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가 다 지나갔습니다.
명절이 좋은 점은 오랜만에 많은 가족, 친척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점이 제일 좋은 점이긴 하지만 약간의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점 또한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간 후의 조용한 시간이 되고 보니 지난 겨울 끝자락에서 조용하게 거닐던 고달사지에서의 여유로웠던 시간들이 간절하게 그리웠습니다. 사방 30십 리가 전부 절이었다던 대가람의 흔적은 간데없고 발굴로 파헤쳐져 마치 공사가 중단된 건설현장의 분위기를 보여주었던 고달사지. 하지만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보물들을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고달사지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습니다. 원주방면의 42번 국도를 따라가다 331번 지방도로로 들어서서 양평 쪽으로 11킬로 정도 가면 상교리 고달사지에 도착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커다란 신목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대가람의 위용에 걸맞은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보호수 왼쪽으로부터 고달사지인 넓은 평지가 야산까지 이어져있는데 고려시대에 사발 30리가 전부 절 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가람이었는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3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완만한 경사로 절터가 자리잡았으니 참 좋은 곳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원공사 전에는 논, 밭이었고 농가도 있었다고 한다. 고달사지는 올 해로 6차 발굴조사 중이었습니다. 보통 발굴조사는 최소한 2m 정도의 깊이로 땅을 파헤치는데 포크레인으로 그냥 파헤치는 게 아니라 삽 같은 소도구를 이용해 조심히 파 들어가야 하기에 매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발굴 조사하는 곳을 피해 올라가다 보니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보물 제 8호 석불대좌였습니다.
보물 제8호 고달사지 석불대좌.
옆에서 찍은 사진. 음.. 왜 가로로 찍은 사진은 없을꼬? 높이 1.57m. 방형 좌대가 이만하면 이 위에 있었을 부처는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당시 선문에서는 철 불이 유행하던 시기였으니 남아있었더라면 아주 크고 웅장한 철불일텐데. 조성연대는 알 수 없는데 각 단의 구성은 전부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고 각대받침, 안상, 앙련과 복련 등 조각수법이 시원스러우면서도 명쾌한 조각솜씨가 돋보입니다. 고달사는 신라 구산선문중 봉림산파의 선찰 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신라 경덕왕(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달사 뒷산의 이름을 따 ‘혜모산화상’ 이라 불리던 현욱선사가 이곳에서 29년 동안 선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9년(896)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화상이라는 시호를 직접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 창건설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현욱선사는 경남 창원 봉은선문을 개창한 진경대사에게 법통을 물려주었고 진경대사는 고려 태조 이후 광종대까지 왕실에 절대적 신임을 받은 원종대사 찬유에게 법통을 물려주었습니다. 석불대좌에서 20m쯤 위에 보물 제6호, 현존하는 우리나라 귀부와 이수중 가장 규모가 큰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습니다. 거북모양의 비의 받침을 귀부라 하고 이무기의 모습을 새긴 지붕을 이수라 하는데 원종대사의 귀부와 이수는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을 할 만큼 정교하면서도 역동적인 힘이 넘치는 걸작입니다.
보물 제6호 고달사지 귀부와 이수. 비신(혜진탑비)은 8조각으로 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신라부도 비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정교하면서도 웅장한 부도와 이수.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으며 양끝에 물갈퀴 모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발로 땅을 꽉 누르고 있는 모습이나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 라고 새겨진 전액, 전액을 둘러싼 도깨비모양등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우측에서 본 <귀부와 이수>. 이수 양 옆에는 두 마리의 반룡이 서로 뒤엉켜있다.
뒤에서 본 <귀부와 이수>. 강철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귀갑. 만약 강철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 뒤에 조그마한 부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고 비신도 이수도 사라졌으며 귀부의 머리도 깨어져 있다. 보통 부도와 부도 비는 매우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데 원종대사 부도비가 이곳에 있는데 부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부도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제법 떨어진 능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7호 고달사지 원종대사부도 팔각원당 형의 기본형식인데 조금씩 팔각범주를 벋어나려는 시대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대석 몸 돌에 새겨진 용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섬세하고 웅장한 역동성을 보여준다.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럴까? 왜 부도만 찍으면 기울어져 보이게 찍을까? ㅠ ㅠ
몸 돌에 사천상이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고 지붕돌 아래에도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곳이 천상의 세계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천왕은 법장을 지키는 신. 원종대사는 도대체 어던 인물이길래 이렇게 아름다운 부도와 부도비를 남겨두었을까요? 원종대사에 대한 설명을 중앙박물관에서 요양중인 부도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종대사 찬유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13세 출가, 고려 광종 9년(958)에 세수 90으로 입적한 당대 고승이다.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배웠으며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적주산 자선화상에게 배우고 경명왕 5년(921)에 귀국하여 봉림사에 머물며 원감국사 현욱에 이어 진경대사 심회에게서 법맥을 잇는다.
