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무공이 아홉이나 된다는데
나는 천안시 목천면 소재 김시민 장군 생가지를 방문했다가 그 분의 시호가 충무공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는 충무공은 성운 이순신장군의 시호로 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난 지금까지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을 이끈 장수 중의 한 분인 김시민장군의 호가 충무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무식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역사서적을 뒤지다 보니 고려시대 충무공 지용주 장군이 있었고, 조선왕조시데에만도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이 아홉 분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더욱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에 그 분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한 대로 싣는다.
1. 이순신(李舜臣)
1545년 한성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572년 무과에 처음으로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저 낙방함. 1576년 병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에 임명됨. 1580년 전라도 발포 수군 만호에 임명됨. 1582년 파직되었다가 훈련원 봉사에 임명됨. 1583년 함경도 건원보 권관에 임명됨. 아버지가 돌아기셔셔 휴직하고 삼년사을 치름. 1586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됨. 1587년 녹둔두 둔전관을 겸직함. 첫번째로 백의 종군하게 됨. 1589년 정읍 현감에 임명됨. 1591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남. 옥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끔. 1593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됨. 1597년 정우재란이 일어남. 두번째 백의 종군하게 됨.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재 임명됨. 명랑 해전을 승리로 이끔.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왜적의 유탄에 맞아 운명함.
2. 김시민 (金時敏 1554∼1592(명종 9∼선조 25))
조선 중기 무신. 목천(木川) 출생.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安東). 15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신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수습하여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昆陽) 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 후 염초(焰硝) 500여근을 만들고 총통 70여병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케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10월 공격에서 적탄을 맞아 진몰(陣歿)했으나 적에게 비밀로 했다가 안정된 후 상을 치렀다.
3. 남 이(南 怡)
태종의 외손자며, 권람의 사위였던 남이는 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병조판서까지 지냈으나 한명회, 신숙주 등에 의해 밀려났다가 28세인 예종 때에 유자광의 무고를 입어 역모의 주모자로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한명회가 다시 영의정에 복귀함으로써 훈구세력들의 기반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남이를 무고했던 유자광은 그가 여진족 토벌 때에 지었던 시를 고쳐서 증거로 삼았으니 필화(筆禍)사건이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네, 남아 20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고 하여 자신의 기개를 읊었는데,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쳐서 역모라고 무고하였다.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남이는 이를 불쌍히 여긴 당시 백성들에 의해 구전설화로 다시 살아나는데, 남이장군설화군을 형성할 정도로 방대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는 영양, 포천, 철원, 제주 등의 도적들을 무찔렀으며, 그 때마다 신통한 능력으로 도적패를 소탕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진족을 토벌하여 요동까지 진격했으며, 북관에서 이시애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토벌군으로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그가 무고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민중의 안타까움이 이야기가 돼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인물전설은 <연려실기술>, <청야만집>, <대동기문> 등에 수록되었고, 구전으로도 수많은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의 국조기사에 수록된 남이의 혼인설화를 통해 남이가 지닌 신통력과 범상하지 않음을 살펴볼 수 있다.
“남이가 어릴 때 큰길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위에 귀신 하나가 올라앉아 있었다. 따라가 보니 하인은 권람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곧 집안에 곡성이 나서 물어 보니 권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이는 자신이 죽은 딸을 살리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재상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남이가 들어가 보니 처녀의 가슴 위에 아까 본 귀신이 앉아있는데, 남이를 보자 곧 도망을 가고 죽었던 처녀가 살아났다.
그러나 남이가 방을 나오자 처녀는 또 숨을 거두고 그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곤 했다. 남이가 귀신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나쁜 사귀를 완전히 쫓아버린 후 죽었던 처녀를 살려냈다. 딸을 살려준 은혜를 고맙게 여긴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는데, 권부인은 그가 화를 당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와 관련된 것은 설화뿐 아니라 유적들도 상당히 많은데, 경기도 화성의 비봉리와 남이섬에 있는 묘소를 비롯하여, 서울의 용산에 있는 사당, 남이가 무공을 닦았다는 축령산의 남이바위 등이 있다. 전국에 분포한 남이의 이야기와 유적들은 억울하게 죽은 주검이 어떤 경로를 통해 민중 속에 살아남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4. 구성군(龜城君 ?~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름은 준(浚), 자는 자청(子淸)이다.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龜城正), 이어 구성윤(龜城尹), 1463년 구성군으로 봉해졌다.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6년(세조 12)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듬해 5월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로 출정하여 난을 진압했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었다.
