 형식이다.



2) 칼자루 싸개


우리나라 환도중 고급스러운 것들은 사어피(沙魚皮)를 얇게 다듬어서 녹색이나 붉은 색으로 물을 들여 칼자루와 칼집 전체를 감싸기도 하고 손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칼자루만을 감싸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어피로 칼자루나 칼집을 감싸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평양 평양 병기창지 출토 환두대도에도 사어피로 감싼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으며 일본 정창원 소장의 당양대도, 고려양 대도의 칼자루도 사어피로 감쌌다. 하지만 환도를 감싼 어피 중 대부분은 표면을 깎아내어 매끄럽게 만든 것이므로 어피 감기의 목적은 미끄러짐 방지 보다는 장식의 목적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3) 유소(流蘇)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군례서례(五禮軍禮序禮)의 검(劍)편에는 환도의 칼자루에 홍조수아를 드리운다는 내용이 있다. 이 홍조수아는 붉은색의 유소(流蘇)로서 길게 드리워 칼을 장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유소(流蘇)가 단순히 장식 목적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효종(孝宗)조에 병사들이 칼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칼자루를 손목에 묶고 싸우도록 할 것을 명하는 왕의 전교(傳敎)가 있었음을 볼 때 이 유소(流蘇)는 원래 손목에 묶는 용도로 발전되어 오다가 후대로 와서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유소는 실을 합사해 여러 가닥을 꼬아 만든 끈목으로 만드는데 이 끈목을 조선시대에는 다회(多繪)라고 하고 끈목 만드는 것을 '다회친다'라고 하였다. 유소의 중간부분에는 끈목을 엮어 만든 매듭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술을 드리운다. 술의 종류에는 봉술· 딸기술· 방망이술· 낙지발술· 방울술· 전복술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환도에는 딸기술이나 방망이술, 봉술 등을 쌍으로 단 예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운검의 유소를 붉은색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운검 제도는 상당히 융통성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붉은색만을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5. 두석 장식


1) 두석 장식의 개요


두석장(豆錫匠)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豆錫匠)에서 유래한다.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裝飾匠)이라 해야 옳지만, 장식(裝飾)이라는 말이 아주 광범한 뜻을 가진 데다가 금속장식이라 하더라도 황동 이외에 철, 은, 오동 등 다양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어서 장식이란 말 대신 장석이라고 표기해 구별하고 있다. 환도의 두석 재료로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이 주로 사용되지만 주석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아연을 섞은 황동을 사용하기도 하며 조선 후기에 오면 은은한 흰빛을 내는 백동(구리,니켈 합금)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밖에 힘을 많이 받는 부분에는 튼튼한 철장석(鐵裝錫)이 적절하므로 칼에는 철장석이 많이 사용된다.



2) 두석의 제작 과정


장석을 만드는 공정은 먼저 합금 재료를 넣은 도가니를 불독 위에 얹어서 가열하여 녹이고 이것을 골판에 부어 식히어 쇠까치를 만든다. 이 것을 모래둑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서 0.5mm 정도의 판철(板鐵)로 늘린다. 이 때 수 천 번의 망치질을 하는데 힘 조절을 잘 해야 고른 면을 얻을 수 있다. 판철이 완성되면 깎칼로 면을 반듯하게 깍아 내는데 이를 깎칼질이라고 한다.



깎칼질이 끝난 두석 위에는 여러가지 조각을 행하는데 금속조각 기법으로는 평각(平刻)·투각(透刻)·고각(高刻)·육각(肉刻)·상감입사(象嵌入絲) 등이 있다. 평각이란 일명 음각(陰刻)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여러 가지 문양을 쪼아서 나타낸다. 투각은 바탕면의 문양에 따라 필요없는 부분을 정으로 쪼거나 오려서 빼낸다. 고각은 바탕면에 무늬를 도드라지게 튀어나오도록 한다. 육각은 가장 어려운 기법으로 기물의 외면과 내면에 정으로 두들기거나 오그려서 무늬를 나타낸다. 상감입사는 바탕에 홈을 파고 그 자리에 금·은·오동선 등을 넣은 후 빠지지 않게 다진다. 조각이 완성된 두석은 기름을 묻힌 걸레에 사기나 오지 분말을 묻혀서 문질러 광택을 낸다.



한편 철장석(鐵裝錫)은 주물이 아니라 시우쇠를 두드려서 만드는데 놋장석과 마찬가지로 넓게 펴서 판철을 만들고 이를 깎칼질로 다듬고 톱으로 썰어 형태를 만든 후 솔기름을 발라 마무리한다.





3) 두석의 종류


환도의 장석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가. 앞매기, 뒷매기

칼자루의 앞과 뒤를 감싸는 얇은 직사각형 황동판이다. 투각이 들어가는 수가 많다.



나. 가락지

두쪽으로 만들어진 칼집을 하나로 묶어주고 칼집고리를 걸 자리를 만들어주는 황동 고리이다.



다. 비녀장

흔치는 않지만 칼집 가락지에 부착되어 칼자루와 칼집을 잠가주는 비녀장이 부착되기도 한다.



라. 띠돈

띠돈은 칼을 칼띠에 거는 부분으로서 그림과 같이 띠에 거는 부분과 칼끈을 묶는 고리부분,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작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끈목을 묶어주는 작은 금속판이 두세 개 필요하다.



마. 딱가리

딱가리는 장도에서 뒷매기의 터진 부분을 덮어주는 황동판이다. 딱가리는 뒷매기를 한 후에 땜으로 붙여 넣는다. 환도의 경우도 뒷매기의 터진 부분은 딱가리를 땜질해서 붙인 것이다.