국사에 오른 원종대사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이곳 고달사지를 전국 제일의 선찰로 가꾸고 이곳 혜목산에서 말년을 보낸다. ‘원종대사 혜진’ 이라는 시호는 광종이 대사의 입적을 애도하여 내린 추시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7 경기남부와 남한강 편 에서 원종대사 부도에서 조금 위로 가면 약간의 계단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올라서면 고달사지 유적 중 단연 압권인 국보 제4호 도달사지 부도가 당당히 서 있습니다.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 우리나라 부도 중 가장 큰 규모의 고달사지 부도(국보 4호). 높이 3.4m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굽어보면서도 절대 위압적이지 않은 고달사지 부도. 몇년전 도굴로 인해 지붕돌 귀꽃과 상륜부가 상처를 입었다. 고달사부도는 꼭 원종대사 부도를 먼저 본 후에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달사지부도를 먼저 보면 원종대사부도가 조금은 시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양식은 비슷하나 보물과 국보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감동이 저는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는 어느덧 제집으로 향해가면서 따사로움을 전부 내려놓을 것처럼 진하게 비춰지고 있고 그 햇살아래 홀로 굳세게 서있는 아름다운 부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와 가까이 다가가 세세히 관찰하고픈 욕망도 잊은 채 앞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었습니다.
중대석에 네 마리의 용이 거침없이 노닐고 있고 머리는 조금 도식화 되어 있지만 표정이 생생히 살아 있다. 검은 자국은 탁본의 흔적. 분명 허가없이 이루어진 아마추어의 탁본일게다.제발 탁본후 흔적을 제대로 처리해 주었으면.
고달사부도의 팔각 몸돌에 새겨진 영창 문양
몸 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마다 자물쇠 문양(문비)과 사천왕상․영창(映窓-방과 마루 사이의 두 쪽 미닫이의 창)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달사부도의 팔각 몸돌에 새겨진 문비(자물쇠) 문양
자물통은 그 안에 스님의 사리와 경전 등이 들어 있으니 열쇠로 잠가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조각수법의 아름다움은 지붕돌 처마 아래의 새겨진 비천상의 우아한 자태와 휘날리는 천의를 보면서 다시금 전율할 만큼 황홀합니다.
고달사부도의 지붕돌에 새겨진 비천상 문양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우며 속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는 조각수법이 섬세하기 이룰 때 없고 위아래, 상하의 균형은 완벽하리만치 잡혀있으며 장중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달사지 부도. 과연 이 부도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요? 전문가들은 혜목산 고달선원의 개산조인 원감대사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나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부도나 부도비 등이 있으니 석등도 있는 게 당연하겠지요.. 고달사지 석등은 바로 국림중앙박물관 본관 역사의 길 제일 앞에 당당히 서 있습니다.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석등에 엎드려있는 사자를 조각해놓은 경우는 이곳과 충주 청룡사지 석등 말고는 접해본 적이 없다. 혹시 다른곳을 알고 계신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답사를 즐겨 하시는 많은 분들은 페사지에 오면 웅장했던 대가람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또 고승들의 가르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 고달사지에서 스스로 폐사지로 발걸음을 하기 만드는 진짜 이유는 한국인의 성정을 꼭 빼어 닮은 강철보다 더 단단한 화강암이 불꽃 같은 석공의 재주를 만나 천 년을 불 밝혀 이어온 장엄하면서도 잘생긴 소중한 유산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 걸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의 주요 석물들은 고달이라는 석공이 자가 가족들이 굶어죽는것도 잊어버리고 혼신의 힘으로 만든 역작이라고 합니다. 또 고달의 원래 뜻은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주 고달사지, 황량하게 파혜져진 옛 절터에는 일주문도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들판처럼 보이지만 도의 경지를 통달한 모습으로 천 년을 버티어낸 석물들을 보면서 굳세고 섬세한 우리 겨레의 참 된 성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벽돌이나 나무, 대리석이라면 휠씬 만들기 쉬웠을텐데 왜 그렇게도 다루기 어려운 화강암을 고집했을까요? 바로 영원히 선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오랫동안 가르침을 남기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이 없다면 가능했을까요? 가을이면 붉은 산수유 열매가 절터를 온통 물들인다는 고달사지. 가을이 되었지만 여전히 답답하고 번잡스러운 일상생활에 묶여 있는 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기억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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