종실이면서도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1468년(세조 14)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올랐다. 1470년(성종 1)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에 귀양갔으며, 모든 벼슬과 공신적(功臣籍)을 빼앗겼다.
1479년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1687년(숙종 13)에 김수항(金壽恒)이 주장하여 신원(伸寃)되고 복관되었다.
5. 구인후(구인후 1578(선조 11)~1658(효종 9))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할아버지는 좌찬성 사맹(思孟)이고, 아버지는 대사성 성(宬)이다.
인조의 외종형(外從兄)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고원군수·갑산부사·선전관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정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신경진(申景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후금의 군사와 싸웠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으며, 그 공으로 어영대장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사건을 적발하여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형조판서·공조판서·훈련대장·판의금부사를 두루 역임하고, 1653년 우의정이 되었다. 1654년 사은사로 청에 갔다온 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상소하다 죄를 입은 김홍욱(金弘郁)을 옹호하다가 삭직되었다. 곧 복관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6. 이수일(李守일. 1554(명종 9)~ 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이다. 아버지는 증영의정 난(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이 우의정 완(浣)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했으며,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90년 선전관이 되었다.
1592년 장기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예천·용궁에서 싸웠으나 패했다.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청하여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從軍)했다. 그뒤 북도방어사·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을 소탕했다.
160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길주목사·수원부사·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1616년(광해군 8)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출정하여 안현(鞍峴)에서 반군을 대파했다. 이에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뒤 형조판서를 지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7. 정충신(鄭忠信 1576(선조 9)~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북방 여진족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방비할 것을 주장했으며, 지략과 덕을 갖춘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다.
처음 절도영에 속한 정병(正兵) 겸 지인(知印)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 밑에서 종군했다. 권율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이항복(李恒福)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닦아 그해 겨울 무과에 합격했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하면서 여진족들과 접촉한 뒤 장차의 우환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623년(인조 1)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겸임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서 반군을 황주·안현에서 물리쳐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를 지냈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로 종군했으며, 1630년 가도(島
1633년 조정에서 후금에 대한 세폐의 증가를 반대하여 단교(斷交)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당진·장연에 유배되었다. 1634년 풀려나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했고, 몸집이 작았으나 기상이 늠름했으며 청렴하여 덕장(德將)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에 얽힌 많은 설화가 전하는데,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뛰어나와 안겼다는 태몽, 이항복과의 인연, 임진왜란 때의 활약과 여진족을 다루는 영웅담 등이 한문야담집에 전한다. 광주광역시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만운집>〈금남집>〈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8. 조영무(趙英茂 ?~1414(태종 14)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지수(之壽)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한산백(漢山伯) 세진(世珍)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사병(私兵)이 되어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령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죽인 뒤 이성계를 추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했으며,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鄭道傳)을 죽였다. 이로 인해 태조의 미움을 받아 잠시 곡산에 유배되었다가 곧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후 이방원의 비호 아래 판중추원사·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를 거쳐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같은 해 왕명으로 사병혁파가 실시되자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하여 황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재등용되어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이 되었다.
이후 판삼군부사·권행의정부사·판승추부사를 거쳐 영승추부사로 병조전서를 겸임하고, 1405년 우정승이 되었다. 1406년 판이병조사를 겸직한 뒤, 1409년 훈련관도제조·영삼군부사 등을 역임하고 병으로 사직했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취임거부로 조정에서 물의가 일어나자, 그를 추천했다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9. 김응하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철원 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다.
[참고사항]
임진왜란 때 공은 세운 무신들에게 준 훈호는 3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1등 선무공신은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선무공신은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선무공신은 정기원, 권협, 유사헌,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봉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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