바. 환도막이

환도막이 혹은 주석막이는 한자로 동호인이며 칼날의 뿌리 부분을 덮기 위한 직사각형의 황동판이다.





6. 코등이 제작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에는 양마철가(兩馬鐵價) 3전을 지급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양마철(兩馬鐵)은 두개의 마철(馬鐵), 즉 말편자를 의미하며 코등이의 모습이 두 개의 말편자를 서로 맞붙여 놓은 것과 유사하므로 양마철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코등이는 시우쇠, 두석, 옥 등으로 만드는데 이는 다른 장석과는 달리 얇은 판석을 조각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터운 시우쇠나 청동을 모루에 올려놓고 두드려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정상으로 두석과 구별하여 별도의 공전이 지급된 것으로보인다.



환도의 코등이는 철, 놋쇠, 옥등으로 만들었는데 형태상으로는 원형이 일반적이지만 운현궁 환도처럼 팔각형이거나 육군박물관 패도처럼 타원형인 경우도 발견된다. 코등이에는 호랑이, 당초문, 국화문등이 조각되어 있다.





7. 칼의 조립


칼의 각 부분이 완성되면 환도장이 이들 부속품을 모아 하나의 환도를 조립했을 것이다. 완성된 칼날에는 주석막이 즉 동호인을 매는데 착탈이 가능한 일본의 동호인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동호인은 얇은 놋쇠판으로 칼날의 뿌리 부분을 완전히 감아 고정시킨다.

주석막이가 끝난 칼날은 칼자루에 그 슴베를 집어 넣고 나무못으로 고정시키며 이 과정에서 코등이와 덧쇠도 제자리에 끼워 넣는다. 칼자루의 앞매기와 뒷매기는 칼자루에 감은 후 땜을 하고 뒷매기에는 빠지지 않도록 작은 구리못을 박는다. 칼집의 가락지도 고정 위치에 감은 뒤 땜을 하여 고정시킨다. 이렇게 칼이 다 완성되면 비로소 끈목을 칼집고리와 띠돈에 묶고 유소를 드리워 마무리 장식을 하는 것이다.





8. 환도의 문양과 장식


1) 만자문(卍子紋)
만(卍)은 석가모니가 탄생할때 가슴에 있었던 무늬였는데, 후세에 이를 길상의 표지로 인식하였다. 사찰이나 궁궐의 담이나 벽, 다리 난간 또는 장신구의 가장자리에서, 만(卍)자의 사방끝을 연결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태의 문양을 흔히 볼수 있다. 사방 끝이 종횡으로 늘어나 펼쳐지면서 계속 이어지므로 회전의 개념에서 연상된 무한성과 장구성을 상징한다. 중국 소주(蘇州)지방에서 생산되던 비단에서 이와 같은 무늬가 있었으므로 소주단문(蘇州緞紋)이라고도 불린다.



2) 뇌문(雷紋)
번개는 하늘의 힘과 징계를 의미하며 반복적인 갈지(之)자 무늬가 부속 문양으로 널리 사용된다. 청동기 시대의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에서도 나타난다.



3) 호문(虎紋)
호랑이는 무섭고 위험한 동물이자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영물이다. 호랑이는 그 용맹함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을 쫓아주고 기근과 삼재(三災)를 막아주는 효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무관(武官)의 흉배(胸背)에도 새겨진다.



4) 용문(龍紋)
용은 조화의 능력을 지닌 영험한 존재이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왕실에서는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오조룡(五爪龍)을 그리고 사가에서는 사조룡(四爪龍)이나 삼조룡(三爪龍)을 그렸다.



5) 십장생(十長生)
십장생은 장수를 상징하는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 열 가지 자연물이다. 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하였으며 열 가지 모두를 그리기도 하지만 이중 두 세가지를 골라 그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은 장수와 함께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다른 십장생에 비해 자주 사용된다.



6) 국화문(菊花紋)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서 가을 서리 속에서도 고고함을 지키는 절개 있는 꽃이라고 여겨졌다. 또한 여러 개의 꽃잎이 반복적으로 둘러진 모습으로 인해 디자인적인 가치가 높아 코등이와 기타 환도 문양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7) 운문(雲紋)
구름은 세속을 멀리 떠난 초월의 경지와 신비로움을 상징하기도 하고 구름 안에 숨겨진 힘인 벼락의 힘, 혹은 구름으로 그 출현이 암시되는 용이나 기린 등 영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8) 편복문(蝙蝠紋)
편복(蝙蝠)은 박쥐 복(蝠)자의 발음이 복 복(福)자와 같다고 하여 오복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가구의 장석과 의복 장식, 도자기, 각종 그림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후기로 오면 박쥐의 문양은 완전히 도식화되어 박쥐 그림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된다.



9) 포류수금문(蒲柳水禽紋)
표류수금문은 물가에 버드나무와 갈대가 우거지고 그 아래로 물새가 노니는 한적한 정취를 표현한 문양이다. 국보 92호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 蒲柳水禽文淨甁)등 고려시대 유물에서 자주 나타나는 문양으로서 한 없는 여유와 고즈넉함을 느끼게 한다.



10) 접봉문(蝶蜂紋), 화접문(花蝶紋)
화접문 혹은 호접문(胡蝶紋)은 주로 조선시대에 서민층에서 사용한 문양으로서 나비와 꽃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도 하고 남녀간의 금슬(琴瑟)을 표현하기도 한다. 가구의 장식이나 노리개에 많이 이용되었다.



