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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의 연합의병운동(聯合義兵運動)

_______! 2008. 7. 13. 17:40

전국(全國)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의 연합의병운동(聯合義兵運動)

                                              신용하(愼鏞廈)*

 

1. 머 리 말

2. 군대해산(軍隊解散)후의 전국의병운동(全國義兵運動)의 고양(高揚)

3.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성립

4.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삼산전투(三山戰)·마전전투(麻田戰鬪)와 의병전쟁(義兵戰爭)

5. 제(第)1차(次) 서울 탈환작전(奪還作戰)

6.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의 대응(對應)과 공작(工作)

7. 제(第)2차(次) 서울 탈환작전(奪還作戰)

8.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軍師長)의 일제통감(日帝統監)에의 요구조건(要求條件)

9. 맺음말

 

1. 머 리 말

 

한국역사에는 외래 침략자(侵略者)들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겨레와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겨레와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민족적(民族的) 전통(傳統)이 이어져 내려왔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이 한국(韓國)을 식민지화하려고 침략했을 때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국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권(國權)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치열한 의병전쟁(義兵戰爭)을 전개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 <의병(義兵)>을 정의하여, 의병은 <민군(民軍))으로서 국가(國家)가 위급할 때에 즉각 <의(義)>로써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從軍)하여 싸우는 사람으로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나라의 정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의병(義兵)이란 것은 민군(民軍)이다. 국가(國家)가 위급(危急)할 때에 즉각 의(義)로써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徵發令)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從軍)하여 적개(敵愾)하는 사람이다.

우리 민족은 본래부터 충의(忠義)가 돈독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외환(外患)을 당함에 있어서 의병(義兵)의 적공이 가장 탁월하고 현저하였다.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선조(宣祖) 때에 왜구(倭寇)에게 짓밟힘이 8년이나 되었는데, 혹은 향신(鄕紳)이, 혹은 승려(僧侶)들이 모두 초야(草野)에서 분기(奮起)하였다. 그들은 털끝마치도 정부의 병역제도(兵役制度)에 의거함이 없이 오직 충의(忠義)의 격려로써 사방에서 모여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으며, 적(敵)이 물러갈 때까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하였다. 수훈(殊勳)과 탁절(卓絶)은 일월(日月)처럼 맑게 빛났으며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강토(彊土)를 회복하는 데 크게 힘입은 바 있었다. 즉 의병(義兵)은 우리 민족(民族)의 국수(國粹)인 것이다. 1)

 

한국 민족에게는 이러한 <의병(義兵)>의 전통(傳統)이 있었기 때문에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에게 국권(國權)을 빼앗기게 되자 전투(戰鬪)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문사(文士)들과 병기(兵器)가 없는 농민들이 순국(殉國)할 뜻을 결연히 세우고 의병(義兵)으로 봉기해서 적(敵)과 싸워 시체가 들에서 썩어도 후회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비록 선비들은 전투(戰鬪)를 배우지 않았으며 농민들은 병기(兵器)가 없을지라도 그들은 그러나 순국(殉國)할 뜻을 결연히 세우고 맨주먹으로 칼날에 무릅써 맞서서, 뼈는 들판에 드러나고 뇌와 살갗은 창끝에 발라지면서도 조금도 후회하는 뜻이 없었다. 이야말로 역사(歷史)로 충의(忠義)를 배양해 온 효과가 아니겠는가. 일본(日本)이 2개 사단(師團)의 병력(兵力)을 출동시켜 7,8년간 전쟁(戰爭)을 한 것도 의병(義兵)의 저항(抵抗)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2)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韓國)을 침략(侵略)하여 식민지화할 것을 목적으로 1904년 2월 8일 인천(仁川)과 여순(旅順)항에 정박해 있는 제정 러시아 군함 각 2척을 기습 공격하여 격침시키고 이틀 후인 2월 10일 대(對) 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 전쟁을 도발한 다음 대규모의 병력을 불법적으로 한국(韓國)에 상륙시켰다. 대한제국 정부는 전운(戰雲)이 감돌자 이미 1월 23일에 엄정 중립(中立)을 선언(宣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日本軍)은 불법으로 서울에 침입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해서 일본군의 한국내 군용지(軍用地) 수용(收用)을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第)l차(次)·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2월 23일 강제로 조인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1904년 4월 3일에는 한국에 침입한 일본군 중에서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차출하여 일본군(日本軍)의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사령부(司令部)를 편성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무력(武力)으로 한국을 지배할 야욕을 명확히 드러내 보인 것이었으므로 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1904년 6월 6일에는 일본공사(日本公使)를 시켜서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전국황무지관간권(全國荒蕪地關墾權)」을 요구해 왔으며, 7월 20일에는 자의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에 의하여 한국(韓國)의 치안(治安)을 일본군(日本軍)이 담당한다고 통고해 왔다. 일본군은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비롯해서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서는 함부로 한국인을 처벌해 가며 일본군(日本軍)의 군정(軍政)을 실시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8월 22일 「 한· 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協定書)」를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 정부(政府)의 각부(各部)에 일본인(日本人) 고문(顧問)들을 임명해서 한국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이를 통제케 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이 러 · 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 강점의 단계적 조치를 자행하면서도 언제나 「한국독립(韓國獨立)의 유지(維持)와 동양평화(東洋平和)의 실현」을 위해 러·일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거짓 선전하였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구호와는 달리 일제(日帝)의 한국침략(韓國侵略) 정책이 강행되어 가는 것을 보고 국가주권(國家主權)의 위급함을 절감하여 1904년 여름부터는 서울과 경기지방(京畿地方)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 국민들의 <의병(義兵)>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05년에 들어서자 러·일전쟁의 전세는 일본측에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제도 4월 1일 「통신기관위탁(通信機關委託)에 관한 협정서(協定書)」를 강제 조인케 하여 통신권(通信權)을 박탈해 갔으며, 주청한국공사관(駐淸韓國公使館)(4월), 주영한국공사관(駐英韓國公使館)(5월), 주미한국공사관(駐美韓國公使館)(7월) 등을 폐쇄시키고, 4월 13일에는 친위대(親衛隊)를 폐지하여 시위대(侍衛隊)로 개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대수(軍隊數)를 절반(折半)으로 감축(減縮)시켰다.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1905년 9월 5일 러·일강화조약(講和條約)(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서 국제열강의 최종 양해를 얻게 되자 한국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武力)으로 강요하여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 5조약>을 체결해서 외교권(外交權)을 비롯한 한국의 국권(國權)의 일부를 강탈하였다. 일제는 1905년 12월 20일 「한국통감부급(韓國統監府及) 이사청관제(理事廳官制)」를 제정 공포하고, 1906년 2월 1일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여 일제의 소위 「통감통치(統監統治)」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제가 한국(韓國)의 국권(國權)을 이와같이 강탈해 나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의 의병운동(義兵運動)은 점차 확대되어 1904년에는 주로 서울·경기(京畿)지방과 서북(西北)지방에서 일어났던 의병이, 1905년 5월에는 강원도(江原道)에서 원용팔(元容八) 의병부대가 봉기해서 산맥을 타고 강원도뿐만 아니라 충청북도(忠淸北道)와 경상북도(慶尙北道)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구국(救國)을 위하여 봉기한 한말의 의병운동은 1914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3)

 

제 1단계는「(재(再))봉기(蜂起)의 단계」이다. 일제(日帝)가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일본군이 불법으로 한국에 침입해서 서울과 각지를 점령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이듬해 11월 17일 <을사 5조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국권(國權)을 지키기 위하여 전개한 의병 운동이다. 1904년 7·8월부터 시작된 서울·경기지방의 의병운동과 1905년 봄부터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원용팔(元容八) 의병부대가 봉기하고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이문호(李文鎬) 의병부대, 광주(廣州)에서 구만서(具萬書)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활동한 시기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

 

제 2단계는 「확대기(擴大期)의 단계」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 5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國權)의 일부를 빼앗기고 1906년 2월 1일 일제(日帝)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소위 통감통치(統監統治)가 시작된 이후부터 1907년 7월 31일까지의 기간에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개한 의병운동의 단계이다. 1906년 5월에 충청남도 홍산(鴻山)에서 기병한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의 홍주성전투(洪州城戰鬪), 6월 전라남도 순창(淳昌)에서 진출한 최익현(崔益鉉) 의병부대, 7월에 임실(任實)에서 기병한 강재천(姜在天) 의병부대, 남원(南原)에서 봉기한 양한규(梁漢奎) 의병부대, 1906년 5월 경상북도 영양(英陽)에서 기병한 김순현(金淳鉉) 의병부대, 영해(寧海)에서 봉기한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 진보(眞寶)에서 봉기한 이하현(李夏鉉) 의병부대, 영천(永川)에서 봉기한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의병부대 등이 활동한 시기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

 

제 3단계는 「고양기(高揚期)의 단계」이다.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해산(軍隊解散) 후 해산당한 구군인(舊軍人)들이 봉기하여 의병(義兵)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의병장(義兵將)들의 지휘하에 의병부대들이 봉기하고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을 시도했으며, 1909년 10월 말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에 대해서도 용감히 싸운 의병운동의 고양기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

 

제 4단계는 「퇴조(退潮)와 독립군(獨立軍)으로의 전환(轉換)의 단계」이다. 1909년 11월 1일부터 의병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면서 독립군(獨立軍)으로의 형태전환을 추진한 1914년 5월까지의 시기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

 

이 논문에서는 항일 의병운동의 제3단계인 의병운동 고양기(高揚期)에서 중요한 의병운동이었던 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편성과 그 의병전투,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 등을 종래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2. 군대해산(軍隊解散) 후의 전국의병운동(全國義兵運動)의 고양(高揚)

 

일제는 <을사(乙巳) 5조약(條約)>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의 일부를 빼앗아 간 다음 1906년 2월 1일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통치(統監統治)를 자행하면서 한국을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태로 만들었다가,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密使)사건을 구실로 악용하여 1907년 7월 19일 황제 고종(高宗)을 강제로 양위(讓位)시켰다. 일제는 이완용매국내각(李完用賣國內閣)에게 강요하여 7월 24일 <정미(丁未) 7조약(條約)>을 강제 체결해서 한국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임명하여 소위 「차관통치(次官統治)」를 시작했으며,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칙(詔勅)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받은 형식을 취하여, 8월 1일에는 병사들을 기만해서 훈련원에 집합시켜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대(軍隊)의 해산식(解散式)을 강행케 하였다.4)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켜서 완전히 무방비(無防備) 상태로 만들고는 한국을 완전식민지(完全植民地)로 병탄하기 위한 준비를 자행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배치 상황은 서울에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3개 대대)와 제2연대(3개 대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8개 대대)를 두어 이들을 수원(水原)·청주(淸州)·원주(原州)·대구(大邱) ·광주(光州) ·해주(海州)·안주(安州)·북청(北淸)에 배치하고, 각 진위대 아래 분대(分隊)를 주요지방에 파견 주둔시키고 있었다. 1개 대대(大隊) 는 약 500∼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일제는 이 감축되어 얼마 남지 않은 군대(軍隊)마저도 황궁호위용(皇宮護衛用) 1개 대대를 남기고는 모두 해산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韓國軍)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봉기하기 시작하였다.6)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은 일제의 한국군 해산에 항의하여 부하 장병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대대장실에서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 아깝지 않다 (군불능수국(軍不能守國) 신불진충(臣不盡忠) 만사무석(萬死無惜))」이라는 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이것은「군인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 되어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가 봉기했다는 통보를 받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견습 참위 남상덕(南相悳)의 지휘아래 봉기하였다.7) 봉기한 대한제국 군대 병사들은 미리 병영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日本軍)과 8월 1일 오전 8시부터 11시 40분까지 무려 3시간 40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음 시가(市街)로 나와 남대문(南大門)과 서소문(西小門) 사이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市街戰)을 전개하였다.8) 봉기한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들은 탄약이 떨어져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시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성(城)밖으로 나가 <의병(義兵)>부대에 합류하였다. 황현(黃玹)은 「그 곧 성(城) 밖으로 달아난 자는 모두 의병(義兵)에 합류(合流)하였다」9)고 기록했으며, 송상도(宋相燾)도 남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정미(丁未)년 8로 의병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로써부터이다」10)고 기록하였다. 일제측도 「해산(解散)된 군인(軍人)의 대부분은 지방(地方)에 도망하여 폭도(暴徒)의 무리에 뛰어들어 오랫동안 화란(禍亂)의 불길을 종식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11)

 

일제는 서울 시위대의 해산에 뒤이어 8월 3일∼19일 사이에 지방 진위대(鎭衛隊)도 차례로 해산시켜 나갔다. 그러나 지방 진위대의 한국군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8월 5일에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해산을 거부하여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시민들과 함께 봉기하여 원주읍을 점령하고, 우편국·경찰서·군청등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열어서 무장을 강화하여 의병부대(義兵部隊)로 전환하였다.12) 또한 여주분견대(驪州分遣隊)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두 부대로 나누어 김덕제(金德濟) 의병부대는 약 600명이 평창(平昌)·강릉(江陵)방면으로부터 양양(襄陽)·간성(杆城)·통천(通川)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는 약 1,000명이 제천(堤川) ·충주(忠州) ·죽산(竹山) ·장호원(長湖院) ·여주(驪州) ·홍천(洪川) 방면으로 진출하여 도처에서 일본군(日本軍) 수비대(守備隊)를 격파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13)

