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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산 이야기

_______! 2011. 1. 9. 21:19

오늘은 광주의 사라진 명소 두번째..태봉산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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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봉산이 뭐예요?

 

태봉산은 전대 정문에서 모아맨션쪽으로 전대입구 사거리에서 얼마 안떨어진 곳에 있었던

높이 50m의 예쁜 산입니다. 경양방죽과 함께 광주의 명소라고 하는 이 태봉산은 지금부터 약 40여년 전 개운하게 깎아서 없애버렸습니다. 조선 임금의 아들의 태줄을 항아리에 담아서 묻었다고 해서 태봉산이라 합니다.

 

2. 태봉산은 어디에 있었어요?

 

 

3. 태봉산은 어떻게 생겼어요?

 

 

 

태봉산의 모습입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귀엽고 작은 산입니다.

앞의 수로는 농업용수로 쓸려고 파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 모아맨션 앞 대로가 이 곳이었다고 보입니다.

왼쪽 아래 조그만 사진은 태봉산을 허물때 출토된 태를 담은 항아리를 담은 태실입니다.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항아리라 볼 수 있지요. 이 태실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앞 뜰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서 봤는데 되게 큽니다.

 

4. 태봉산은 무슨 의미가 있는거죠?

 

조선 인조 2년(1624) 이 괄(李 适)의 난 때 임금과 왕비가 피난 중에 왕자를 얻었으나 어린 왕자는 잔병이 많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근심 끝에 왕비가 백일 불공을 드리자 꿈에 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은 땅 기운이 불순하여 태를 괴롭 있기 때문이니 광주 고을 복판에 있는 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에 태를 옮기고 금을 태와 함께 묻으라』하였습니다. 도사의 말대로 왕자의 태를 이곳에 이장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태봉(胎峰)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봉 자가 제가 아는 봉자는 봉할 봉(封)인데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후 1929년 7월 광주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촌로(村老)들은 태봉산에 남몰래 쓴 무덤 때문에 가뭄이 들었을 것이라는 미신에 현혹되어 산 꼭대기를 파헤쳤습니다. 이때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태실(胎室), 그리고 1돈 5푼의 금박(金箔)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태를 묻었다」는 뜻의 태봉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풍수지리상 광주의 지형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는 화룡승천(化龍昇天)의 형국인데, 태봉산은 바로 여의주에 해당되는 산이었다고 합니다.

 

북구 신안동에 있었던 태봉산은 높이 50m에 약 3,000평 정도의 둥글납작한 산이었는데 1967년 이 산을 깎아 경양호수를 매립하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광주시 빛고을 백년사 중에서 인용)

 

 

현재 신안동의 1955년도 사진입니다. 앞에 보이는 하얀색 건물이 살레시오 고등학교입니다. 저 자리에 지금의 모아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앞에 보이는 작은 산이 태봉산입니다.

 

5. 태봉산은 어쩌다 사라지게 되었나요? (박선홍의 광주1백년사 참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은 두 줄기의 산자락을 뻗어 광주시가를 감싸안고 있습니다. 한줄기는 원효사쪽에서 지산동 뒤쪽의 꾀재를 돌아 장원봉 ·중군봉으로 이어지는 줄기로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화룡승천(化龍昇天)' 형세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증심사에서 바람재를 거쳐 조선대학교 병원 뒤쪽을 거쳐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이어지는 줄기로서, 학이 둥지를 튼 형국이라 하여 '학강(鶴岡)'이라 불렀습니다. 학동(鶴洞)이란 동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 지산동의 경우도 옛이름이 단사동(丹蛇洞) 즉, 붉은뱀골이라 하였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물이 있어야 하고 또 승천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물은 경양호(景陽湖)이고 여의주는 태봉산(胎封山)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되어 승천을 꿈꾸는 무등산의 이무기는 '물'도 '여의주'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광주역이 대인동 옛 건물(현 동부소방서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 신안동 벌판에는 큰 무덤처럼 생긴 태봉산(해발 52.5m, 넓이 약 1정보)이 있었고 광주역 자리에도 낮은 구릉상의 야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7∼1969년  광주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태봉산과 야산은 깎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 때 광주의 명물이었던 계림동의 경양호도 매립되고 말았는데, 경양호 자리에는 광주시청이 들어서고 깎여나간 야산의 자리에는 광주역이 들어섰습니다.


태봉산을 깎아 경양호를 메우는 일은 광주시민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특히 광주의 어른들은 '화룡승천'이란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여의주인 태봉산이 있어야만 용이 하늘에 오를 수 있어 광주가 재난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만약 태봉산을 헐어 없애면 10여년내로 광주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것이다"는 극단적인 도참설까지 들고 나와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봉산과 경양호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피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여의주를 잃은 이무기의 저주라는 미신적 도참설을 들먹이기도 하였습니다.

 

태봉산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1624)으로 공주에 피신하고 있던 중 왕자를 낳아 그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928년 7월 태봉산에서 발견된 태실과 유물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사실들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태봉산에서 수습된 왕자의 태실관련 유물로는 화강암제 태실(胎室:직경 130㎝,높이 62㎝)· 백자태항아리· 금박(金箔: 길이 12.3㎝, 넓이 4㎝, 무게 1돈5푼)을 비롯하여 납석으로 된 명기석반(銘記石盤) 등이 있는데, 석반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624년 9월 3일 진시에 대군아지를 낳았고 그 태를 1625년 3월 25일 묻는다 (皇明天啓四年(1624) 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

 

1960년대 광주시가 금남로를 개발하면서 많은 비용이 필요했는데, 국가에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시는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법은 경양호를 메워 땅을 분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양호를 메우려다보니 많은 토사가 필요했는데, 경양호 바로 옆에 태봉산이 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태봉산을 헐어 경양호도 메우고, 골재를 판매하기도 하여 태봉산은 자신을 광주시에 아낌없이 주고 사라진  것입니다. 1967년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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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또래는 모두 기억하고 있는 추억의 산, 바로 태봉산입니다. 있었다면 아주 좋은 자연경관과 상징물로 자리잡았을 곳이 사라진 것에 대해 많이 안타까워하시더군요.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있는 태봉산에서 발굴한 태실입니다.-옆은 우리 딸들

 

 

앞으로 자연경관을 개발할때는 훗날의 자손들도 생각하면서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발이 꼭 필요해서 하긴 했겠지만, 많은 이들의 추억이 스며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자신의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 마냥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어릴 적 뛰놀던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워 하는 부모님을 봅니다.

흔적조차 없어진 그곳에 대해 더 이상 후대에 이야기를 전해줄 건덕지조차도 없애버리는 것은 가슴아픈 일입니다.

지금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으니 표지석을 세우려 해도 세울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버려서 아무도 못보는 빌딩 옥상위에나 세우면 모를까...

 

이상 찰리아저씨였습니다. (다음 번에는 무슨 이야기 해볼까요...광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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