11) 귀면문(鬼面紋)
귀면문은 도깨비, 혹은 치우(蚩尤)의 형상을 문양화한 것이다. 벽사(僻邪)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건축물의 기와나 귀면 주두(柱枓)등에 많이 그려졌으며 인검(寅劍)의 코등이에도 흔히 나타난다.



12) 죽문(竹紋), 죽엽문(竹葉紋)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서, 곧고 빈속을 가진 줄기는 마음을 비운 선비와 같고 늘 푸른잎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림으로도 흔히 그려졌다.



13)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인동(忍冬)은 근동지방 기원의 팔멧트(Palmette)무늬에서 변화한 것으로 추운 겨울을 참고 견딘다고 하여 인동(忍冬)이라 하며, 당초(唐草)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초화문이 근동지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 왔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 퍼진 것이다. 덩굴식물로서 끊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계속 이어 때문에 장수한다는 길상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주로 불교적인 장식문양으로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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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도의 전통적인 제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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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강의 제조


일본도는 일반적인 철광석 정련에 의해서 얻어지는 강철이 아니라 사철을 원료로 해서 얻은 타마하가네(玉鋼)를 원재료로 사용한다. 사철은 저온에서의 제철로도 순도가 상당히 높은 강철을 직접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수율이 매우 나쁘다. 일본은 사철의 산출이 많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남방계의 사철 제련방식이 고대로 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에 사철을 널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철 정련으로는 약 4톤의 사철과 5톤의 숯에서 약 1톤의 타마하가네(玉鋼)를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철광석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철은 원재료의 확보가 용이하고 높은 수율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사철보다 순도는 약간 떨어진다. 이 때 칼 제조에 사용되는 사철은 이물질이 적은, 산에서 나는 사철만을 쓴다.






<일본의 전통 손풀무 제철>




일본 대장간은 무라게(村下)라고 불리는 대장(大匠)이 10여명의 도제들과 함께 작업을 한다.

일본의 용광로는 손풀무를 이용하는 진흙 용광로인 타타라인데 이 용광로에 사철과 숯가루를 섞어 넣고 사흘 정도 불을 땐다(불은 "첫째 날은 아침의 색. 이틀째는 한낮 태양의 색. 셋째 날은 석양 노을 빛의 색"으로 조절한다고 한다.) 사철은 저온에서 반융용 상태로 환원 반응이 일어나고 그 결과 사철이 엉겨 붙은 모습의 철괴(두께 30 센치 정도, 약2 톤)가 나오는데 이 철괴에서 양질의 타마하가네(玉鋼)를 골라낸다.






<철괴>
<옥강-특히 품질이 좋은 부분>




타마하가네는 이미 탄소가 적절히 함유된 강철이므로 탄소의 투입, 혹은 제거 과정이 필요 없다. 하지만 타마하가네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제련되었기 때문에 탄소의 양도 일정하지 않고 철의 성질을 무르게하는 불순물인 규소, 망간, 인, 황등이 섞여 있다. 이러한 과다한 탄소와 불순물은 산화와 단조, 접쇠과정을 통해서 제거 해야한다. 이 타마하가네는 탄소가 많은 부분이므로 강도가 높고 따라서 칼의 외부를 감쌀 가와가네(皮鐵)에 사용한다. 한편 철괴에서 쉽게 부서지지 않는 부분은 연철에 가까운 성분이므로 이를 고철등과 섞어 칼 내부에 사용할 신가네(芯鐵) 제조에 사용한다.



2) 칼의 단조
타마하가네(玉鋼)는 우선 망치로 두드려 철편 조각으로 만든뒤 이를 다시 부순다. 이렇게 철을 부수고 다시 단접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일본의 사철제련으로 생산되는 철의 성분이 균질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수고 섞고 다시 접어 두드리면서 일본 손풀무 제철의 품질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부숴진 조각들을 모아 타마하가네(玉鋼)로 만든 얇은 철판 위에 놓고 함꼐 두드려 단조를 시작하는데 칼의 내부에 사용될 연한 철인 신가네는 약 0.1 ~ 0.4%의 탄소량을 갖게되며 일반적으로 약 10회 정도 접어서 약 1,000개의 얇은 층을 갖게 된다. 칼의 외부에 사용될 고탄소강인 가와가네는 탄소량이 약 0.7%이다. 가와가네는 약 12회에서 16회 정도 접어서 4,000 ~ 65,000개의 층을 갖게 한다.



강철을 접는 것은 강철의 균일성(uniformity)과 미세한 탄소 함유량을 조절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한번 접을때 마다 산화에 의해 0.03% 탄소 손실이 발생하므로 그냥 두면 철은 연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장인은 탄소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 재가열하기 전에는 항상 묽은 황토물을 뿌리고 가열된 철은 볏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 반복적으로 담근다.








<일본도의 접쇠 과정>






가와가네(皮鐵)와 신가네(芯鐵), 하가네(刃鉄)를 이용한 가장 간단한 칼 제작방법은 한 조각의 가와가네를 접어서 U자로 만들고 그 안에 신가네를 넣고 단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표면의 가와가네는 예리하고 단단한 칼날이 되며 날 안쪽의 신가네는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여 칼이 부러지지 않도록 해주고 최악의 경우에도 칼이 깨지는 대신 휘어지게 해준다. 보다 복잡한 제작방법은 5조각의 강철로 칼을 만드는 것이다. 이 때 5조각의 강철은 모두 다른 강도로 벼려진다.
대장장이는 신가네와 가와가네를 단접하면서 점점 길이를 늘려서 칼의 기본형태를 만든다. 대장장이가 칼의 기본적인 형태(수노베)를 만든 후에는 그 쇠막대로부터 칼의 형태를 끌어내기 위한 단조작업을 해야 한다. 단조가 끝나면 칼날은 알맞은 길이와 휘어짐등 기본적인 칼의 모양을 갖추게 되지만 아직은 일본도의 특성을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3) 담금질