 

뒤이어 8월 9일에는 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 소속의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그들은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연기우(延基羽) 등의 지휘아래 주민들과 함께 약 600명이 무기고(武器庫)를 점령하여 무장하고 강화읍을 점령한 다음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친일파 군수를 처단했으며, 찾아온 일본군(日本軍)과 치열한 교전을 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14)

 

이 밖에도 홍주분견대(洪州分遣隊)(청주진위대 소속)의 48명의 전체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를 시도하다가 소대장에게 속아 실패했으며, 진주분견대(晋州分遣隊)(대구진위대 소속)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를 시도하다가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또한 안동분견대(安東分遣隊)(대구진위대 소속)의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의병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오직 안동(安東)·원주(原州) 양 진위대는 군대해산에 앞서 기회를 틈타 총을 메고 흩어져서 왜(倭)가 크게 고민하였다」15)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북청진위대(北靑鎭衛隊)의 일부 병사들도 해산에 항의하여 군대해산 이후 개별적으로 의병에 합류하였다.16)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 당시에는 집단적으로 봉기하지 않은 경우에도 해산 후 귀가한 다음 다수의 군인들이 의병부대(義兵部隊)에 들어가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제측도 「해산 당시는 폭동(暴動)을 일으키지 않은 자까지도 해산(解散) 후 폭도(暴徒)로 되어 한국 각지를 교란하여 일본인(日本人)의 피해(被害)가 심하고, 수년 사이에 한국의 지방은 모두 이 해산병(解散兵)의 폭도화(暴徒化)에 의해 위험지역(危險地域)으로 변했다」고 기록하였다.17)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당한 군인(軍人)들의 봉기와 의병(義兵)으로의 전환(轉換)은 제2단계의 의병운동(1905.11.17∼1907.7.31)이 퇴조되고 있던 기세에 새로운 활력(活力)을 불어넣은 것이 되었다. 직업군인들의 의병부대에의 합류는 의병부대들로 하여금 실질적인 전투능력(戰鬪能力)을 갖게 하여 의병운동이 본격적인 국권회복전쟁(國權恢復戰爭)으로 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힘을 얻은 농민들과 청년들과 유생들이 무수히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어 의병 무장 투쟁은 새로운 고양기(高揚期)에 들어가게 되었다.18)

 

군대해산 후 구군인(舊軍人)들의 의병(義兵)에의 합류가 수반한 특징으로서는 ① 일본군경(日本軍警)에 대한 직접적 항전 ② 의병 및 의병장 구성에 있어서의 군인(軍人) 출신과 평민(平民) 출신 의병장의 비중의 현저한 증가 ③ 의병부대들의 전투성(戰鬪性)·조직성(組織性)·기동성(機動性)·지속성(持續性)의 증가와 일본군에의 타격력(打擊力)의 증강 ④ 민족적 모순의 선명한 부각과 의병운동의 전국적 확대를 들 수 있다.19)

 

해산군인들의 봉기와 의병(義兵)에의 합류에 고취되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봉기는 전국 방방곡곡에 걸친 것이어서 여기서는 도저히 그 이름들도 다 들기 어렵다. 그 중에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의병부대의 봉기만을 들어보면, 우선 경기도에서는 허위(許蔿)가 김진묵(金溱默)·왕회종(王會鍾) 등의 추대를 받고 연천(漣川)·적성(積城)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20) 황현(黃玹)은 「전참찬(前參贊) 허위(許蔿)가 연천(漣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年)과 상응해서 병성(兵聲)이 크게 떨치었다」고 기록하였다.21) 허위(許蔿)는 주로 경기도 연천(漣川)·적성(積城)·양주(楊州)·파주(坡州)·개성(開城)·삭녕(朔寧)·안협(安峽)·토산(兎山)·이천(伊川) 등지에서 다수의 의병을 모집하였다.22)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허위(許蔿) 의병장의 의병모집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 의병은 적성(積城)·삭녕(朔寧)·안협(安峽)·토산(兎山) 등지에서 장정을 모집하는데 수효는 목하에 4,5백명에 달하였다고 하고, 15일 이천군(伊川郡)에 의병(義兵) 5백명이 습래(襲來)한다는 보(報)를 문(聞)하고 해군수(該郡守)는 군내에 무기(武器)를 수합하야 하시(何時)든지 피란한다 하며, 의병(義兵)은 평강(平康)·신계(新溪) 방면으로 출몰하야 격문(檄文)을 비전(飛傳)하는데 대략 여좌(如左)하니 '대저 일본(日本)은 임진(壬辰) 이래로 한국인(韓國人)의 적(敵)이 되어 수십년래(數十年來)로 각지에 침입(侵入) 횡행(橫行)하니, 일인(日人)과 혼거(混居)하면 한국 인민이 멸망(滅亡)에 지(至)할 것인고로 인민을 구제하기로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사오니 전곡(錢穀) 물품(物品)을 수력(隨力) 기부(寄附)하라' 하얏다더라.23)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한편으로 강화분견대의 해산군인인 연기우(延基羽) 부대를 포섭하여 전투능력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해산군인인 김규식(金奎植)부대를 포섭하여 군세(軍勢)가 크게 떨쳤다. 일제는 그후 허위(許蔿)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피고[허위(許蔿)]는 전(前)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인데, (‥‥‥) 때마침 같은 목적으로 이미 내란을 일으키고 경기도 삭녕군(朔寧郡)에 집결하여 진(陣)을 친 김진묵(金溱默)·왕회종(王會鍾) 등이 초빙하여 맞이하는 것을 기회로 융희(隆熙) 원년(元年) 음력 8월 그들의 진(陣)으로 갔으며, 그후 다시 각기 수백명의 부하를 가진 적괴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황순일(黃淳一)·황재호(黃在浩)·이인영(李麟榮)·박종한(朴宗漢)·김춘(金春)[준(俊)]수(洙) ·이종협(李鍾協) ·이홍응(李弘應) 등을 규합하여 군사(軍師)의 지위에서 작전 방략을 짜고 이를 각 부장(部長)에게 가르치며 부장을 지휘하여 융희 2년 5월까지 삭녕(朔寧) ·양주(楊州)·장단(長湍)·철원(鐵原)·춘천(春川)·토산(兎山) 등의 군내에서 십수회(十數回) 토벌군(討伐軍)과 교전(交戰)하다가‥‥‥24)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10월까지 전개한 다수의 유격전 중에서 몇가지 큰 작전을 들면, 1907년 9월 철원읍(鐵原邑)을 점령(占領)하고 연천군(漣川郡) 우편취급소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日本人)을 처단했으며,25) 9월 하순 포천군(抱川郡) 외북면에서 일본군(日本軍) 70명과 교전하여 이를 소탕하였다.26) 1907년 10월 초에는 포천(抱川)의 일본군(日本軍) 수비대(守備隊)와 교전하여 이를 격퇴했고,27) 10월 18일(음력 9월 12일)에는 의병 약 300명을 투입해서 안협읍(安峽邑)을 점령하여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을 색출한뒤 처형하였다.28) 1907년 양력 11월 초에는 약 300명의 병력으로 포천군(抱川郡) 고자촌(高子村)에서 일본군 1개 소대와 교전하여 이를 소탕했으며,29) 11월 17일(음력 10월 13일)에는 의병 약 300명을 투입하여 다시 철원읍(鐵原邑)을 점령하고 우편취급소를 소각하여 일제의 통신망을 마비시켰으며 일본인(日本人) 순사(巡査)와 친일파(親日派)들을 처형하였다.30)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이와같이 의병무장투쟁을 전개하고 한편, 또한 정치외교활동과 선전사업도 전개하여, 의병장 허위(許蔿)는 1907년 음력 9월 24,25일경 13도국민(道國民)들과 각국(各國) 영사관(領事館)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작성해서 부하 대장 김범호(金範浩)를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보내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내어 게재케 하였다.

본인(허위의 부장 이병채(李秉採)‥‥‥필자)이 허위(許蔿)와 같이 있을 당시(작년 음력 9월 24∼25일경) 허위(許蔿)는 십삼도인민(十三道人民)과 각국(各國) 영사관(領事館)에 보낼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부하대장 김범호(金範浩)로 하여금 송달하게 했으나, 그는 세사(世事)에 어두움을 들어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로 하여 송부할 것을 제의하였음. 김범호(金範浩)는 허위(許蔿)가 포천(抱川) 소요산(逍遙山)에 있는 흥국사(興國寺)의 진중(陣中)에 있을 때 돌아와서 그 소임(所任)을 다하였음을 보고하였음.31)

 

의병장 허위(許蔿)의 이와같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통한 격문(檄文)의 선전 활동은 의병운동을 고양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많은 폭도(暴徒)들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격문(檄文)에 의하여 분개하고 일어난 자들로서 지금 그 성명(姓名)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곤란하나, 그 중 저명한 자의 예를 들면 작년 허위(許蔿)의 군(軍)에 몸을 던진 양주인(楊州人) 이동섭(李東燮)으로서 그는 항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읽고 분개했으며, 특히 그 사설(社說)에 느낀 바가 커서 술을 마시고 격분한 나머지 드디어 의병(義兵)이 되었다고 하였음.32)

 

경기도에서는 허위(許蔿) 의병부대 이외에도, 그에 앞서 양근(楊根)에서 이은찬(李殷瓚)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경기도뿐만 아니라 강원도·황해도 일대에까지 진출하면서,33) 강인하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및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합병하면서 대규모 전투를 전개하였다.34) 양주(楊州)에서는 권준(權俊) 의병부대와 박래병(朴來秉)·김석하(金錫夏)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양평(楊平)·영평(永平) 등지에서 활동하였다.35) 파주(坡州)에서는 조인환(曺仁煥)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활동했으며, 개성(開城) 부근에서는 현덕호(玄德鎬)(전(前)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향관(餉官)) 의병부대, 여주(驪州) 부근에서는 김봉기(金鳳基) 의병부대, 양근(楊根) 일대에서는 신창현(申昌鉉) 의병부대가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제(日帝) 헌병분견소를 여러차례 기습하여 섬멸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와 김덕제(金德濟) 의병부대 이외에도, 원주에서 1907년 9월초에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가 봉기하였다.36) 이인영(李麟榮)은 을미의병을 일으킨 후 문경(聞慶)에서 은퇴생활을 하며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군대해산 직후에 봉기한 이은찬(李殷瓚)·이구채(李球采) 등이 약 5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찾아와 의병대장에 추대하자 이에 응하여 1907년 9월 2일(음력 7월 25일) 원주(原州)에서 봉기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전국 8도에 격문(檄文)을 보내고 의병을 소모하였다. 이에 응하여 수천명의 백성들이 의병으로 그의 산하에 모이자 그는 부서를 편성하고 의병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37) 이인영(李麟榮)은 또한 국내 동포들에게뿐만 아니라 음력 9월 10일경에는 각국(各國) 영사관(領事館)에 보내는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부하대장 김세영(金世榮)을 서울에 잠입시켜서 각국 영사관에 발송하고,38)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도 게재케 하였다.39)

 

또한 이인영은 1907년 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大韓關東倡義大將)」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해외동포(海外同胞)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Manifesto to All K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도 작성하여 국외(國外)에 있는 동포들에게 발송하였다.

동포(同胞)여 ! 우리는 단결(團結)하여 조국(祖國)에 우리 자신을 바쳐서 독립(獨立)을 회복(恢復)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야만적 일본인(日本人)들의 극악한 죄악과 만행을 전세계(全世界)에 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日本人)들은 교활하고 잔인하며 진보(進步)와 인도(人道)의 적(敵)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본인(日本人)들과 그들의 첩자(諜者)들과 그들의 동맹자들과 야만적 일본군(日本軍)을 격살(擊殺)하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40)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는 의병장 허위(許爲)·이강년(李康年)·민긍호(閔肯鎬)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면서, 의병무장 투쟁은 최후로 경기도(京畿道)에 들어가 서울을 포위하고 서울을 탈환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일본군수비대(日本軍守備隊)와 수차례의 격전을 전개하여 이를 물리치며 횡성(橫城)·춘천(春川)을 거쳐 경기도 지평(砥平)을 향해서 진군하였다.

