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담은 풍경,
안골왜성과 굴강입니다.
안골왜성
안골왜성은 일본군들에 의해서 축성된 일본식 성으로 협판안치,가등가명,구귀가륭등이 구축 하여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왜수군의 본거지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는 해전 에서 우리수 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본국으로 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 자 우리수군을 해상에서 제어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 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지에 18개소의 성을 축성하였다. 동망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 으로 정상부를 삭평한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 을 나누어서 따로 석축하고 외곽으로 각부분을 연결 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토축성이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만을 끼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굴호를 조성하여 교 통호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둘레는 594M, 높이는 4~7M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이다. 비록 일본군에 의해서 축성되기는 하였지만 성을축성하는 노역을 담당 했던 우리네 선조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을 무심히 간과할수 없을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관 련된 한일관계사의 물적증거는 물론 일본과의 축성기술을 비교연구 할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골왜성은 안골동에 있는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져 있는 데,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습니다.
아래로 금수현음악촌이 있고, 포구쪽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소인 굴강이 있는데, 굴강은 현재 발굴중입니다.
☆.. 참고 : 금수현의 '안골 음악촌' 복원 소문의 진실
▲ 포구에서 바라 본 안골왜성 - 한양부동산 왼편으로 작은성과 큰성이 있습니다. 한양부동산 윗쪽은 '진성'입니다.
▲ 마을에서 5분여 걸으면 안골왜성 표지가 나오며, 오른편 길을 따라 걸으면 금수현음악촌이 있습니다.
▲ 작은성의 성벽 - 진해시에서 관리를 한다지만, 세월이 있으니 많이 훼손되었으며, 주변으로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 큰성의 안골왜성 표지 - 자칫 큰성은 스치기가 쉽습니다. 작은성과 큰성 사이는 몇 천평의 빈 터가 있기에 작은성만 만나지 말고 큰성을 찾으면, 용원 앞바다와 가덕도가 보이며, 신항공사 현장이 보입니다.
큰성을 찾는 이 누구라고 그럴겁니다. 이 아까운 터 -
진해시 문화관광과에 문의를 하니 개인소유가 많아 매입에 어려움이 많아 주변 정리만 하는 형편이라고 하더군요.
▲ 성에서 시루봉이 보이며, 웅천도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웅천왜성에서 안골왜성이 보였다는 데, 지금은 많은 나무들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 작은성에는 개인의 묘지가 몇 기 있는데, 비석의 글은 읽지 못하였습니다.^^
▲ 작은성의 안골왜성 표지 - 큰성과 같은 내용입니다.
안골포 굴강
종 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143호
지 정 일 : 1994.07.04
소 재 지 : 경남 진해시 안골동 517-9,517-10
시 대 : 조선시대
굴강은 조선시대 배의 수리, 군사 물자의 하역, 특수 목적 선박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중요한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습니다.
조선 세조 8년(1462) 이 고장의 대외 방어 기지로서 안골포 수군만호진을 설치할 때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정박한 적이 있다고도 하며, 주위에는 안골포 진성지, 안골왜성이 있어 국방상 대단히 유서가 깊은 전적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 웅천과 웅동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해안이기에 임진왜란 당시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 가기도 하였습니다.
☆.. 참고 : 웅천요(熊川窯)의 봄2
▲ 현재 남아 있는 굴강
▲ 舊 안청초등학교 앞에서 담은 안골포구 풍경 - 큰건물 앞이 굴강입니다.
전어철입니다. 용원의 위판장과 횟집을 찾는다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역사의 현장인 안골왜성과 안골포 굴강을 둘러 보시기를 권합니다. 안골에도 횟집이 있으며, 거제행 여객선 선착장이 있기도 합니다.
가끔 거제를 갈 때, 이곳에서 배를 타고 카푸치노를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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