칼의 형태가 완성되면 즈시도리(土取)를 한다. 이것은 칼날의 전면에 소인토(燒刃土, 야끼하즈찌)라고 하는 특수한 점토성 진흙을 바르는 과정이다. 칼등(히라지(平地))쪽을 두껍게 바르고 칼날(하카따(刃方)))쪽을 얇게 바른다. 이 진흙에는 숯, 숫돌가루와 나머지 몇가지 성분(주로 진흙의 점착성을 높이는 물질)이 들어간다. 진흙이 잘 마르면 담금질을 하는데, 칼을 숯불에 넣어 오스테나이트가 되도록 임계온도(약 800도) 이상으로 가열한 후 물에 넣어 급속히 냉각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오스테나이트 조직이 마텐사이트 조직이되는데 마텐사이트는 매우 경도가 높아 날카롭고 강한 칼날이 된다. 십수일에 걸친 대장장이의 노고가 열매를 맺을지 여부는 이 소입(燒入れ, 야끼이레)의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다. 즈시도리(土取)와 소입(燒入れ, 야끼이레)에 의해 칼날 부분은 한층 더 단단해지고 칼등 부분은 비교적 연하게 탄력성이 붙는다. 즉 끊어지지도 않고 구부러지지도 않는다는 조건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잘 베어진다는 조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또 이 때 하몽(刃文)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칼날 위에 생기는 물결모양 무늬로서 소입 과정에서 칼날과 칼등의 온도 차이가 있을때 생기는 선이다. 단, 하몽은 육안으로 쉽게 보기는 힘이들며 불빛에 비스듬히 비추어 보아야만 제대로 보인다. 사진에서 하몽을 보았다면 이는 칼을 가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하몽을 흉내내어 만든 무늬이다. 한편 일본도의 특징인 날의 휨도 이 소입과 관계되는데 칼날 부분이 오스테나이트에서 마텐사이트로 변하면서 팽창하는데 반하여 칼등은 트루스타이트와 마텐사이트가 혼재하므로 덜 팽창하여 결과적으로 칼날이 휘게 된다.(물론 칼날의 휨은 단조과정에서도 넣는다)





<하몽>, 사실은 칼을 갈아서 하몽 모양을 냈다




4) 연마

대장장이는 칼날을 연마하는 연사(硏師)에게 칼을 넘기기 전에 먼저 강철 칼로 날을 다듬고 다음으로는 굵은 연마석으로 형태를 잡는다. 이 칼을 넘겨 받은 연사는 굵은 연마석에서 차츰 세밀한 연마석으로 바꾸어가며 칼날을 다듬는다. 연사의 의무는 칼을 예리하게 갈아 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단순한 철조각으로 부터 칼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일본의 진검 연마는 약 10일이 걸리며 그 주요 공정은 다음과 같다.



가) 사용하는 숫돌



숫돌의 종류
용도

금강(金剛) #200


심한 녹을 제거하거나 크게 형태를 고치는데 사용

비수(備水) #400~#600


녹을 제거하고 형태를 갖춘다

개정명창(改正名倉) #800~#1000


비수의 숫돌눈을 제거하고 가는 녹을 제거한다

중명창(中名倉)


개정명창의 숫돌눈을 제거한다

세명창(細名倉)


중명창의 숫돌눈을 제거한다. 날의 속살을 드러낸다

내담인지(內曇刃砥)


날 부분을 갈고 담금질 무늬(刃紋)나 접쇠무늬(刃肌)를 드러낸다

내담지지(內曇地砥)


칼배(地)、호(鎬) 부분을 갈고 접쇠무늬(刃肌)를 모양을 드러낸다

인염(刃艶)
내담지를 얇게 떼어 화지(和紙)에 붙인 숫돌이다. 날의 하몽 무늬를 만든다.

지염(地艶)
나루타키도(鳴瀧)를 앏게 떼어 화지(和紙)에 붙이거나 그냥 부수어서 사용한다








나) 절차



1. 모양만들기 - 대

금강 또는 비수로 호,칼등,칼배,칼끝의 순서로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 녹이 있는 경우에는 녹을 다 제거하지 않고 큰 녹만을 제거한다. 칼과 숫돌이 거의 수평하게 유지하며 갈아야 한다.





2. 모양만들기 - 소

개정명창 숫돌로 금강이나 비수로 갈 때 생긴 숫돌눈을 지우면서 날 전체의 연마 얼룩을 없애나간다. 칼날의 끝부분만 남기고 간다. 녹은 이 단계에서 대부분 제거된다.





3. 바탕 준비

개정명창의 숫돌눈을 중명창 세명창의 순서로 지워 없앤다.





4. 바탕 마무리

내담인지로 먼저 날의 부분을 하얀 속살이 나올 때까지 간다.이 때 담금질무늬와 접쇠 무늬가 나오고 숨어있던 흠까지도 드러나며 처음으로 날을 직접 갈아 내어 날을 세우게 된다. 내담지지로는 칼배를 갈아 피부를 드러낸다.





5. 마무리

인염과 지염, 즉 내담지나 나루타키도(鳴瀧)를 얇고 작게 자른 것을 손가락 위에 얹고 칼날을 닦는다.





6. 화장

- 숫돌가루등 다양한 성분의 분말을 기름에 섞어 칼을 닦는다.

- 광을 내는 쇠조각으로 날을 갈아 광을 낸다.

- 담금질 무늬(하몽)를 낸다. 하몽은 원래 아주 희미하므로 잘 안보이며 숫돌로 갈아서 담금질 무늬를 흉내내는 것이다.