 

강원도에서는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김덕제(金德濟) 의병부대,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이외에도 울진(蔚珍) 부근에서 박준성(朴準成)(전 원주진위대 참위) 의병부대, 인제(麟蹄) 부근에서 손재규(孫在奎)(전 원주진위대 참위) 의병부대와 박여성(朴汝成) 의병부대,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 일대를 근거지로 한 고중록(高重錄) 의병부대, 춘천(春川) 부근에서 지룡기(池龍起)·이인재(李寅在) 의병부대, 삼척(三陟) 지방에서는 변학기(邊鶴基) 의병부대와 김운선(金雲仙) 의병부대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황해도에서는 평산(平山) 지방에서 박정빈(朴正斌)·이진룡(李鎭龍)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강화도에서 상륙한 지홍윤(池弘允) 의병부대와 서로 호응하면서 활동했으며, 장단(長湍)에서는 평민출신 김수민(金秀民)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이인영(李隣榮)·이은찬(李殷瓚) 의병부대 및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합병하면서,41) 강인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42) 토산(兎山)·금산(金山) 등지를 중심으로 이종협(李鍾協)·서상렬(徐相烈) 의병부대, 옹진(瓮津)에서 허덕천(許德天)·민효식(閔孝植) 의병부대, 김천(金川)에서 고원직(高元直) 의병부대, 수안(遂安)·곡산(谷山)에서 채응언(蔡應彦)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충청남북도에서는 제천(堤川)에서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가 더욱 큰 규모로 재봉기하여 강원도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및 경기도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풍기(豊基)·문경(聞慶)·단양(丹陽)·연풍(延豊)·영월(寧越)·죽령(竹嶺)·소백산맥(小白山脈)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43)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는 이인영(李麟榮)으로부터 경기도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경기도 건천(乾川)지방으로 진출하였다.44)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는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 걸쳐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45)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에서는 노병대(盧炳大) 의병부대가 봉기했는데 처음에는 200명이었던 의병이 서울시위대 해산군인들이 합류함으로써 곧 1천명의 대규모 의병부대로 성장하여 활동하였다.46) 또한 박여성(朴汝成) 의병부대가 이동하여 충주(忠州)·음성(陰城)·제천(堤川)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청주(淸州)에서는 한봉수(韓鳳洙) 의병부대가 봉기하였다. 또한 충청남도에서는 공주(公州)에서 김순오(金順五) 의병부대, 계룡산(鷄龍山)에서는 이종원(李鍾元) 의병부대, 연산(連山)·은진(恩津)에서는 김부길(金夫吉) 의병부대가 봉기하였다.

 

경상북도에서는 전년에 영해(寧海)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가 일월산(日月山)과 백암산(白岩山)을 근거지로 의병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47) 영천(永川)에서는 정용기(鄭鏞基) 의병부대가 동대산(東大山)에서 재봉기하여 청송(靑松)·영천(永川)·청하(淸河)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이 되어 흥해(興海)·영덕(盈德)·청송(靑松) 일대에서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48) 안동(安東)에서는 백남규(白南奎)(안동분견대 부위(副尉)) 의병부대, 이광렬(李光烈) 의병부대, 유시연(柳時淵) 의병부대 등이 봉기하여 영양(英陽)·청송(靑松)·안동(安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49) 예천(醴泉)에서는 장윤덕(張胤德)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인근 지방에서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맺으며 활동하였다.

 

전라남북도에서는 1907년 9월 10일 순창(淳昌)에서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50) 김동신 의병부대는 봉기 직후 동복(同福)의 일제 경찰관분소를 습격하고, 남원(南原) 사장(沙場)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구례(求禮)의 일제 경찰관분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는 지리산(智異山)을 근거지로 하여 경상남도에도 진출하여 함양군(咸陽郡) 좌전(左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안의군(安義郡) 월성(月城)에서도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으며, 거창군(居昌郡) 매학(梅鶴)에서도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의 눈부신 활동은 전라도 일대의 의병운동의 고양에 큰 영향을 끼쳤다.51) 또한 동복(同福)에서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가 봉기하여,52)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동했다.53) 임실(任實)에서는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54) 흥덕(興德)에서는 유병기(劉秉淇) 의병부대, 남원(南原)에서는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55) 함평(咸平)에서는 조경환(曺京煥) 의병부대,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56)와 김준(金準) (태원(泰元)) 의병부대, 보성(寶城)에서는 머슴출신인 안계홍(安桂洪) 의병부대,57) 장성(長城)에서는 김용구(金容球) 의병부대,58) 장흥(長興)에서는 강무경(姜武景) 의병부대, 해남(海南)에서는 황두일(黃斗一) 의병부대, 임실(任實)에서는 이남규(李南圭) 의병부대, 남원(南原)에서는 이학사(李學士) 의병부대 등이 봉기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59)

 

경상남도에서는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가 안의(安義)에서 봉기하여 전라도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을 근거지로 해서 영남지방 뿐만 아니라 호남(湖南)·호서(湖西)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했으며, 장수읍(長水邑)을 점령하기도 하였다.60) 가야산(伽倻山)과 지리산(智異山)에서는 서명국(徐明國) 의병부대가 맹활약을 하였다. 양산(梁山)에서는 서병희(徐炳熙) 의병부대가 봉기하고, 거창(居昌)에서는 전성범(全聖範) 의병부대, 산청(山淸)에서는 박동의(朴東義) 의병부대, 하동(河東)에서는 이백응(李白應)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함경북도에서는 포수 출신인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의병부대가 북청군(北靑郡)에서 봉기하여 삼수(三水)·갑산(甲山)·풍산(豊山)·북청(北靑)·장진(長津)·후창(厚昌)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후치령전투(厚峙嶺戰鬪)를 비롯하여 무려 37회에 걸친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를 감행하면서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으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61) 고원(高原)에서는 윤동섭(尹東燮)(해산군인) 의병부대, 장진(長津)에서는 송상봉(宋相鳳) 의병부대와 양허진·한영준(韓永俊) 의병부대, 영흥(永興)에서는 노희태(盧熙泰)(해산군인) 의병부대와 김정길 의병부대, 북청(北靑)에서는 최동률(崔東律)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치열한 의병전쟁을 감행하였다.62)

 

평안남북도에서는 순천(順川)에서 김여석(金汝錫)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덕천(德川)·맹산(孟山)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63) 이밖에도 양덕(陽德)에서는 신응두(申應斗) 의병부대와 김개복(金改福) 의병부대, 상원(祥原)에서는 천영석(天永錫) 의병부대, 성천(成川)에서는 서광도(徐光道)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용감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나서 노령 연해주(沿海洲) 연추(煙秋)에서는 안중근(安重根)이 이범윤(李範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지원을 받아 국외 의병인 300명의 이범윤(李範允)·안중근(安重根)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준비하였다.64)

이밖에도 여기서 낱낱이 이름을 다 들 수 없는 수많은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전국 각지에서 무수히 봉기하여 각처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면서 과감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1일의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해산군인의 봉기 및 의병에의 합류는 의병운동 고양(高揚)에 하나의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 해 말까지에는 한국인들이 「금수강산」이라고 부르는 한반도의 높고 낮은 봉우리마다 한국 국민들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알리는 봉화가 높이 치솟아 올랐다.

 

3.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성립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과 의병장들은 부대별로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의병전쟁을 전개하면서도 상호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각 지역 의병부대들과 의병장들의 상호 연락·연계관계의 예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평안도(平安道) 의병은 황해도(黃海道) 의장(義將) 박기섭(朴基燮)과 연락하고, 황해도 의병은 장단(長湍)의장 김수민(金秀敏)과 상련(相連)하고, 김수민은 철원(鐵原) 의장 전참위(前參尉) 김규식(金奎植)과 연통(連通)하고, 김규식은 적성(積城) 마전(麻田) 의장 허위(許蔿)와 상통(相通)하고, 허위는 지평(砥平)·가평(加平)등지의 이인영(李麟榮)과 통섭(通涉)하고, 이인영은 제천(堤川)·영동(永同) 등지의 이강년(李康年)과 상통(相通)하고, 이강년은 원주(原州) 등지의 의장 민긍호(閔肯鎬)와 연접(連接)되어 호상통첩(互相通諜)한다 하고.65)

 

전국 각 지방 의병부대들의 이러한 긴밀한 상호연락(相互連絡)의 조건 위에서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와 허위(許蔿)의병부대는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분산적(分散的)으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京畿) 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궁극적으로는 서울에 진입해서 수도 서울을 탈환하여 일제 통감부와 담판(談判)을 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추구하였다. 당시 경기도(京畿道)에서는 허위(許蔿) 의병부대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인접 지방에서는 강원도(江原道)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와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가 가장 막강한 의병부대로서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 전장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충청북도와 강원도 접경지대에서는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의병운동은 우선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이인영(李隣榮)·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면 형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의 중군장(中軍將) 이은찬(李殷瓚)은 허위(許爲)가 1895년 의병운동을 일으켰을 때의 허위(許爲) 의병부대의 막료이며 동지였으므로,66) 두 주력부대 사이에는 연합의병운동의 실현에 대한 합의(合意)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인영(李隣榮) 의병부대와 허위(許蔿) 의병부대 사이에 충분한 사전 협의와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 이인영(李隣榮)은 1907년 음력 10월(양력 11월) 전국 각 지방의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들을 통일해서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하여 서울을 향해서 경기(京畿)지방으로 진군(進軍)하자는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서북양도(西北兩道)(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全國)에 보내고 이에 호응하는 의병부대들은 경기도 양주(楊州)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용병(用兵)의 요체는 그 고독(孤獨)을 피(避)하고 일치(一致) 단결(團結)하는 데 있은 즉, 각도(各道)의 의병(義兵)을 통일(統一)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天下)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韓國)의 해결(解決)에 유리(有利)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67)

 

이인영(李麟榮)은 원주(原州)에서 이러한 격문(檄文)을 전국에 발송함과 동시에 우선 그가 활동하는 지역인 강원도(江原道)와 그 인근지방의 의병부대들을 다음과 같이 하나로 통일하였다.68)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이인영(李麟榮)

총독장(摠督將) 이구채(李球采)

중군장(中軍將) 이은찬(李殷瓚)

좌군장(左軍將) 방인관(方仁寬)

우군장(右軍將) 권중희(權重熙)

유격장(遊擊將) 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左先鋒將) 정봉준(鄭鳳俊)

우선봉장(右先鋒將) 김병화(金炳和)

후군장(後軍將) 채상준(蔡相俊)

운량관(運糧官) 현이보(玄履甫)

재무관(財務官) 신창선(申昌先)

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左摠督將) 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右摠督將) 이귀성(李貴成)

진위대사령부(鎭衛隊司令部) 민긍호(閔肯鎬)

 

이인영(李麟榮)이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 지평(砥平)에 이르렀을 때는 16진(陣)의 병(兵)을 합(合)하여 약 6천명에 달하는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인영(李麟榮)이 지휘하는 관동창의소(關東倡義所)의 의병부대는 지평(砥平)에서 약 1개월간 유진(留陣)하면서 일본군과 3차례의 접전(接戰)을 하고 일제(日帝) 통감(統監)에게 성토격서(聲討檄書)를 보낸 다음 홍천(洪川)·춘천(春川)을 거쳐 경기도 양주(楊州)에 이르러 허위(許爲) 의병부대와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부대들을 만나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 때 의병의 총수는 48진(陣)에 약 1만명에 달하게 되었다.69) 그 내역은 강원도(江原道) 의병이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2,000명과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1,000명을 비롯해서 약 6,000명이었고, 경기도(京畿道)의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약 2,000명, 충청도(忠淸道)의 이강년(李廉年) 의병부대가 500명, 황해도(黃海道)의 권중희(權重熙) 의병부대가 500명, 평안도(平安道)의 방인관(方仁寬) 의병부대가 80명, 함경도(咸鏡道)의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가 80명, 전라도(全羅道)의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가 100명 등 모두 48진(陣)에 약 1만명이었다.70) 이인영은 이 1만명중에서 해산군인(解散軍人)의 숫자가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에 포함된 800명, 이은찬(李殷瓚)·이구채(李球采)가 인솔하고 온 80명, 서울·강화(江華)·청주(淸州)의 해산병(解散兵) 등 당시 약 3,000명 정도였다고 설명하였다.71)

이인영의 격문에 호응하여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楊州)에 모인 의병장들은 회의(會議)를 열어 협의한 후에 연합의병부대로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성립시키고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隣榮)을 「십삼도창의총대장(十三道倡義總大將)」으로 추대하였다.72) 이에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로서「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성립된 것이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이인영(李麟榮) 총대장(總大將)은,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에 의하면, 1907년 음력 11월 각 의병부대에 도별(道別)로 진명(陣名)을 내리고 지휘체계를 다음과 같이 정비하였다.73)

십삼도창의총대장(十三道倡義總大將) 이인영(李麟榮)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전라도) 문태수(文泰洙)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충청도) 이강년(李康年)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 (경상도) 신돌석(申乭石)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경기도·황해도) 허 위(許蔿)·(아장(亞將)) 박정빈(朴正斌)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강원도)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 (평안도)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함경도) 정봉준(鄭鳳俊)

 

각 의병부대는 또한 「창의유진소(倡義留陣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예컨대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는「전라창의유진소(全羅倡義留陣所)」라고 불리우고 그 의병장 문태수(文泰守)는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개월 후인 1908년 1월 초순(음력 전년 12월)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편성을 위의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와는 약간 달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74)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총대장(總大將) 이인영(李隣榮)

군사장(軍師長) 허 위(許蔿)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민긍호(閔肯鎬)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 이강년(李康年)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 박정빈(朴正斌)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 정봉준(鄭鳳俊)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는 이 조직구성을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조직으로 취하였다.75)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가 기록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조직에는 새로이 <군사장(軍師長)>의 직책이 나타나고 여기에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허위(許蔿)가 선임되고 있다. 그리고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에는 황해도 의병장이었다가 이인영의 관동창의대진소(關東倡義大陳所)의 우군장(右軍將)으로 편입되어 있던 권중희(權重熙)가 선임되었다. 또한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이 신돌석(申乭石)으로부터 박정빈(朴正斌)으로 교체되고 있으며,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문태수(文泰守)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76)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실제의 내부 구성은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허위(許蔿) 의병부대,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이강년(李康) 의병부대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이인영 의병부대와 허위 의병부대가 골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밖의 각도 의병장은 주로 이인영 의병부대와 허위 의병부대의 차급(次級) 의병장이나 막료를 출신도를 고려하여 도별(道別)로 창의대장(倡義大將)에 임명해서 <전국십삼도(全國十三道)>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예컨대, 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 방인관(方仁寬)은 이인영의 격문에 응하여 8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인영 의병부대 (관동창의대진소(關東倡義大陣所))의 좌군장(左軍將)으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이었으며,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 정봉준(鄭鳳俊)은 이인영의 격문에 응하여 80명의 의병을 이끌고 역시 이인영의 관동창의대진소(關東倡義大陣所)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활동하던 의병장이었고,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는 이인영부대(관동창의대진소(關東倡義大陣所))의 우군장(右軍將)으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이었다. 또한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 박정빈(朴正斌)은 허위(許蔿) 의병부대의 아장(亞將)이었으며, 허위(許蔿)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에 선임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신있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에 기록된 1907년 음력 11월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隊陣所)의 처음의 각 도 의병장은 이때 실제로 양주(楊州)에 도착된 의병장 뿐만 아니라 이인영(李麟榮)의 의병통일을 호소하는 격문에 호응 회신을 보내온 미도착(未到着) 의병장들도 포함해서 선임된 조직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개월 이상을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양주(楊州) 근방에 이동하며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신돌석(申乭石) 의병장과 문태수(文泰守) 의병장은 양주(楊州)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일제의『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의 이 시기 기록을 보면 신돌석(申乭石)은 여전히 일월산(日月山) 부근에서, 문태수(文泰守)는 장성(長城)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성립 1개월 후인 1907년 12월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조직 구성에 대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기록에서 신돌석(申乭石)과 문태수(文泰守)가 제외된 것은 서울진입탈환작전(進入奪還作戰)을 전개하기 위하여 전국연합 의병부대가 출진(出陣)할 때까지 이 중요한 두 의병장이 양주(楊州)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기록된 전국(全國)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각도(各道) 의병장(義兵將)들은 그들이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기 직전까지 대진소(大陳所)에 실제로 도착한 의병장들만 도별(道別)로 배정된 것이었다.

