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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넉달간 서울∼부산 6배거리 이동…‘서수일기’ 분석

_______! 2010. 11. 13. 18:23

암행어사, 넉달간 서울∼부산 6배거리 이동…‘서수일기’ 분석

 

 

[동아일보]

엄격한 상하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파격적인 ‘액션과 로망’의 주인공이었던 암행어사에겐 어떤 고락이 숨어 있었을까.

오수창 한림대 교수가 ‘역사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암행어사의 길-1822년 평남 암행어사 박내겸(朴來謙)의 성실과 혼돈’에서 그 속내를 엿볼 수 있다. 1822년(순조 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4개월간 활약한 박내겸이 자신의 임무 수행을 일기로 남긴 ‘서수일기(西繡日記)’를 분석한 글이다. 오 교수는 이 글에서 박내겸의 구체적 행적과 함께 암행어사와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암행어사에 대한 궁금증과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박내겸의 경우, 암행어사를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신분의 비밀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암행어사로 임명되는 즉시 비밀리에 목적지를 향해 떠나야 하지만 박내겸은 본가로 가서 부모에게 하직하고 닷새 후에 떠난다. 19세기 정승을 지냈던 정원용의 기록에 따르면, 어사로 임명된 사람들이 출발할 때 친구들과 송별잔치까지 벌이는 바람에 막상 활동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분이 노출된 경우가 허다했다고 지적했다.

박내겸도 길을 떠난 지 3일 뒤 황해도 금천을 지나는데 벌써 암행어사 행차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어 함종이라는 고을에서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가짜 암행어사가 두 차례나 지나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또 어느 고을에서는 그의 행적을 보고 가짜 암행어사가 아닌지 수상하게 여긴 관헌의 단속을 받아 마패를 보여 줬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박내겸은 비교적 성실한 암행어사였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데 투철하지 못했다. 평양에 처음 잠입했을 때는 평안 관찰사를 잘 안다며 제 발로 찾아가 인사를 했는가 하면 성천에서는 친구인 성천부사 이기연과 기생 잔치를 벌이며 놀았다.

암행어사의 임무는 육체적으로도 고된 것이었다. 오 교수는 박내겸이 서울을 출발해 임무를 마치고 임금 앞에 나가 보고할 때까지 125일간 4915리(최대 2654km·1리를 0.54km로 계산)를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경부고속도로의 6배에 이르는 거리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하루 평균 40리(21km)를 이동한 셈인데, 많게는 하루 120리(최대 64.8km)를 이동했다고 한다. 또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관청에서 굶주린 자들에게 내리는 죽사발을 받아먹기도 하고 빗속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암행어사 출두가 이뤄지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쾌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출두”를 외칠 때 짜릿함이 있었다. 박내겸은 자신이 평양 대동문에 올라가 출두를 외칠 때 “성내가 온통 끓는 솥처럼 되어 사람과 말들이 놀라 피하는 것이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밀려드는 듯했다. 평안도에 나온 이후 으뜸가는 장관이었다”라고 묘사했다. 또 관기와의 동침 등 육체적 쾌락도 뒤따랐다. 종2품인 평안관찰사가 종5품에 불과한 박내겸이 출두한 뒤 세 차례나 직접 찾아와 만났는가 하면 대동강에 배까지 띄워 낮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유흥을 베풀었다.

암행어사의 길은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 임금의 신임이 그만큼 두텁다는 증좌이기 때문이다. 실제 43세에 홍문관 부교리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발탁된 박내겸은 이후 함경도 북평사를 지내고 청나라에 외교사절로 다녀왔으며 최종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흔히 암행어사의 권한으로 알려진 ‘봉고파직(封庫罷職)’ 중 어사의 실제 권한은 관청의 창고를 봉해 수령의 업무를 정지시키는 ‘봉고’에만 국한됐다. 지방관의 파직은 그것을 주청하는 일조차 어사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고 오 교수는 덧붙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