- 칼 끝을 완성한다.








<일본의 연사(硏師)>
<일본도 연마에 사용되는 숫돌들>




5) 목공
목공은 칼에 맞는 칼집을 깎아 만든다. 목공은 칼집에 넣을 칼을 본으로 하여 그 칼에 맞는 칼집을 깎게 된다. 칼집은 두조각의 나무를 각각 파내서 만들며 안쪽을 다 판 후에는 두개의 조각을 찹쌀풀로 붙여서 완성한다. 표면은 곱게 갈아낸 후 조각을 넣기도 하며 수차례의 옻칠로 마무리한다.



칼자루도 나무를 파서 만드는데 칼집과 마찬가지로 두조각의 나무를 각각 파서 슴베에 꼭 맞는 자루를 만들고 그 표면을 사어피로 감싼다. 그리고 사어피 위로 가죽 혹은 면끈을 감는데 요즘은 거의 면끈으로 감는다.





<사어피>




6) 장석
장석장(裝錫匠)은 동호인(habaki), 칼자루(tsuka), 코등이(tsuba), 그리고 손잡이의 장식(menuki)등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는 대개 종류별로 각각의 장인이 담당해서 만든다.





<일본도의 장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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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대의 칼 제조과정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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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국내 도검사들은 전통적인 도검 제조 방식을 승계 받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도검 제조 기술을 익히고 개발하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도검 제조 기술은 일본에 비하여 현저히 낮은 수준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통적인 도검 제조 기술이 전승되지 않는 우리 나라에서 도검 문화가 다시 꽃피우기 위해서는 이들의 시행착오야 말로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도검은 레이저 재단된 강철판으로 칼을 제작하는 탄소강검과 무쇠를 기계로 두들겨서 만드는 단조검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그 제작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칼날의 제작
탄소강검은 적당한 두께의 합금 공구강판을 레이저로 절단하여 칼날의 모양을 만들고 열처리를 한다. 레이저 절단은 칼의 기본 형태를 철판에서 떠내는 것인데 도검사에서는 레이저 절단 전문업체로 부터 재단된 날을 사온다. 열처리는 특수강의 경도가 지나치게 높아 날이 쉽게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뜨임 과정이며 전체를 통열처리하게 된다. 칼날은 그라인더로 갈아서 날을 세우게 된다. 단조검은 무쇠를 달구어 기계로 두드려 모양을 만든다.



2) 부분열처리
모든 특수강 진검이 부분열처리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베기용 검의 경우 일부는 부분 열처리를 한다고 선전된다. 부분열처리의 목적은 날 부분의 경도를 높여 절삭력과 내마모성을 높이고 칼등 부분의 경도를 낮추어 부러짐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부분열처리는 그 과정에서 날이 휘고 갈라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흔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재의 국내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그 효과도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3) 연마
보급형 특수강 칼은 그라인더로 날을 세우고 더이상의 연삭을 하지 않지만 고급형의 칼은 숫돌로 날을 더 예리하게 세우게 된다. 입도가 다른 여러개의 숫돌로 차례 차례 갈아내는 과정으로서 일반인이 흉내내기는 어렵다. 연마가 끝나면 날 부분에는 특수 열처리나 전기에칭으로 물결 무늬(하몬(刃文))를 만든다.



4) 장식
요즘 국내의 칼은 대부분 주문 제작되기 때문에 사용되는 장식을 구매자가 선택할 수 있다. 도검사는 주문 내용에 따라서 손잡이를 인조어피나 진품어피로 싸고 가죽끈이나 면끈으로 감으며 칼집은 향나무로 만들어 투명 락카를 칠하거나 일반 목재로 만들고 그 위에 검은 페인트를 몇겹 칠한다. 장석은 황동 주물로 만들어 그라인더로 마무리하고 무늬를 새긴다.

1. 환도의 재료에 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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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鐵)


1) 철의 채취


철은 자연상태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자철광(Fe2O3), 적철광(Fe2O3), 갈철광(Fe2O3 · xH2O)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중 자철광은 상대적으로 환원이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철광석이 많지만 주로 자철광이 많은 편이다. 자연상태의 철은 광맥을 따라 채굴되는 철광석(鐵鑛石)과 화성암이 오래 풍화되어 그 속에 있던 철 성분이 바다나 강가에 퇴적된 사철(砂鐵), 그리고 수분이 많은 곳에 형성되는 토철(土鐵)등이 있다. 한반도 선사시대의 유적에서는 아직 사철을 이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따르면 세종 당시 우리나라의 철의 산지는 34개소인데 이 가운데 사철 광산이 21개소이므로 조선시대에는 사철을 이용한 제철이 널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통 장도(粧刀) 제작은 좋은 쇠를 얻기 위하여 사철이 풍부한 지역에서 성행되었음을 볼 때 환도의 경우도 주로 순도가 높은 사철에서 철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철은 대개 산에서 캐내어 물로 일어 비중이 큰 사철만 남게 하는 수도법(水淘法)을 써서 선별하며 철광석은 노천굴에서 캐내며 맥석(脈石)의 비중이 큰 경우에는 광석을 가루를 내고 체로 치는 화도법(火淘法)을 이용하기도 한다.



2) 철의 종류


조선시대에 철의 종류를 일컫는 단어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철의 종류는 다음의 네가지 이다.