 

또한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라 할지라도 당시 전국(全國)의 무수한 의병부대들을 총연합하여 총지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전국 각지방에는 수많은 의병부대들과 의병장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이인영(李麟榮) 의병장의 의병통일 격문(檄文)에 찬성한 경우일지라도 각지의 일본군과 싸우는 조건에 따라 즉각 진지(陣地)를 떠나서 경기도 양주(楊州)로 집합할 처지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구성한 큰 의병부대는 주로 <중부지방(中部地方)>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①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② 허위(許蔿) 의병부대 ③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 ④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등 4대 의병부대이었으며, 나머지 각도 의병부대와 창의대장들은 그들의 연합의병부대(聯合義兵部隊)가 <전국적(全國的)> 연합임을 상징화시키기 위하여 이 4대 의병부대 내의 다음 서열의 의병장들을 주로 출신도별로 각도(各道)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배정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77)

 

한편 일제헌병대(日帝憲兵隊)의 자료에는「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기 직전인 1907년 음력 12월말의 조직 구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이 있다.78)

십삼도창의총대장(十三道倡義總大將) 이인영(李麟榮)

군사장(軍師長) 허 위(許蔿)

호서장(湖西將) 이강년(李康年)

진동장(鎭東將) 이태영(李泰榮)

안무장(安撫將) 김춘(준)수(金春(俊)洙)

대대장(大隊長) 연기우(延基羽)

 

일제헌병대의 이 기록은 십삼도창의대장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전체의 조직구성이 아니라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출진한 선봉대(先鋒隊)의 조직체계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과 같은 과정으로 1907년 말에 전국 연합의병부대로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성립되어 서울진입·서울탈환 작전을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

 

4.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삼산전투(三山戰鬪)·마전전투(麻田戰鬪)와 의병전쟁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는 그 성립과정에서와 서울진입·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기 이전에도 일본군(日本軍)과 여러차례 접전(接戰)하여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이중에서도 대표적 의병전쟁이 1907년 양력 11월 7·8일에 있었던 <삼산전투(三山戰鬪)>와 <마전전투(麻田戰鬪)>였다.

 

이인영(李隣榮)의 지휘아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이인영 의병부대가 경기도 지평(砥平)에 도착한 직후 다른 곳에서도 이인영의 격문에 호응하여 각지 의병장들이 의병부대들을 이끌고 지평(砥平)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단 지평(砥平)에서 모여 다시 양주(楊州)로 가서 서울로 향하려고 하였다. 이 때 의병부대들은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상동면(上東面) 삼산리(三山里), 단천리(丹川里), 산매실동(山梅實洞) 등 각처에 주둔하여 부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79) 이들의 숫자는 처음에는 이인영(李麟榮)의 인솔하에 약 1천명이었으나,80) 곧 2천명으로 증가했으며,81) 각지에서 의병부대들이 모여든 결과 약 5천명에까지 달하게 되었다.82) 의병부대들은 서울로 통하는 도로선에 있는 송용동(松用洞), 이운리(伊雲里), 판관대동(板館垈洞)에 20∼30명씩의 보초(步哨)를 세우고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면서 양주(楊州)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83)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를 비롯하여 각지 의병부대들이 지평군(砥平郡) 삼산리(三山里)에 대규모로 집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군(日本軍)은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를 출동시켰을 뿐 아니라 서울로부터 적창(赤倉) 대위가 인솔하는 토벌중대(討伐中隊)를 파견했으며,84) 11월 6일에는 판부(坂部)소좌가 인솔하는 1개중대(中隊)와 산포대(山砲隊)까지 출동시켰다.85) 그리하여 지평군(砥平郡) 삼산리(三山里) 일대를 약 5백명의 일본군(日本軍)이 출동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86)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를 비롯하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障所)를 수립하려고 모여든 각지 의병부대 5천명은 1907년 양력 11월 7일 오전 9시부터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찾아온 일본군(日本軍) 대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연합의병부대는 숫적으로 우세했으며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으므로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여 이들을 패주시키었다. 일본군은 의병부대를 도저히 「토벌」할 수 없자 오전 9시∼11시 사이와 이튿날 오후 1시∼3시 사이의 의병 「토벌」 작전에서는 이색적으로 산포대(山砲隊)를 내세워 산포(山砲)의 포격(砲擊)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가 만 2일간 전개되었다.

11월 7일 오전 9시로부터 11시에 지(至)하는, 그리고 8일 오후 1시로부터 3시 사이에 지평방면(砥平方面)에서 산포(山砲)의 포성(砲聲)이 있었다. 생각컨대 권부대(權部隊)가 폭도(暴徒)를 포격(砲擊)한 것이다.87)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연합의병부대도, 일본군의 추산에 의하면 약 200∼3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88) 이것이 <삼산전투(三山戰鬪)>인바, 의병전쟁 중에서 매우 규모가 크고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후에 탄약(彈藥)을 구입하려고 서울에 잠입했다가 일제에게 체포된 의병장 김훈(金壎)은 삼산전투(三山戰鬪)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허위급(許蔿及) 이인영(李麟榮)과 행동(行動)을 공(共)히 하던 간(間)에 일본군(日本軍)과 충돌(衝突) 전투(戰鬪)한 일이 수십회(數十回)인 바, 취중(就中) 지평군(砥平郡) 삼산(三山)에서 전투(戰鬪)하였을 시(時)는 의병(義兵)의 수(數) 약 5천명, 일본병(日本兵) 약 5·6백명으로 다수(多數)의 사상자(死傷者)를 출(出)한 대충돌(大衝突)이었다.89)

 

연합의병부대는 이틀간의 치열한 삼산전투(三山戰鬪)에서 일본군을 쳐 물리치고 11월 8일 밤 어둠을 타서 연합의병부대를 부대별로 나누어 삼산(三山) 부근에서 철수해서 여러 갈래의 길로 목적지인 양주(楊州)를 향하여 이동하였다.

지평(砥平)에서 <삼산전투(三山戰鬪)>가 전개되고 있던 무렵에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약 1천명의 병력으로 마전읍(麻田邑)의 서남쪽인 두일성(斗日城) 천신면(川新面) 쪽으로부터 진출하여 1907년 양력 11월 8일 마전읍(麻田邑)을 포위해서 오전 10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日本軍) 마전헌병대(麻田憲兵隊)를 섬멸하고 마전읍(麻田邑)을 점령(占領)하였다.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8일 낮을 마전읍(麻田邑)에서 일본군과 친일잔당을 소탕하면서 지내다가 일본군(日本軍) 금화수비대(金化守備隊)가 찾아오자 이를 격퇴한 다음 날이 어두워지자 야습(夜襲)을 염려하여 부근의 산악으로 철수하였다.90) 이것이 <마전전투(麻田戰鬪)>였으며, 일본군이 참패하고 의병부대가 크게 승리한 전투였다.

 

일본군은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이튿날에도 마전(麻田)을 공격하여 점령(占領)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철원헌병대(鐵原憲兵隊)에까지 긴급 구원을 요청한 형편이었다.

본월(本月) 8일 야(夜) 마전헌병분견소(麻田憲兵分遣所)로부터 철원헌병분견소(鐵原憲兵分遣所)에 급사(急使)로써 응원(應援)을 구래(求來)한 그 정보(情報)에 왈(曰) 마전(麻田) 부근에 약 1천의 폭도(暴徒)가 있다. 8일야(日夜) 또는 9일효(日曉) 마전(麻田) 읍내(邑內)에 내습(來襲)하려 하는 초미(焦眉) 급(急)에 임박(臨迫)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헌병중위(憲兵中尉) 태전청송(太田淸松)은 부하 20명 및 철원수비대(鐵原守備隊)로부터 하사졸(下士卒) 5명을 인솔하고 9일 오전 7시 급행(急行) 마전(麻田)으로 향하여 익(翌) 10일 중위(中尉) 및 하사(下士) 1명만 귀소(歸所)하였다.91)

이 밖에도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와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가 지평(砥平)과 양주(楊州)로 집결하는 행군(行軍)과정에서 일본군(日本軍) 수비대(守備隊)와 접전한 수많은 전투들은 독립논문이 필요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 거론할 수 없어 생략한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려고 경기도 안에 들어온 의병부대들과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한 후 서울을 향해 진군(進軍)한 의병부대들은 대규모 전투이라면 <서울진입·서울탈환작전>이 목표이므로 대규모 전투를 삼가고 도처에서 소규모의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였다. 의병부대들이 소규모의 편대를 만들어 갑지(甲地)에 출현했는가 하면 바로 을지(乙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고 사라지며, 동(東)에 번쩍 나타났다가 서(西)에 번쩍 출몰하는 유격전에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의병부대들의 이러한 유격전은 당시 한국 농민들의 의병전쟁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성원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일제 경찰은 한국 의병부대들의 유격전(遊擊戰)의 실태와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명을 올리는 보고를 하였다.

 

관내(管內) 폭도(暴徒)의 동세(動勢)에 대해서는 불절(不絶)히 정찰(偵察) 경계(警戒)하고 있으나, 피등(彼等)은 항상 아군대급(我軍隊及) 경찰(警察)의 극(隙)을 규(窺)하여는 각처(各處)에 출몰(出沒)하여 금일(今日) 갑지(甲地)에 횡행(橫行)하다가 명일(明日)에 지(至)하면 홀연(忽然)히 을지(乙地)에 집합(集合)하여 변환출몰(變幻出沒)이 포풍(捕風) 제운(提雲)의 감(感)이 있다. 특히 피등(彼等)은 지방(地方)의 지리(地理)에 정통(精通)하므로써 아토벌대(我討伐隊)가 향(向)할 시(時)는 간도(間道)로 1일(日)에 10리(里)(한리(韓里) 100리(里))혹은 15·6리(里)의 먼 지방(地方)에 도주(逃走)하여 그 종적(踪跡)을 감추고 또 피등(彼等)은 항상 각 일본군대급(日本軍隊及) 주류지(駐留地)에 행상인(行商人) 혹은 각종 방법(方法)으로써 밀정자(密偵者)를 출(出)하여 시종(始終) 아군대경찰(我軍隊警察)의 행동(行動)을 통보(通報)하는 등사(等事)가 있다.92)

 

각도 의병부대들이 경기도 지평(砥平)·양주(楊州)에 모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와 그 편성 후 서울을 향(向)하여 진군(進軍)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싸움과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을 많이 전개했는가를 위의 일제 보고에서도 알 수 있다. 일제의 자료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편성된 이후 이들 의병부대들이 서울진입(進入)을 위하여 동대문(東大門) 밖 30리(里)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日本軍)과 전투(戰鬪)한 횟수를 38회라고 추산하였다.

장차 경성(京城)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리(里)의 지점(地點)에 도달하였다. 차간(此間) 전투(戰鬪) 38회(回)에 미치었다.93)

 

여기서 우리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의병연합부대가 서울진입작전·서울탈환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삼산전투(三山戰鬪)·마전전투(麻田戰鬪) 등 대규모 전투들과 함께 수많은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면서 혈전(血戰) 속에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고 혈전(血戰) 속에서 서울탈환작전을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의병연합부대가 서울 동대문(東大門)밖 30리(里) 지점에 도달하기 이전까지의 수많은 혈전(血戰)과정에서 이미 탄약(彈藥)이 고갈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편성되기 시작할 무렵에 양근(楊根) 지방에서 의병운동을 취재한 영국 『데일리 매일(The Daily Mail)』지 기자 맥켄지(F.A. McKenzie)가 이미 의병의 무기(武器)의 절대적 부족과 열악성을 보도하고 특히 탄환(彈丸)의 결핍을 지적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94)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들이 다시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에 도달하기까지 38회(回)의 크고 작은 격전을 치루었으니 그들의 탄환(彈丸)의 결핍이 얼마나 심각했었을지는 추정되고도 남음이 있다.

