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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잔재 재활용의 역사 - 구룡포공원

_______! 2009. 7. 11. 17:27

 

일제 강점기 시대...

동해안 항구 구룡포에는 배를 댈만한 정박 시설이 거의 없었는데

운수업자였던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이 총독부를 움직여 항만을 건설하게 된다.

총독부의 지시 아래 항만과 도로가 완공되면서 국내는 물론 일본의 어선들까지 모여들게 되고

이로 인해 구룡포항은 갑자기 동해안 최대의 항구가 된다.

 

갑작스런 대형 항구로의 변신으로 수백�의 선박이 정박하게 된

구룡포의 거리와 골목은 12월이 되면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들 어선은 처음엔 거문도나 흑산도에서 고등어잡이를 시작으로

마지막 10월에서 12월이 가까와질 때에 구룡포 앞 바다로 옮겨 왔고

그래서 구룡포에서 한 해의 어업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구룡포엔 요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1942년 인천과 꼭 같은 시기에 읍으로 승격된 구룡포이니

그 당시의 구룡포의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구룡포공원이 있는 지금의 용주리는 구룡포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였다.

우체국, 지서, 관공서 등 모든 공공 건물들이 있던 구룡포의 중심지 동네로

삼각형 집이 많아 삼각구 마치라 불리기도 했고 싸움이 잦아 텍사스 골목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는데

공원 계단을 중심으로 아래쪽으로는 술집이 즐비했고 위쪽으로는 매춘을 하는 홍등가도 십여개소 있었다고..... 

 


 

일제 시대 신사가 있던 자리에 신사를 무너뜨리고 용왕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

일제 강점기 시대에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 바로 구룡포 공원이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오르는 계단의 양편에 세워진 100 여개의 돌기둥에

'도가와 야사부로'와 같이 구룡포를 개척한 일본인들의 이름을 새겨서 그들의 공덕을 남겼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구룡포 주민들은 이 돌기둥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쓰여진 돌기둥의 이름을 시멘트로 발라 땜질을 하고 뒤로 돌려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 돌기둥에 신사를 무너뜨리고 충혼각을 짓는데 일조한 구룡포 주민들의 이름들 다시 새겼다.

 

 

 

일선 약방 이종일, 세영 약방 김상근, 구룡포 극장 황인범.....

 

 

단기 4293년 (1960년)에 건립했다는 비문이 계단 중간 참에 서 있다.

 

 

반대편 비문에는 주최 구룡포읍 유족회. 후원 구룡포읍 유지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니 김말룡....김무진...구룡포 농업은행....이분들이 그 당시 구룡포의 유지인 것이다.

 

 

구룡포 중고등학교는 학생 단체로 기부금을 낸 듯 하다.

 

 

맨 위 구룡포 공원 입구 문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계단 바로 옆에 사는 할머니는 "지금 와서 문화재로 지정해 봤자 뭐 하노...

이제 더 볼 것도 없는데...여기 머 볼꺼 있다고 와싼노..."하고 불평하신다.

 

 

할머니에게 이 계단의 돌기둥은 그저 빨랫줄을 매기 위한 버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 돌기둥에 새겨진 글씨들은 할머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경사진 빨랫줄에서 빨래가 안 미끌어 떨어지고 잘 마를 수 있도록

집게로 잘 고정해 두는 것만이 관심사이다.

 

 

 

계단을 올라가 신사가 위치하고 있던 구룡포 공원 입구로 들어 선다.

구룡포 신사의 위치는 전망이 탁 트여 항포구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과거의 부귀와 굴욕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충혼각 건물이 있는 공원 마당에 세워진 충혼탑.

지난 2006년 구룡포 주민들이 모여 기단부 명문 일부를 덮은 시멘트를 벗겨 내니

친일 단체인 '제국 재향군인회'라는 명문이 있었단다.

 

원래의 비석은 일제시대에 강제 징용돼

일본을 위해 전사한 사람의 혼을 위로하는 일제시대의 잔재였는데

6.25 전쟁이 끝난 뒤에 충혼각을 지어 전사한 구룡포민의 호국영령을 모실 때에

마침 충혼각 앞에 자리하고 있던 일제의 '제국 재향군인회 비'에

시멘트를 덮고 '대한 군인 유족회'라는 이름을 새긴 뒤

그 위에 한국 전쟁 참전 영령들의 혼을 기리는 오석의 비석을 올려놨다고....

 

일본을 위해 전사한 넋을 기리는 비석의 글자를 지우고

6.25 참전으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혼을 달래는 비석을 세웠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돌기둥에 이은 두번 째의 '일본 잔재 재활용'의 본보기이다. 

  

 

 

또 신사 앞에 있었던 사자상이 지금은 충혼각 입구 계단 앞에서 호국영령들을 지킨다고 떡하니 서있다.

 

 

구룡포 공원의 땜빵과 범벅 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곳에는 충혼각에는 국내 전몰 군경의 위패와 함께

징용인,6,25 참전 용사,4.19 때 숨진 사람의 위패까지 섞여있다.

 

 

 

제일 황당한 것은 앞 뒤로 시멘트가 발려진 엄청난 크기의 비석이었다. 

 

 

 

공원 대문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비석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느 대학교에서 나왔는교...."하시는 이 분들은 나와 일행이 역사학자인줄 착각하셨나보다.

두 분은 구룡포 공원의 역사와 비석의 역사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구룡포 바다를 굽어 보는 양지바른 위치에 규화목으로 만든 비취색의 이 비(碑)는

받침돌을 제외하고도 대략 높이 7m 이상에 폭 1.5m 이상 되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이 비에는 '十河 彌三郞 頌德碑(십하 미삼랑 송덕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즉 구룡포 개발을 위해 힘 쓴 일본인 '十河 彌三郞’(도가와 야사부로)'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갑자기 구룡포를 떠나자

도가와의 공덕비 비명에 시멘트를 발라 이름이 보이지 않게 덧씌워 버렸다.

 

돌기둥, 충혼탑에 이어 송덕비마져도 .....다 땜빵한 것이었다.

이 땜빵 문화는 구룡포공원 구석 구석에 산재돼 있는

우리 나라 어디서도 보기 힘든 구룡포만의 특이한 역사들이다.

 

 

신사 앞에 서 있던 콘크리크 기둥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지금은 바닥에서 일부분만 드러나 있었는데

이 것은  일본 신사 앞에 서 있던 도리이(鳥居,솟대 같은 것)의 흔적이라고 庭光散人글돋先生님이 조언해주셨다.

 

 

시멘트를 발라 덧씌운다고....역사책을 왜곡한다고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흔적이란 그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든....부끄러운 것이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앞으로의 쓰여질 우리의 역사가 아름답고 바르게 쓰여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부끄러운 역사를 덮어서 감추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출처 : 루비의 정원
글쓴이 : 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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