가. 무쇠



무쇠란 물쇠, 즉 쇠를 물처럼 녹여내는 선철(銑鐵)을 의미하며 생철(生鐵), 수철(水鐵)이라고도 부른다. 무쇠는 무질부리가마[鑄物爐]에서 1,400도 이상으로 10시간 이상 철광석을 가열하여 얻는데 여기서 얻어진 무쇠는 탄소량 2% 이상인 주철(鑄鐵)이므로 단조 가공은 불가능하며 주물작업을 통해 가마솥이나 농기구를 만든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는 무쇠를 생산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鍊生鐵爐法就風廂左邊橫穿一行風穴 而爐制如熟鐵爐法煉之

不以其法則不成 故煉吹比熟鐵最難云



“생철을 내는 노는 풀무 왼편에 가로로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으며 노를 만드는 방법은 숙철을 부리는 방법과 같다. 부릴 때 옳지 않으면 안 되므로, 풀무질을 하면서 부리는 방법이 숙철과 비교하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무쇠를 내려면 1,400도 이상의 온도를 오랜 시간 유지해야 하므로 기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웠으며 서양에서는 14 세기에 들어서야 무쇠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년경 철기를 사용함과 거의 동시에 무쇠를 생산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주철(鑄鐵)제 도끼가 철기시대 초기부터 나타난다.



나. 시우쇠 : 숙철(熟鐵)



시우쇠는 한자어이며 익을 숙(熟)자가 중국에서 '황(衁)' 입성음(入聲音)이 탈락된 뒤에 들어온 말이다. 철광석을 쇠부리가마[製鍊爐]에서 1,200도 이상 1,300도 이하로 장시간 가열하면 묵철덩어리, 혹은 잡쇠덩이가 바닥에 생기는데 이 잡쇠덩이를 다시 강엿쇠둑[精鍊爐]과 판장쇠둑[鍛造爐]에서 분쇄 가열하여 만든 저탄소강이 곧 시우쇠이다. 우리 대장간에서 단조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철 연장은 시우쇠로 만든다. 이 시우쇠는 연철(軟鐵)인 해면철(海綿鐵)과는 다르며 쇠똥의 형성과정에서 자연 침탄(浸炭)이 일어나고 다시 강엿쇠둑에서 가루상태로 침탄(浸炭)이 일어나므로 탄소량이 해면철(海綿鐵)에 비해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다. 참쇠 : 정철(精鐵)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철을 연성(鍊成: 담금질)하여 된 것으로 정철(精鐵)이 있다. 백번 연성하여 강철이 나온 것은 서남해 산중에 있는데, 상태가 자석영(紫石英)과 같다. 무릇 도(刀), 검(劍), 도끼(斧),끌 등 여러 도구의 날들은 이 강철이다.”라고 하였다. 정철은 시우쇠를 수차례 단조 가공하여 탄소량(炭素量)을 증가시키고 성질을 개선한 강철이다. 시우쇠의 초출품(初出品)을 신철(薪鐵)이라고 하는데 이 신철 1근을 타련(打鍊)하면 정철의 열품(劣品) 4냥이 생산된다고 한다. 이때 제거되는 나머지 6냥은 맥석(脈石)혹은 맥석이 산화철(酸化鐵)과 결합한 파얄라이트(fayalite)가 대부분이다



라. 뽕쇠



장도장의 증언에 의하면 장도날의 재료는 철의 원료를 제련할 때 화덕 밑에 응고되고 남은 뽕쇠로 만들며 뽕쇠만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서 부러지기 쉬우므로 시우쇠에 강도 높은 뽕쇠를 물려 넣어서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성질의 칼날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 뽕쇠가 과연 어떤 쇠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바가 없다. 그러나 뽕쇠가 가마 안에 얻어진 고탄소강(高炭素鋼)이라면 이는 잡쇠덩이중 탄소 함유량이 높은 철을 선별해낸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소위 ‘강쇠’나 ‘깡쇠’라고 부르는 전통 공구강과 같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잡쇠덩이는 탄소량이 고르지 않아 그중에는 고탄소강과 저탄소강이 혼재되어 있다. 환도 제작시에는 날 부분에는 경도가 높은 고탄소강이 필요했으므로 일본도의 제조에 사용되는 옥강(玉鋼, 다마하가네)과 거의 같은 성분인 뽕쇠를 잡쇠덩이중에서 별도로 선별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좀 더 확실한 사실은 환도의 재질분석이 있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2. 구리 합금(合金)


1) 황동(黃銅), 놋쇠, 주물유기(鍮器), 퉁쇠, 두석(豆錫)


우리나라에서 황동 혹은 놋쇠라는 단어는 특정 성분의 구리 합금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노란 빛이 나는 모든 구리 합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노란색 콩과 같다고 하여 두석(豆錫)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아연(亞鉛) 합금의 퉁쇠와 주석(朱錫) 합금의 방짜 모두가 광의의 의미에서 황동에 포함된다. 그러나 협의의 개념으로 황동은 구리 60%, 아연 40%의 합금을 의미한다.



2) 청동(靑銅) 유동(鍮銅), 향동(響銅), 방짜유기(鍮器)


청동은 구리-주석계 합금의 총칭이다. 구리70%, 주석30% 혹은 구리 70%, 주석15%, 아연15%의 비율로 합금하여 사용한다. 주석이 소량 함유되면 붉은 구리색이 나다가 30% 가까이 주석이 들어가면 은백색으로 된다. 청동이 황동보다 기계적 성질과 가공성, 색상등이 좋지만 주석은 비싼 광물이므로 주석 대신 아연을 넣은 황동을 쓰는 것이다.