 

5. 제(第) 1 차(次)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는 편성대오가 갖추어지자 서울탈환작전을 시작하여 총대장 이인영(李麟榮)과 군사장 허위(許蔿)등은 연합의병부대에게 서울을 향한 진군령(進軍令)을 내리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입(進入)의 목적은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를 타격(打擊)하고 그와 담판(談判)을 지어 <을사5조약>, <정미 7조약> 등을 파기해서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시에 사기(士氣)를 고(鼓)하야 경성진향(京城進向)의 영(令)을 발(發)하니, 그 목적은 입경(入京)하야 통감부(統監府)를 타격(打擊)하고, 성하(城下)의 맹(盟)을 성(成)하며, 종래의 소위 신협약(新協約) 등을 파(破)하야 대대적(大大的) 활동(活動)을 기도(企圖)함이라.95)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은 서울진입(進入)의 목적이 「우리의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독립(獨立)을 공고히 하며」「그 후 간신(奸臣)을 살륙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일제 헌병) 너의 주로하는 창의(倡義)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이인영)「복아국권공고독립(復我國權鞏固獨立)」으로서, 그렇게 한 후 간신(奸臣)을 살륙(殺戮)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96)

 

한편 이인영(李麟榮) 총대장의 참모장(參謀長)을 지낸 김훈(金壎)은 서울진입작전의 목적이 「오적칠간(五賊七奸)의 일파를 주살하고 국권(國權)을 회복한 후 의병(義兵) 중에서 인물(人物)을 선임(選任)하여 정부(政府)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동인(同人)은 강개비분한 태도를 시(示)하고 현금(現今)의 시태(時態)인 즉 한국(韓國)은 오직 명의(名義) 뿐으로 그 국가(國家)의 실권(實權)은 총(總)히 일본(日本)에게 탈취(奪取) 당하기에 지(至)한 것은 필경 오적칠간(五賊七奸)의 처위(處爲)라 하고 분만하면서 우리 의병(義兵)은 피등(彼等)의 일파(一派)를 에하고 국권(國權)을 회복(恢復)한 후 의병중(義兵中)에서 인물(人物)을 선임(選任)하여서 정부(政府)를 조직(組織)할 기망(企望)이라고만 방언(放言)하여 자약(自若)하였다.97)

 

위의 세가지 자료에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의 목적을 정리해 보면, 서울에 진입(進入)해서 ① 통감부(統監府)를 타격하여 굴복시키고 ②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의 파기를 달성하여 ③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④ 5적(賊) 7간(奸) 등 매국노들을 처단한 다음 ⑤ 의병(義兵) 중에서 인물(人物)을 선임하여 신정부(新政府)를 조직(組織)해서 ⑥ 자주독립(自主獨立)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의 목적이 서울을 군사적(軍事的)으로 점령한다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유리한 정치적 위치에서 국권회복(國權恢復) 문제에 대하여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와 담판(談判)을 하려는 정치적(政治的) 목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는 이러한 작전목표 아래 서울탈환작전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심복을 잠입시켜 각국영사관(各國領事館)을 순방케 해서, 일제(日帝)의 불의(不義)를 성토하고 의병(義兵)은 순연한 애국혈단(愛國血團)이니 열강(列强)도 의병을 국제공법(國際公法)상의 전쟁단체(戰爭團體)로 인정하여 한국의병(韓國義兵)들의 활동을 성원(聲援)해 줄 것을 요청하는 요지의 통문을 돌리었다.

위선 복심인(腹心人)을 견(遣)하야 경성(京城)에 잠입(潛入)하야 각국(各國) 영사관(領事館)을 순방(巡訪)하고 통문(通文) 일도(一度)씩을 정여(呈與)하니 그 개의(槪意)는 일본(日本)의 불의(不義)를 성토(聲討)하고 한국(韓國)의 조우(遭遇)를 상진(詳陳)하고 차(且) 의병(義兵)은 순연(純然)한 애국혈단(愛國血團)이니 열강(列强)도 차(此)를 국제공법상(國際公法上)의 전쟁단체(戰爭團體)로 인(認)하며, 우(又) 정의(正義) 인도(人道)를 주장하는 국(國)의 동성응원(同聲應援)은 규(叫)하얏더라.98)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의병연합부대는 이러한 작전 목표 밑에 1908년 1월(음력 1907년 12월)군사장 허위(許蔿)가 약 300명의 선봉대(先鋒隊)를 인솔하여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 약 30리(里)의 지점에 도착하였다. 일제측 자료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때 허위(許蔿) 이강년(李康年)이 와서 합(合)하여 모두 48진(陣)에 약 1만에 달하였다. 허위(許蔿)를 군사(軍師)로 하고, 이강년(李康年)을 호서장(湖西將)으로 했으며,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鎭東將)으로 하고, 김춘(金春)(준(俊))수(洙)를 안무장(安撫將)으로 했으며, 연기우(延基羽)를 대대장(大隊長)으로 하였다. 장차 경성(京城)에 진입(進入)하려고 하여 약 3리(里)(한리(韓里) 30리(里))의 지점(地點)에 도달(到達)하였다. 차간(此間) 전투(戰鬪)가 38회(回)에 미치었다.99)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의 선봉대(先鋒隊)가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 30리의 지점에 도착하면 뒤이어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인솔하는 후속의 본대(本隊)와 각도 창의대장의 의병부대들이 장사(長蛇)의 세(勢)로 서진(徐進)하면서 약속한 기일(期日)에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인영(李麟榮)과 각도의 창의대장(倡義大將)이 인솔하는 후속의 본대는 서진(徐進)했으므로 약속된 기일(期日)에 약속된 장소에 정확하게 도착하지 못했으며,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 의병부대의 본대(本隊)가 미처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許蔿)가 인솔하는 선봉대(先鋒隊)는 잠복중인 일본군(日本軍)의 선제공격을 받게 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선봉대(先鋒隊)만으로서는 화력(火力)의 부족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허위(許爲)의 선발대(先發隊)는 후속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치열한 전투(戰鬪)를 전개하다가 후속본대가 약속한 시기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으므로 일단 후퇴하였다.

 

군사장(軍師長)은 기(旣)히 군비(軍備)를 신속히 정돈하야 철통상사하매 일적(一滴)의 수(水)도 누(漏)할 극(隙)이 무(無)한지라. 이에 전군(全軍)에 전령(傳令)하야 일제진군(一齊進軍)을 촉(促)하야 동대문외(東大門外)로 진박(進迫)할새 대군(大軍)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서진(徐進)케 하고 씨(氏)가 삼백병(三百兵)을 솔(率)하고 선두(先頭)에 입(立)하여 문외(門外) 삼십리지(三十里地)에 진(進)하야 전군(全軍)의 내회(來會)를 사(俟)하야 일거(一擧)에 경성(京城)을 공입(攻入)하기로 계(計)하더니 전군(全軍)의 내집(來集)은 시기(時期)를 위(違)하고 일병(日兵)이 졸박(卒迫)하는지라. 다시간(多時間)을 격렬(激熱)히 사격(射擊)하다가 후원(後援)이 불지(不至)하므로 잉(仍)히 퇴진(退陣)하얏더라.100)

 

허위(許蔿)가 인솔하는 선봉대(先鋒隊)의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의 전투는 대격전(犬激戰)으로서,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에서는 이 전투에서 의병장 김규식(金奎植)과 연기우(延基羽)가 적의 탄환을 맞고 부상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후군(後軍)은 시기(時期)를 어기고 일병(日兵)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長時間) 사격(射擊)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 때 후원군(後援軍)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退陣)되었고,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起羽)가 모두 탄환(彈丸)을 맞았다.101)

 

박은식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이 원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세운 작전이며, 의병부대(義兵部隊)들이 모두 모이지 않았는데 일본군에게 탐지되어 퇴각(退却)하게 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은찬(李殷瓚)은 경기도 양근군(楊根郡)의 유생으로 맨 먼저 관동의병(關東義兵)의 깃발을 올렸으며, 그는 이인영(李麟榮)이 인망을 얻고 있다고 하여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수만 의병(義兵)들을 연합(聯合)하여 24진(陣)으로 나누어 경성(京城)을 진격(進擊)하기로 한 것은 모두 그가 세운 계책(計策)이였다. 각군(各軍)의 장령(將領)으로 이구채(李球采)·정봉준(鄭鳳俊)·원재덕(元在德)·신양집(辛良集)·채상준(蔡相俊)·김회수(金會洙)·김선우(金善宇)·유해붕(柳海鵬)·정대무(丁大武) 등과 같은 이는 다 그가 가려 임명하였다.102)

 

이에 군사장(軍師長)이 각로(各路)의 모든 의병(義兵)들을 어느 달, 어느 날 일제히 동대문(東大門) 밖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자신은 결사대(決死隊) 300명을 인솔하고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에 나아가서 모든 의병(義兵)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일인(日人)들이 이미 탐지(探知)하고 우리의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은 틈을 타서 달려와 엄습(嚴襲)하니 우리 군대는 드디어 퇴각(退却)하고 말았다.103)

 

허위(許蔿)의 300명의 선봉대(先鋒隊)의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에서의 전투를 일제측의 자료에서 찾아보면 『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에는 경기도(京畿道)의 1908년 1월분이 모두 소실(消失)되어 있고,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일본군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와 연천수비대(漣川守備隊)가 합동으로 1908년 1월 15일 경기도 동두천(東豆川)에서 300명의 의병(義兵)과 충돌하여 의병측에 80명의 전사를 입혔다」는 표를 게재하고 있다.104) 『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에서 이부분을 빼어버린 것을 보면 일본군(日本軍)도 큰 손실(損失)을 입은 것이 분명하며, 의병(義兵)과 일본군은 동대문(東大門)밖 30리 지점에서 전투(戰鬪)를 시작하여 의병이 후퇴하면서 동두천(東豆川)에 이르러 최후의 격전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일제측의 이 기록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의 선봉대(先鋒隊)의 전투기록이라면, 허위선봉대(許蔿先鋒隊)의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에서의 전투 일자는 1908년 1월 15일(음력 전년 12월 12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본대의 일부는 이인영(李麟榮)의 인솔하에 약 2,000명이 1908년 1월 28일(음력 전년 12월 25일)경에 마침내 서울 동대문(東大門)밖 30리(里) 지점에 대(隊)를 이어가며 도착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는 새해 음력 정월(正月)을 기해서 서울에 진입(進入)하여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와 승패(勝敗)를 결정지으려고 하였다.

(문:일제헌병대) 당시(當時) 경성(京城) 부근에 온 일이 있는가?

(답:이인영) 있다.

(문) 문외(門外) 2,3리(里)의 처(處)에 왔었다는 것이 사실(事實)인가?

(답) 한리(韓里) 30리(里)의 처(處)에 도착하였었다.

(문) 무슨 일이 있어서 왔었는가?

(답) 대(隊)를 연(連)하여 도착한 인원이 약 2천명이었다.

(문) 경성(京城)에 침입(侵入)할 목적이었는가?

(답) 정월(正月)을 기(期)하여 침입(侵入)할 작정이었다.

(문) 그대의 부(父)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너는 침입(侵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통감부(統監府)와 교섭(交涉)하고, 침입(侵入)한 이상 결사적(決死的)으로 승패(勝敗)를 결정할 각오였다

105)

 

그러나 이 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부친(父親)이 별세했다는 흉보(凶報)가 1908년 음력 1월 28일(음력 전년 12월 25일) 양주군내(楊州郡內)의 본진을 거쳐 이인영에게 통보되었다. 독실한 유학자(儒學者)인 이인영은 후사(後事)를 모두 허위(許蔿)에게 맡긴 후 망부(亡父)의 사안(死顔)을 보고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그날로 귀향하게 되었다.

동대문(東大門)의 쟁성(錚聲)이 재수하매 문경(聞慶) 본제(本第)로 그 부(父) 병몰(病歿)의 부음(訃音)이 돌래(突來)하는지라. 남천(南天)을 향하여 애곡(哀哭)을 발(發)하고 제장졸(諸將卒)을 회집(會集)하야 귀향종상(歸鄕終喪)의 지(旨)를 공포(公布)한 후 의군전체(義軍全體)의 승인(承認)을 불대(不待)하고 상(喪)에 분(奔)할새 후사(後事)는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씨에게 탁(託)하니라.106)

(문:일본헌병대) 부(父)의 사보(死報)를 접(接)하고서는 어떻게 했는가?

(답:이인영) 12월(月) 25일(日) 그 당일(當日) 출발(出發)하였다.

(문) 과연 편지를 받은 그날 출발(出發)했는가를 다시 묻는다.

(답) 확실히 그러하다.

(문) 그대는 그래도 대장(大將)으로서 다수(多數)를 거느리고 있던 자(者)가 편지를 받고 즉일(卽日)로 귀향(歸鄕)함에 대해서는 다른 이의(異議)를 말하는 자(者)가 없었는가?

(답) 나는 출발(出發) 때에 후사(後事)를 허위(許蔿)에게 위임(委任)하고 귀향하였다. 동인(同人)은 나의 참모장(參謀長)을 하고 있었다.

(문) 당시 너의 부르는 명칭(名稱)은 무엇이었는가?