3) 백동(白銅), 백통


조선시대의 백동(cupro-nickel)은 황동과 마찬가지로 특정 성분의 합금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흰색의 구리 합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중국 송대의 과학서인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에는 ‘구리에다 비상(砒霜)을 넣어 제련하면 백동이 된다. 백동은 가공이 어렵고 품질이 좋아 호사스런 사람이 이를 사용한다’라고 하였고 류희(柳喜)의 『물명고』(物名考)에는 ‘백동은 적동(赤銅)과 은(銀)을 연(煉)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백동은 모두 구리, 니켈 합금이며 구리75% 니켈 25% 혹은 구리 58%, 아연 5%, 니켈 37%의 비율로 합금하여 만든 합금이며 주로 은을 대신하여 담배를 재는 대토리와 입에 무는 물초리에 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20년(1438년)에 경상도 채방 별감(採訪別監) 백환(白環)이 울산군(蔚山郡) 달천(達川)에서 백동(白銅)을 채굴하여 구리 1근에 백동(白銅) 8냥쭝을 섞어 쇠돈을 만든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리 니켈 합금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보이나 백동이 민간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에 의하면 초기 담뱃대는 동(銅)제품이었는데 「점점 사치를 다투는 자들이 백동(白銅)과 오동(烏銅)을 써서 만들고 금ㆍ은을 새겨 넣어 치장하니 담뱃대 한 개에 2∼3백 전까지 한다. 참으로 막중한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백동은 장인들에 의해 백통이라고 불리웠으며 상온 단조에 의해 가공되어 장석으로 사용된다.


4) 오동(烏銅), 적동(赤銅)


오동은 검붉은 빛의 구리 합금을 총칭하는 말이다. 고려시대에는 구리-주석 합금(Cu90% - 10% Sn)을 650∼750℃로 가열하여 겉면에 산화제1구리(Cu2O)을 형성시켜 불그레한 검은빛이 나도록 하였으며 향로등의 기물을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오동은 중국에서 유래된 구리, 금 합금으로서 일본에서는 샤꾸도(赤銅)라고 한다. 1834년에 간행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구리 1냥에 금 1푼을 넣어 녹여서 오동을 만든다. 진오동(眞烏銅)은 적동(赤銅) 1냥에 엽자금(葉子金) 5푼 또는 6푼을 넣으면 상품(上品)이 되고, 3푼을 넣은 것은 하품(下品)으로 친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오동은 금이 3% ~ 5% 함유된 구리-금 합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은(銀)을 첨가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金) 대신 은(銀)만을 주로 첨가한 오동은 가오동(假烏銅)이라고 부른다.



구리와 금을 합금하면 붉은 빛의 적동(赤銅)이 되는데 이 적동을 며칠(어떤 기록은 한달) 정도 삭힌 남자 아이의 오줌을 적신 창호지로 감싸 따뜻한 아랫목에 몇 시간을 두면 검은 빛을 띄게 된다. 오동은 주로 담뱃대의 대토리 부분에 쓰였으며 은입사에 의해 화려함을 더했다.





3. 금(金), 은(銀)


금속공예품의 재료로는 오금(五金)이라 하여 금(金), 은(銀), 동(銅), 석(石), 철(鐵)을 꼽는데 이중에도 금(金)과 은(銀)은 희귀 광물로서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초기부터 금을 생산하여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고조선 시기의 팽이그릇과 함께 금제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금 세공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삼국 모두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하고 다양한 금 세공품을 남겼다. 도검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에는 금실과 금판으로 환두대도를 화려하게 꾸민 예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민간인의 금, 은 사용은 철저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도검류 중에서 금으로 장식된 도검류는 매우 드물다. 조선 태조 3년 6월의 기사에서 조정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은의 사용도 일정 용도에 국한해서 허용하였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한 환도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환도의 제작에 금이나 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임진변란 후에 방금(防禁)이 해이해져서 시정(市井)에서 은을 화폐로 삼았으므로 그 이후부터 은의 사용은 흔해졌다 한다.

현존하는 환도중 금으로 장식한 예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은장식이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전통 환도에 관한 설명중 백은(白銀) 운운한 것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백통 장식을 말한다.





4. 목재(木材)


우리나라에서 목공예에 이용된 목재로는 무겁고 튼튼한 목재인 단풍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밤나무와 가볍고 덜 견고한 목재인 오동나무, 피나무, 버드나무등이 있다. 이 밖에도 고급 목재로서 흑단(黑檀)나무, 먹감나무[黑柴], 향나무, 침향목(沈香木)등이 사용된다. 이중에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데 사용된 목재는 주로 강도가 높은 벚나무 등이지만 일본도의 영향으로 오동나무등 가벼운 목재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5. 사어피(沙魚皮)


칼자루나 칼집을 싸는 사어피는 상어의 가죽이다. 본초강목에서는 교어피(鮫魚皮)가 곧 사어피이며 가죽의 겉으로는 진주 같은 반점이 있으며 잔등가죽에는 거친 비늘이 어기 어기 서려 있는데 이것으로 나무를 문지르면 닳는 것이 속새와 비슷하다. 말안장, 칼집, 칼자루를 장식하는 데 쓴다”고 적혀 있다.






<사어피(沙魚皮)>
<매화교(梅花鮫)-일본>




원래 상어는 한자로 사어(攄魚)라고 하는데 魚'의 古音이 옛 이응‘어’였기 때문에 '상어'로 발음하는 것이다. 상어의 껍질이 모래와 같이 거칠다 하여 상어를 사어(沙魚), 사어(娑魚)라고도 한다. 가오리 중에도 우리나라의 저자가오리(Breviraja isotrachys) 동남아 등지에서 잡히는 노랑가오리(Stingray)등은 상어 가죽과 마찬가지로 등쪽에는 작은 좁쌀 모양의 가시가 많아 상어 가죽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가오리 가죽은 다른 가죽과 달리 칼로 찢어도 찢겨지지 않고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특징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사어의 종류가 하교(河鮫), 매화교(梅花鮫), 호표국악교(虎豹菊萼鮫)가 있다고 하였는데 하교는 민물 가오리로 추정되며 매화피는 꽃잎 모양의 돌기가 아름다워 현재까지도 고급품으로 치는 가오리 가죽이다.