(답)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문) 그 당시(當時) 그대 이하 인원(人員)은 얼마 정도였는가?

(답) 약 1만인(萬人)이었다.

(문) 후사(後事)를 허위(許蔿)에게 위탁(委托)했다고 말하지만 처음의 창의(倡義)의 생각을 단념한 것인가, 또는 망부(亡父)의 사안(死顔)을 보기 위하여 귀향(歸鄕)하고 다시 귀래(歸來)할 의지(意志)였는가 어떤가?

(답) 망부(亡父) 3년(年)의 상(喪)을 복(服)하는 것은 한국(韓國)의 습관(習慣)이므로 그 뜻을 허위(許蔿)에게 말하고 귀향(歸鄕)하였다.107)

 

여기서 좀더 주목해야 할 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총대장 이인영(李隣榮)이 <후사(後事)>를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위임(委任)했다는 사실의 <후사(後事)>의 내용이다. 그것은 이 연합의병부대의 지휘권을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위임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번의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을 일단 중지(中止)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라는 후사(後事)의 위임내용이 포함된 것이었다. 이것은 이인영(李隣榮)이 부상(父喪)에 귀향하면서 동시에 <의(義)>를 중지(中止)하라는 통문(通文)을 각진(各陣)에 배부 통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문:일본헌병대) 허위(許蔿)에게만 말을 남겼는가?

(답:이인영) 나는 그러한 경우에 있었으므로 통문(通文)으로써 의(義)를 중지(中止)할 것을 각진(各陣)에 배부(配付) 통지(通知)시켰다.108)

 

즉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을 중지(中止)하라는 통문(通文)을 각진(各陣)에 배부 통지하고 이를 잘 수습하라는 위임과 지휘권을 인계받아 군사장 허위(許蔿)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을 일단 중지하고 물러서도록 한 것이었다. 여기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 1차 서울탈환작전>은 일단 중지(中止)되고 의병부대들은 각각 본대의 유진소(留陣所)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종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의 중지(中止)의 원인에 대해서는 주로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유학적 <효(孝)> 사상을 해설하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설명되어 왔다. 즉 유생의 입장에서는 <효(孝)>를 온전히 하지 못하면 <충(忠)>도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으로서 <효(孝)>와 <충(忠)>, 국가(國家)의 대사(大事)와 일가(一家)의 내사(內事)는 깊이 고찰하면 동일(同一)한 것으로 귀착된다는 유학사상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그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그의 일제 헌병대에서의 응답이었다.

(답:이인영) 아병(我兵)은 타인(他人)도 지휘할 수 있다. 한국(韓國)의 풍속(風俗)으로서 부(父) 사망(死亡) 후상(喪)에 복(服)하는 것은 하나의 규칙(規則)이 되어 있다. 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불효(不孝)에 당(當)한다 부모(父母)에게 효(孝)하지 않는자는 금수(禽獸)와 같은 것이며, 금수는 폐하(陛下)의 신(臣)이 될 수 없기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심히 불충(不忠)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 : 일본헌병대) 그대는 국가(國家)의 대사(大事)와 일가(一家)의 내사(內事)의 경중(輕重)을 구별(區別)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답 : 이인영) 국가(國家)의 대사(大事)와 일가(一家)의 내사(內事)는 깊히 연구(硏究)하면 동일(同一)에 귀착(歸着)한다.109)

 

그러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일차 서울탈환작전의 중지(中止)의 이유를 부상(父喪)을 당한 유생 의병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귀향으로 설명해 온 것은 너무 지나치게 피상적 고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당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입작전이 실행되는 경우에도 무기(武器)·탄약(彈藥)의 부족과 기동력(機動力)의 부족으로 <승리(勝利)>의 전망이 매우 흐렸음을 의병장들이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허위(許蔿)가 인솔한 300명의 선발대(先發隊)가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치열한 전투를 하여 일본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했던 경험에서도 확인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도착된 후속부대도 기동력있게 대부대가 일시에 도착하여 전투(戰鬪)태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30명씩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장사(長蛇)의 형세로 천천히 진군해 왔으며, 장거리 강행군(强行軍)으로 병사들이 지치고 보급도 제대로 안되어 바로 전투에 들어가기에는 일정한 휴식기간과 대오 정비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었다고 본다. 이 위에 본격적인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이 시작되기 직전에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상보(喪報)는 당시 전투 개시 직전의 길흉(吉凶)을 매우 민감하게 따지던 관습과 의식에서는 연합 의병부대의 장병의 사기(士氣)를 크게 떨어뜨렸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은 부상(父喪)의 보(報)를 당하여 일단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을 중지(中止)토록 하고 지휘권을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에게 넘겨준 다음 귀향하면서 <일정한 기간(期間)>을 벌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러한 추론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가 귀향할 때 허위(許蔿)는 물론이요 측근의 의병장 아무도 그의 귀향을 말리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110)

 

이렇게 하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의 제 1차 서울탈환작전은 선봉대(先鋒隊)만 한번 치열한 전투(戰鬪)를 해 보고 본대는 진입작전을 실행하지 않은채 중지(中止)된 것이었다. 의병부대가 유격전만을 하지 않고 일본정규군(日本正規軍)과 정면전(正面戰)을 시도한 것은 전술상 잘못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111) 그러나 당시 서울 외곽에 2.000명의 의병이 도착하고 계속하여 모여들 의병 총수가 8천여명이 되었으며, 그 중에는 구군인(舊軍人)이 3,000명 정도 있었으므로 일전(一戰)을 벌여 서울진입작전을 감행해보지 못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6.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의 대응(對應)과 공작(工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이 기회에 의병운동을 극도로 약화시켜 종식시키려고 다각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운동을 비롯한 한국민족의 의병운동에 대한 일제의 이 시기의 대응과 공작의 주요 측면을 간단히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일본군(日本軍)(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을 집중 투입한 무력탄압(武力彈壓)을 특히 강화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이 중단된 후 의병부대들의 유격전은 추운 겨울철의 기상조건으로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중부지방의 산맥에는 살을 에이는 추위와 함께 횐 눈이 깊게 쌓여서 의병부대들은 은신도 어려웠고 이동과 공격도 어려웠다. 반면에 일본군은 눈발자욱에 따라 의병부대들을 추격하기가 용이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이용하여 일본군(日本軍)은 의병부대들에 대한 반격을 강화했으며 특히 실질적 전투력이 강한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대규모 「토벌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는 50∼60명의 소규모 부대로 편대를 분산시켜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주시키고 큰 승리를 여러차례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긍호(閔肯鎬)가 직접 거느린 87명의 소부대는 폭우·폭설의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1908년 2월 27일 오전 11시 원주(原州)의 강림(講林) 부근 박달산(朴達山)에서 일본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3시간 30분간 치열한 교전을 했으나 의병부대는 탄환(彈丸)이 고갈되고 화승총의 화약은 진눈깨비로 발화를 하지 않아 마침내 민긍호(閔肯鎬)는 탄환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112)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원들이 6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장 민긍호(閔肯鎬)를 구출하려고 일본군 토벌대의 본부(本部) 숙사(宿舍)를 포위 습격하자 당황한 일본군은 민긍호(閔肯鎬)를 현지에서 사살하고 패주하였다. 이부분을 일본군의 보고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일(一). 2월 29일 오후 5시 강림(講林)에 도착 숙영(宿營)하였다.

이(二).동야(同夜) 박달산(朴達山) 동북방으로부터 민긍호(閔肯鎬)의 좌우군(左右軍) 약 5,60명이 내습(來襲), 아대숙사(我隊宿舍)를 포위하고(약 50미터의 거리에 접근) 대성눌함(大聲喊) 맹사(猛射)를 시작하였다. 삼(三).아대(我隊)는 차(此) 적습(賊襲)을 당하여 거의 혼란(混亂)케 되었으나, 전원 결사(決死) 혹은 변소(便所) 혹은 정중(井中) 등의 장해물을 이용하여 맹렬히 응사하기 약 1시간에 적(賊)의 포위(包圍)를 해파(解破)하고 아(我) 일부(一部)는 해촌(該村) 서남고지(西南高地)로 반등(攀登), 일부(一部)는 해촌락중(該村落中)의 하구안(河溝岸)을 이용하여 격퇴에 크게 노력하였다. 적(賊)은 동(同) 11시경에 이르기 까지 연속(連續) 맹사(猛射)하면서 대호(大呼)하여 왈(曰), '아(我) 대장(大將) 민씨(閔氏)여 어딘가 그 있는 곳에서 성(聲)을 양(揚)하라' 하였다.

사(四). 차제(此際) 포박(捕縛)한 민긍호(閔肯鎬)는 도주(逃走)하려는 모양이므로써 부득이 사살(射殺)하였다.113)

.그밖에도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들은 모두 겨울 날씨와 이에 편승한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으로 어려운 조건에서 간고한 유격전 투쟁을 전개하였다.

 

둘째, 일본군(日木軍)은 마을 성원 중에 의병에 가담한 사람이 있거나 숙식(宿食)을 제공한 마을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을 살륙(殺戮)하고 마을 전체를 불질러 소각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것은 일본군(日本軍) 사령관(司令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며, 1907년 8월부터 시작하여 1908년 2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제측 자료도 이를 공공연히 인정하였다.

주차군사령관(駐箚軍司令官)은 명치(明治) 40년 9월 한국민일반(韓國民一般)에 대한 고시(告示)를 발하여 (‥‥‥) 만약 완고하여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비도(匪徒)에 참가하거나 혹은 이들을 은피(隱避)시키거나 혹은 흉기(凶器)를 은닉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엄벌(嚴罰)에 처하여 추호(秋毫)의 여유(餘裕)도 없게할 뿐 아니라 그 책임(責任)을 현범(現犯)의 촌읍(村邑)에 지워 부락(部落) 전체를 엄중하게 처치(處置)할 것을 효유(曉諭)하였다. 그러나 이들 폭도(暴徒)들은 그 복장이 양민(良民)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시불리(時不利)하면 무기(武器)를 버리고 양민(良民)으로 분장하여 우리의 예봉(銳鋒)을 피(避)하는 수단을 채택하며, 그리고 특히 사건(事件) 발생(發生) 초기에 있어서는 토민(土民)이 또한 그들 폭도(暴徒)에 동정(同情)하고 이를 비호(庇護)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토벌대(討伐隊)는 이상의 고시(告示)에 의거하여 그 책임을 현범(現犯)의 촌구(村區)에 돌려 주륙(誅戮)을 가(加)하고 또는 전촌(全村)을 소이(燒夷)하는 등의 조치를 실행하여 충청북도 제천(堤川) 지방 같은 곳은 거의 대부분 초토(焦土)가 되기에 이르렀다.114)

 

일본군의 이러한 마을주민에 대한 살륙(殺戮)과 마을 전체의 소각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작전을 전개하는 도중에도 일본군에 의하여 도처에서 자행되었다.115) 박은식에 의하면, 일본군(日本軍)의 살륙(殺戮)과 전촌락(全村落) 방화(放火)에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그중에서도 강원도의 고성군(高城郡), 원주군(原州郡)과 충청도의 충주군(忠州郡), 제천군(堤川郡), 문의군(文義郡), 황해도의 평산군(平山郡)이 피해가 가장 참혹하고 극심하였다.116) 그러나 일본군의 살륙과 방화는 이곳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출동한 전국에서 자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영국 『데일리 매일』지(紙)의 기자로서 1907년 가을에 서울을 출발하여 이천(利川), 충주(忠州), 제천(堤川), 원주(原州), 양근(楊根) 지방을 여행한 맥켄지(F.A. McKenzie)도 제천읍(堤川邑)을 비롯하여 그가 돌아본 모든 곳에서 일본군(日本軍)이 무고한 농민들에게 살인만행을 자행하고 촌락(村落) 전체를 불태워 마을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숨어있던 참상을 기록하였다.117) 일본군의 이러한 살인 방화 만행은 그들이 출동한 전국 도처에서 거리낌없이 자행되었다. 특히 의병(義兵)이 나온 집은 그 가옥(家屋)을 불질러 소각하고 이주한 곳까지 추적하여 다시 불지르며 그 가족을 학살하는 살인 만행을 모든 곳에서 자행하였다.

 

세째, 일제(日帝)는 의병(義兵)의 소재(所在)를 밀고(密告)하는 자에게 거액의 중상(重賞)을 주는 <밀고제도(密告制度)>를 장려하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여 의병의 색출을 추구하였다.

.주차군사령관(駐箚軍司令官)은(‥‥‥) 고시(告示)를 발하여(‥‥‥) 폭도(暴徒)를 잡거나 그 소재(所在)를 밀고(密告)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중상(重賞)을 준다. (‥‥‥)118)

일제의 밀고제도는 의병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비열(卑劣)한 제도로서, 일제는 무뢰배(無賴輩)들을 이용하여 이 비열한 제도를 널리 애용하였다.

 

네째, 일제는 일본 거류민과 일진회(一進會) 회원을 중심으로<자위단(自衛團)>이란 것을 각 면(面) 수준까지 조직하고 이를 무장시켜 의병(義兵)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들어 악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위단(自衛團)에 동원된 일본인(日本人)과 일진회(一進會)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이 계속하여 의병(義兵)들에 의해서 처단되었으므로 큰 효과는 얻지 못하였다.