6. 기타 재료


1) 대모(玳瑁)


대모는 바다거북이, 특히 대모거북이(Eretmochelys imbricata)의 등껍질이다. 이 거북이의 등딱지는 담흑색의 심장 모양이고 황색이나 황갈색 바탕에 진한 흑색의 구름 무늬가 있다.



2) 옥(玉)


옥은 경옥(硬玉, jadeit)과 연옥(軟玉, jada)으로 나뉘는데 연옥은 각섬석(角閃石)의 일종이며, 경옥은 알칼리 휘석(輝石)의 일종이다. 옥은 한자로 비취(翡翠)라고 쓰며 특히 적색과 녹색 옥을 비취라고 한다. 경옥은 경도가 7.5도이고 연옥은 경도가 6∼6.5이며 단단한 대신 깨지기 쉬운 성질이 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옥을 귀하게 여겼는데 특히 우리 민족은 옥을 귀하게 여겨 마한(馬韓)에서는 “금은이나 비단, 담요 같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조에는 연산군이 보검을 만들도록 명하면서 칼자루를 옥으로 꾸미도록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옥으로 만든 칼자루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대신에 코등이를 옥으로 만든 예가 몇 점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잡방(雜方)에는 “두꺼비기름[蟾蜍肪]을 옥(玉)에 바르면 옥을 조각하기가 납(蠟)을 새기듯이 쉽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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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환도의 전통적인 제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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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칼은 중앙의 군기감에서 일부를 제작하였지만 대부분은 지방에서 제작되어 공납되었다. 세종조 병진년에 병조에서 군기감(軍器監)의 장인을 늘리는 일에 대해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환도장(環刀匠)은 6명이지만 환도장과는 별도로 마조장(磨造匠), 주성장(鑄成匠), 소목장(小木匠), 노야장(爐冶匠), 동장(銅匠)이 있으므로 실제 환도 제작에 참여하는 군기감 인원은 활씬 많았을 것이다. 세조대의 기록으로는 환도장(環刀匠)이 33인을 정액으로 하여 3번(番)으로 나누어 매(每) 1번(番)에 11인씩 일했다. 조선왕조실록의 환도 공납 기록을 보면 특정 지역에서만 칼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방에서 환도를 제작하여 조정에 진상을 하였으며 따라서 일반 보병이 사용한 환도는 소규모 대장간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방 대장장이의 기술은 그리 높지 못하였던 듯하며 당시 문헌에는 칼 담금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열에 너댓 뿐이라고 했다.



조선후기 훈련도감 살수(殺手)의 병기와 군복을 조달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기록한 살수기계복색신조소입마련책(殺手器械服色新造所入磨鍊冊)을 보면 환도 제작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항목
가격
비고

인가(刃價)
1냥8전
칼날 가격

연마공전(鍊磨工錢)
3전
칼날을 숫돌로 가는 비용

마광공전(磨光工錢)
3전
칼날에 광을 내는 비용

양마철가(兩馬鐵價)
3전
코등이 제조 비용

목병가(木柄價)
5분
칼자루(목제부분) 가격, 칼집?

칠가급공전(柒價及工錢)
1전
옻칠 비용

병감기가(柄甘其價)
1전5분
칼자루를 끈으로 감는 비용

두석장식가(豆錫粧飾價)
8전
장식 쇠붙이 제작 가격

환도1병(環刀 一柄)
3냥8전
환도 조달 가격 총계




위의 비목 구분은 환도 제조 공정의 분업 형태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즉, 대장장이, 연사(숫돌질), 마광(쇠로 문질러 광을 낸다), 목공(칼자루와 칼집 제조), 칠쟁이(옻칠), 두석장(쇠붙이 장식 제작)등이 도검 제조에 참여하여 분업적으로 작업하였던 것이다.


1. 강철의 생산


아직 환도 칼날의 시료 분석이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므로 환도 제작에 사용된 철이 어떤 종류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미 언급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지금 향병(鄕兵)들이 휴대하고 있는 검(劍)은 다 호미[鉏] 따위를 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베어도 절단되지 않고 목봉과 부딪쳐도 그만 부러지니 그 용도가 목봉만도 못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향병의 환도는 형편없었음이 분명하지만 반대로 중앙군이 사용한 환도는 시우쇠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있다. 장도(粧刀)의 예로 볼 때 중앙군이 사용한 환도는 시우쇠를 정련한 참쇠[精鐵]로 만들거나 혹은 장도 제작과 마찬가지로 뽕쇠를 참쇠와 단접해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인 참쇠 생산은 쇠부리가마(제련로)공정 - 강엿쇠둑(정련로) 공정- 판장쇠둑(단조로)공정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쇠부리가마에서는 잡쇠덩이를 만들고 이 잡쇠덩이를 강엿쇠둑에서 태워 숯과 쇠똥을 제거하고 난 후 판장쇠둑에서 단련을 통해 맥석(脈石)등 이물질을 압출해내면 참쇠가 된다. 판장쇠둑 공정을 거치지 않거나 적당히 거친 쇠는 시우쇠에 불과한 것이며 판장쇠둑에서 오래 단련을 거듭하여야 정철(精鐵)이 된다.






<가마점> 기산 김준근
<대장장이> 기산 김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