 

다섯째, 황제 순종(純宗)의 조칙(詔勅)을 가진 선유사(宣諭使)를 도별로 각 지방에 파견하고, 또한 전 관리(官吏)를 동원하여 「의병(義兵)은 귀순(歸順)하여 해산(解散)하라」는 황제의 조칙(詔勅)을 전하면서 의병(義兵)들을 <회유> <귀순(歸順)>시키는 정책을 병용하였다. 일제는 백지의 「면죄증서(免罪證書)」「귀순증서(歸順證書)」119)를 각 지방에 보내어 이를 갖고 귀순하는 의병들은 죄를 불문에 붙인다고 설득하였다. 또한 주요 의병장(義兵將)들에게는 일일이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조칙(詔勅)을 전하고 「귀순(歸順)」을 권고 설득케 하였다.

 

예컨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에 대한 일제의 회유공작을 보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성립된 직후에 일제(日帝) 통감부(統監府)는 연합의병부대를 회유 해산시키기 위하여 장박(張博)을 매개로해서 이병채(李秉采)를 파견하여 허위(許蔿)를 회유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또 조운연(趙雲衍)을 파견하여 총대장(總大將) 이인영(李隣榮)과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를 접촉하도록 하였다.120)

 

또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이 중단된 이후에는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장 신기선(申箕善)을 매개로 해서 음력 2월 4일경 이병채(李秉采)와 조기홍(趙基弘)을 허위(許蔿)에게 파견하여 순종(純宗)황제의 귀순(歸順)하라는 조칙(詔勅)을 전하고 「귀순(歸順)」을 간곡하게 권고하였다.121)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가 이를 거부하자,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의 조종을 받던 신기선(申箕善)은 다시 허위의 옛 부하 이병채(李秉采)를 재차 파견했으나 허위(許蔿)는 이를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더우기 본인이 귀순(歸順)함으로써 일본(日本)의 압박(壓迫)이 그칠 것이 아니다. 본인은 즐겨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실로 일본(日本)의 압박(壓迫)에서 독립(獨立)하려는 것이므로 금후(今後)도 결코 귀순(歸順)할 뜻이 없다.122)

 

일제의 온갖 무력공격(武力攻擊)과 회유공작(懷柔工作)에도 굴하지 않고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를 비롯한 모든 의병부대들이 계속하여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불굴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7. 제(第)2차(次)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

 

종래 학계에서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은 이인영(李麟榮)의 지휘하에 제1차작전의 한번만 있었던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사실은 3개월 후인 1908년 4월말부터 5월말에 걸쳐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의 총지휘하에 <제(第)2차(次)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이 또 한 번 더 있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와 각도 창의대장(倡義大將)들은 <제1차 서울탈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각 자기부대를 인솔하여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대규모 병력의 기동력이 약하고 준비가 부족함을 경험한 의병부대들은 부대별로 특정지역에 근거지를 만들어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의병부대들의 서울진공(進攻)작전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1908년 4월에도 서울의 외곽 일대에 극도의 예민한 경계망을 폈다.123)

 

군사장 허위(許蔿)는 임진강(臨津江)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허위(許蔿)의 산하에는 조인환(曺仁煥)·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默)·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民)·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이은찬(李殷瓚)·김응두(金應斗) 등 다수의 의병장들이 모여서 긴밀히 지휘와 연락을 받으며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군률(軍律)을 정비하여 조금도 민폐가 없도록 하고, 물자의 공급은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의 보상을 약속하고 교환하였다. 이때문에 의병(義兵)과 농민(農民)들 사이에 더욱 굳은 단결(團結)과 연대(連帶)가 이루어져서 허위(許蔿) 의병부대를 비롯한 경기도·황해도 일대의 의병은 더욱 강력하게 되었다. 일제의 북부수비관구(北部守備管區) 사령관(司令官)이 직접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허위(許蔿) 의병부대를 토벌하려고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패퇴(敗退)하였다. 일제측 사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전년 임진강(臨津江) 유역에 출몰했던 폭도(暴徒)의 수괴는 강원도 방면으로부터 침입한 조인환(曺仁煥) 및 적성(積城) 출신의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默)의 무리에 불과했으나, 본년에 들어서면서 정계(政界)의 실각자 전참정(前參政) 허위(許蔿)를 총수괴(總首魁)로 하여 박종한(朴宗漢), 김수민(金秀民), 김응두((金應斗), 이인영(李寅榮) 및 이은찬(李殷瓚)의 무리가 경기도 혹은 강원도로부터 각기 부하 약간을 인솔하고 서로 투합(投合)하여 임진강 유역 일대에 출몰 겁략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허위(許蔿)는 배일(排日)을 구실로 하여 정의(正義)를 표방하고 또 군률(軍律)을 규정(規定)해서 겁탈포려(劫奪暴戾)를 경계한다고 하지만, 그 내정(內情)에 있어서는 조금도 종래의 폭도(暴徒)와 다름이 없다. 즉 군표(軍票)를 발행해서 물자(物資)의 조판(調辦)을 뜻대로 하면서 말하기를 '표(票)는 모부호(某富豪)에게 가서 전재(錢財)와 교환(交換)하여라'고 하고 만약 그 태환(兌換)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타일(他日)에 보복하여 해(害)를 입힌다는 상태에 있다.124)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임진강 유역에서 소규모의 부대를 다수 편성하여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진지를 끊임없이 기습하고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통신(通信)을 마비시켰으며 부근 각지의 일제 관공서 및 일본인 관리들과 친일파를 소탕하였다. 임진강 일대는 한때 허위(許蔿) 의병부대의 군정(軍政) 아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허위(許蔿) 총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의병(義兵)의 군량(軍糧)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일제 통감부에의 납세(納稅)와 미곡(米穀)의 반출은 엄격히 금지되었다.125) 일제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임진강(臨津江) 유역에 있어서 수괴 허위(許蔿)는 누차 통고문(通告文)을 발하여 납세(納稅) 또는 미곡반출(米穀搬出)의 정지(停止)를 명령하고 군자식량(軍資食糧)의 징발을 하며, 혹은 한인순사(韓人巡査)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에 협박장(脅迫狀)을 보내고, 통신선로(通信線路)의 저해(阻害), 관공서(官公署)의 습격 등 도량(跳梁)이 심하였다.126)

 

허위(許蔿) 등은 <제2차 서울탈환작전>에 재거(再擧)할 계획으로 ① 의병(義兵)을 증모(增募)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② 무기(武器)와 화약(火藥)을 구입하기 위하여 김창식(金昌植)·한원태(韓元泰)·이계복(李啓福)·이기상(李起商)을 서울에 비밀리 파견했으며,127) 의병장 김규식(金奎植)을 인천(仁川)에 잠입시키기도 했고,128) ③ 무기(武器)·탄약(彈藥) 등의 구득과 군사원조를 얻기 위하여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밀사로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했으며,129) ④ 군량(軍糧)을 비밀리에 비축(備蓄)했고,130) ⑤ 부하 의병장을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시켜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의 내응을 준비하도록 하였다.13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허위의 의병증모와 군사훈련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적성(積城) 감박산(甘朴山) 중에 의병(義兵) 수천명이 둔취(屯聚)하여 매일 기예(技藝)를 연습하고 기계(器械)를 제조하는 중이라더라.132)

또한 일제자료는 의병(義兵)의 재거(再擧)준비 정보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수원경찰서장(水原警察署長) 보고(報告)(4월 4일자)

일(一). 양성군(陽城郡) 내(內) 폭도(暴徒) 재기(再起)의 풍설이 전하여지자 동군수(同郡守) 이원철(李源喆)은 그 실현될 것을 두려워 동군(同郡) 소사(素砂)에 피난(避亂)하였다.

이(二). 3월 28일 폭도(暴徒)는 양성군(陽城郡) 승양원(升良院) 면장(面長) 앞으로 좌(左)의 의미의 통문(通文)을 교송(交送)하였다. 따라서 인심동요(人心動搖)의 색(色)이 있다. 동지(同地) 주재순사(駐在巡査)는 그 오해(誤解)를 설유(說諭)함과 공(共)히 일면 통문(通文)의 출처를 수색하고 있다.

① 세금(稅金)을 관아(官衙)에 납부(納付)하지 말 것.

② 관내(管內)의 산미(産米)를 타(他)에 수출(輸出)하지 말 것.

③ 일진회(一進會)를 해산(解散)시킬 것.133)

 

또한 의병부대(義兵部隊)들의 군량미(軍糧米)의 비축(備蓄)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중에 일제에게 발각된 하나의 사례를 들면, 허위(許蔿) 휘하의 한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백석면(白石面) 홍동(弘洞)에 군량미 346石을 비축하였다가 그중 200여석을 수색당하였다.

본일(15일) 양주군(楊州郡) 백석면(白石面) 해유리(蟹踰里) 방면(方面)의 정찰(偵察)에 향하였다. 우연히 동지(同地)에서 폭도(暴徒)의 일단(一團)과 상회(相會)하여 즉시 포화(砲火)를 개(開)하여 맹렬한 사격(射擊)을 가하고 이어 돌격(突擊)으로 옮겨 참모장(參謀長) 유봉길(柳鳳吉)외 5명을 생금(生擒)하였다. 나아가 피등(彼等)의 장닉(藏匿)하는 양미(粮米)의 소재(所在)를 수색(搜索), 차(此)를 발견(發見)하였다. 백석면(白石面) 홍동(弘洞)에 저장(貯藏)한 346석(石)중 145석(石)은 이미 타(他)에 지거(持去)하고, 200석여(石餘)는 현재(現在)하므로써 차(此)를 압수(押收)하고, 다시 동면(同面) 난곡(蘭谷)에서 136석(石)을 발견(發見), 이를 압수, 운반 중이다.134)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는 일단 분산된 각도 의병부대들의 전열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위한 전국 의병부대들의 재봉기와 경기도에의 집합을 각도 창의대장(倡義大將)들과 협의하였다. 군사장 허위(許蔿)는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의 전사로 타격을 받았으나 그 대신,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등이 친일파 외부고문겸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 촉탁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일어나 보도됨으로써 이를 보상하고 재거의 결정에 격려를 준 것으로 보인다.135) 군사장 허위(許蔿)는 전사한 민긍호(閔肯鎬)를 제외한 각도 창의대장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 1908년 4월 21일 전국(全國) 13도(道) 의병(義兵)의 재거(再擧)를 요청하는 통문(通文)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의병장(義兵將)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이인영(李麟榮)·유인석(柳仁錫)·박정빈(朴正斌) 제씨(諸氏)가 본월(本月) 21일에 속(速)히 기병(起兵)하라고 통문(通文)을 십삼도(十三道)에 발송(發送)하였다더라.136)

 

위의 보도에서 통문(通文)의 서명자로 나오는 의병장들 중에서 이인영(李麟榮)은 복상중(服喪中)이어서 은거(隱居)하고 있었고, 유인석(柳麟錫)은 평안도(平安道)에 있었으므로, 이 <통문(通文)>은 허위(許蔿)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서 발송한 것이 틀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통문(通文)에 서명한 의병장들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생존한 의병장들로서, 이것이 전국 연합의병부대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제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극비보고는 이것이 허위(許蔿) 등 위의 의병장들이 연합(聯合)하여 서울을 습격(襲擊)하려는 작전이라는 정보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일제통감에게 보고하였다.

.각도(各道)의 폭도(暴徒)는 경성부근(京城附近)에 잠복(潛伏)하여 불일(不日) 경성(京城)을 습격(襲擊)하려 한다는 풍설(風說)이 있다. 이를 적록(摘錄)하면 다음과 같다.

일(一). 허위(許爲)는 부하(部下) 천여명(千餘名)을 인솔하고 양주(楊州)·광주(廣州)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는 4·5리간(里間)에 있다.

이(二). 이강년(李康年)은 부하(部下) 5백명을 인솔하고 연천(漣川)·포천(抱川)으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는4·5리간(里間)에 있다.

삼(三). 유인석(柳麟錫)은 부하(部下) 천(千)명을 인솔하고 적성(積誠)·마전(麻田)으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는 4·5리간(里間)에 있다.

사(四). 박정빈(朴正斌)은 부하(部下) 6백명을 인솔하고 파주(坡州)·장단(長湍)으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는4·5리간(里間)에 있다.

오(五). 이인영(李寅永)은 부하(部下) 5백명을 인솔하고 고양(高陽)·양주(楊州)·시흥(始興)으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는 4·5리간(里間)에 있다.

육(六). 신재영(申載永)은 부하(部下) 4·5백명을 인솔하고 용인(龍仁)·과천(果川)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3·4리간(里間)에 있다.

이상의 비도(匪徒)는 본월(本月) 30일(日)까지에 통문(通文)을 비전(飛傳)하여 일거(一擧) 습래(襲來)의 계획(計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포풍착운(捕風捉雲)의 비어(蜚語)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37)

 

한국에 이주한 일본거류민(日求居留民)의 신문인 『경성일보(京城日報)』도 1908년 5월 1일자 보도에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유사한 내용으로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이인영(李麟榮)·유인석(柳麟錫)·박정빈(朴正斌)의 연명으로 속히 기병(起兵)하라는 격문(激文)이 전국에 발송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폭도(暴徒)의 수령(首領)으로서 각방면(各方面)에서 운동(運動)하고 있는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이인영(李麟榮)·유인석(柳麟錫)·박정빈(朴正斌) 등은 연명(連名)으로써 4월 21일 십삼도(十三道)에 향하여 속(速)히 병(兵)을 기(起)하라는 뜻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발송(發送)했다고 한다.138)

 

일제의 해주경찰서장(海州警察署長)의 그 후의 비밀 보고에서도 「폭도(暴徒)의 수괴(首魁)」들이 1908년 4월경에 창의통문(倡義通文)을 고안제조(考案製造)하여 재거(再擧)의 기획(企劃)을 했다」139)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일제 경시총감(警視總監)이 입수한 정보처럼 의병장들이 이미 서울을 포위하여 4·5리 밖에 이미 진을 친 것은 첩보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와 유사한 계획(計劃)을 가지고 1908년 4월 21일 허위(許蔿)가 중심이 되어 위에서 든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이인영(李麟榮)·유인석(柳麟錫)·박정빈(朴正斌) 등 의병장들의 연명(連名)으로 기병(起兵)의 격문(激文)(통문(通文))을 13도 전국에 발송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의병들의 관점에서는 경기도(京畿道) 일대는 허위(許蔿) 의병부대(義兵部隊)의 관할구역이었으며,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이 실패로 끝난 후인 1908년 2월∼3월은 서울 근교(近郊)에는 의병(義兵) 출몰의 보고나 보도가 별로 없었는데 비하여, 4월∼6월에 걸쳐 갑자기 다시 소부대의 의병들이 출현하여 바로 서울의 성(城) 밑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것은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다시 서울진입작전(進入作戰)을 시도하여 소부대별로 의병들을 서울근교(近郊)에 진출시키고 위에서 든 격문(檄文)을 전국에 발송하여 대공격을 기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제1차 작전 실패(失敗)의 경험에 비추어 <비밀(秘密)>리에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측 자료를 보면, 1908년 1월∼3월까지 거의 퇴조했던 의병운동이 1908년 5월에 들어 정세가 일변(一變)하여 의병봉기 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최고조(最高潮)의 치성(熾盛)을 보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명치(明治) 41년(1908) 초두(初頭)에 있어서 폭도(暴徒)의 정세는 전년(前年) 추동(秋冬)의 경(傾)부터 귀순권장(歸順勸奬), 토벌여행(討伐勵行)의 결과 전년(前年) 말(末)부터의 추세를 계속하여 점차 정온(靜穩)의 역(域)에 향하였다. 각월(各月) 충돌폭도(衝突暴徒)의 총수는 1월에는 약 9천명, 2월에는 겨우 1,900여명이 되었다. 폭도(暴徒)의 집단(集團)도 역시 개략 수명(數名) 내지 수십명(數十名)이 되었다. 드물게 100명 이상의 대집단(大集團)이 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기왕에 비교하면 그 출몰(出沒)이 크게 감소(減少)하였다‥‥적세(賊勢)가 크게 돈좌(頓挫)하여 일시(一時) 사람들로 하여금 평정(平定)의 시기(時期)가 가까워졌음을 생각케 하였다. 그러다가 3월 하순에 한국정부 고문겸 통감부(統監府) 촉탁 미국인 스티븐스씨가 미국에서 배일주의(排日主義)의 한인(韓人)에 살해(殺害)되고 그 보도가 한국내(韓國內)에 전해지자 이것이 동기(動機)가 되어 형세일변(形勢一變)해서 적세(賊勢)가 다시 격증(激增)하고 폭도봉기(暴徒蜂起) 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갖게 되었으며 심하게는 그 소요구역(騷擾區域)을 확대(擴大)하고 5월에는 이미 아수비대급(我守備隊及) 헌병(憲兵)등과 충돌(衝突)한 폭도(暴徒)의 총수가 1만 1,400명에 달하게 되었다.140)

 

일제측의 자료를 보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 휘하의 의병장 김용태(金容泰)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내에서 다수의 의병(義兵)들을 모아놓고 오는 음력 4월 15일 경에 <서울>을 습격하겠다고 그에 필요한 병기(兵器)를 징발하였다.

 

융희(隆熙) 2년 4월 3일

광주군내(廣州郡內)에(동명미상(洞名未詳)) 폭도(暴徒) 다수(多數)를 집합(集合)하고 내(來) 한력(韓曆) 15일경 경성(京城)을 습격(襲擊)할 지(旨) 적도(賊徒) 김용태(金容泰)(연령 42세가량으로 일안(一眼)을 실(失)한 자)라는 자(者)로 누차 최마장(崔馬場)(독도(纛島)로부터 동남방(東南方) 약 10정(町) 가량)에 내(來)하여 양언(揚言)하고 또 기시(其時) 필요(必要)하다고 하여 병기(兵器) 등을 징발(徵發)하고 있는 모양. 수사경계중(搜査警戒中).

 

헌병대장(憲兵隊長)(4월 4일)

경기도(京畿道) 광주군내(廣州郡內)에 다수(多數)의 폭도(暴徒)를 모아 경성(京城)을 습격(襲擊)하겠다고 양언(揚言)하였다 한다. 그 거괴(巨魁)는 김용태(金容泰)라는 자(者)이라고 한다.141)

 

허위(許蔿)가 지휘하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휘하의 의병들은 제2차 서울진입(進入)작전의 일환으로 우선 서울로의 물화(物貨)의 공급을 차단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4월 2일 허위(許蔿) 의병부대에 속한 박래병(朴來秉)이 인솔하는 약 1백명의 의병부대가 한강(漢江)을 통한 서울로의 물자수송을 차단하기 위하여 양주군(楊州郡) 와공면(瓦孔面) 덕소(德沼)에 진을 치고 서울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선박(船舶) 8척을 소각했으며, 물자들을 압수하였다.142) 또한 허위(許蔿) 의병부대에 속한 장계환(張桂還)의 지휘하에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는 ① 양주군(楊州郡) 덕소(德沼) ② 가평군(加平郡) 고치(枯峙) ③ 춘천군(春川郡) 신소강(新所江)에 각각 50명의 의병부대를 배치하여 일본군(日本軍)의 수륙운수(水陸運輸)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수괴(首魁) 장계환(張桂還)은 동지방(同地方)의 물자(物資) 수출(輸出)을 두절(柱絶)하기 위하여 양주군(楊州郡) 덕소(德沼), 가평군(加平郡) 고치(枯峙), 춘주군내(春州郡內) 신소강(新所江)에 부하(部下) 약 50명씩을 파견하여 수륙운수(水陸運輸)를 방해(妨害)하고자 하여 4월 10일부터 실시(實施)한다는 소문(所聞)이 있다. 또 저들은 4월 중순(中旬)부터 양근(楊根) 고양(高陽)(안(安)) 방면으로 진출(進出)하려 한다고 양언(揚言)하였다고 한다.143)

 

김윤식(金允植)은 이에 대하여 「의병(義兵)이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시량선(柴粮船)을 불태워서 도성(都城)이 더욱 곤궁해졌다」144) 고 기록하였다.

4월 3일에는 약 300명의 의병부대가 양주군(楊州郡) 이담면(伊談面)에 이동해 왔다.145) 4월 4일에는 약 10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 마전헌병분유소(麻田憲兵分遺所)를 습격하였다.146) 또 같은날(4월 4일) 약 200명의 의병부대가 광주군(廣州郡) 판교(板橋)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약 30명의 의병부대도 판교(板橋) 서부 산운동(山雲洞) 고지(高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147) 4월 5일에는 약 30명의 의병부대가 고양군(高陽郡) 신혈면(神穴面) 전석리(石里)를 습격하여 구군인(舊軍人) 12명을 데려갔다.148) 4월 8일에는 약 300명의 의병부대가 평산군(平山郡) 시변리(市邊里)의 일본군헌병분유소(日本軍憲兵分遺所)를 습격하였다. 149) 4월 10일에는 의병장 장계환(張桂還)·김춘수(金春洙)·김규식(金奎植) 등이 각각 7,80명씩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의병을 모집했으며, 이 중에서 장계환(張桂還) 의병부대는 약 50명의 의병을 요소(要所)에 파견하여 서울로의 물자수출(物資輸出)을 두절시키고 수륙(水陸) 운수교통을 차단하였다.150)

 

또한 4월 10일에는 허위(許蔿)의 휘하에 있는 김춘수(金春洙) 의병부대가 약 20명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양근군(楊根郡) 북면(北面) 일대에 의병재봉기(義兵再蜂起)의 준비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2통의 격문(檄文)을 각 동장(洞長)과 부근 이민(里民)들에게 발송하였다.151)

① 북면장(北面長) 및 각 동장(洞長)들에게 보낸 격문

근처에 왜적(倭賊)이 있어서 세력(勢力)이 왕성하다. 연(然)이나 의병(義兵)이 재거(再擧), 차(且) 청국병(淸國兵)도 역시 동(動)하여 아국민(我國民)은 소생(蘇生)할 수 있을 것이다. 화약(火藥) 화승(火繩)을 준비 하라. 자위단장(自衛團長)은 참살(斬殺)한다. 문무(文武) 중 의기(義氣)있는 자는 의병(義兵)에 투(投)하라.

② 양근(楊根) 부근 이민(里民)들에게 보낸 격문

.의병(義兵)의 대군(大軍)이 근일(近日) 양근(楊根)을 습격하러 한다. 고(故)로 처자가족(妻子家族)은 피란(避亂)하라. 또 화약(火藥) 탄환(彈丸)을 준비하기 어렵거든 초혜(草鞋) 및 양식(粮食)을 준비하라.

또한 4월 10일에는 서울의 지척인 고양군(高陽郡) 하도면(下道面) 유리(杻里)의 삼각산(三角山) 기슭에 약 50명의 의병부대가 북한산(北漢山)으로부터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북한산(北漢山)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불광동(佛光洞) 부근을 샅샅히 수색했으나 그들의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152)

 

4월 11일에는 약 30명의 의병부대가 여주군(驪州郡) 근남면(近南面) 금곡리(金谷里)를 통과하였다.153) 4월 12일에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가 고양군(高陽郡) 기울리(基蔚里)에 출현하였다.154) 4월 13일에는 허위(許蔿) 휘하에 있는 유춘렬(柳春烈) 의병부대 약 22명이 고양군(高陽郡) 구화도면(求和道面) 이패리(二牌里)에 들어와 군자금 6만냥과 군총 20정의 조달을 명령하고 1시간 동안 휴식 후 서북쪽으로 이동하였다.155) 또한 4월 13일 오후 3시 30분 지평군(砥平郡) 용수동(龍水洞)에서 관동창의선봉대장(關東倡義先鋒大將)(원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소속) 이병수(李秉壽)가 인솔하는 약 10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日本軍) 지평수비대(砥平守備隊) 안천분대(安川分隊)를 습격하여 1시간 반동안 격전끝에 이를 섬멸하였다. 156) 4월 15일에는 서울을 출발하여 원산(元山)으로 가던 일본인 3명(변장 군인인 듯)을 지포(芝浦)에서 의병들이 공격하여 섬멸하였다.157)

 

4월 19일에는 14명으로 편성된 의병부대 유격대가 대낮에 인천(仁川) 교동순사주재소(喬洞巡査駐在所)를 습격하여 섬멸하고 돌아갔다.158) 4월 22일에는 약 5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와 치열한 전투를 감행했으며, 4월 23일에는 약 15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를 습격하였다.159) 4월 26일 허위(許蔿) 휘하의 이홍응(李弘應) 의병부대 약 100명이 마전(麻田) 장수동(長水洞)에 출현하였다.160) 4월 28일에는 양주군(楊州郡) 천천면(泉川面) 덕정리(德亭里)에서 약 4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日本軍) 양주분견소(楊州分遣所) 헌병대를 습격하였다.161) 같은 날 오전 6시에는 의병부대가 교하군(交河郡) 석관면(石串面) 서패리(西牌里)에 와서 식량(食糧)을 징발하여 약 20척의 배에 싣고 김포(金浦) 방면으로 향하였다.162) 또한 같은 날 밤에는 약 15명의 의병부대가 아동리(衙洞里)와 금릉리(金陵里)에 나타났다가 고양(高陽)방면으로 향하였다.163) 4월 29일에는 약 40명의 의병부대가 연천군(漣川郡) 중리(中里)에서 경성헌병분대(京城憲兵分隊) 문산분견소(汶山分遣所)의 일본군을 습격하였다.164) 같은날 오후 3시에는 약 20여명의 의병부대가 광주군(廣州郡) 곤지암(昆地岩) 부근에서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소속 일본군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165) 또한 같은 날 (4월 29일) 김포군(金浦郡) 묵단면(默丹面) 봉화리(峰火里) 부근의 솔밭에서 약 10여명의 의병부대가 김포분견대(金浦分遣隊)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166)

 

5월에 들어서자 서울 외곽(外廓)에서의 의병부대들의 항일무장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5월 2일에는 약 50명의 의병부대가 통진(通津) 대명촌(大明村)에서 일본군(日本軍) 변장토벌대(變裝討伐隊) 대원들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167) 5월 3일에는 의병부대가 죽산군(竹山郡) 북이면(北二面) 은석동(隱石洞)에서 자위단(自衛團) 친일파(親日派)들을 처단하고 일본군(日本軍)을 찾아 유격전을 벌리었다.168) 같은날인 5월 3일에 약 20명의 의병부대가 통진군(通津郡) 조강포(祖江浦)에 출현하여 일제 헌병경찰을 공격하였다.169) 5월 4일에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가 광주군(廣州郡) 능곡(陵谷)에서 일본군 보병대(步兵隊)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170) 5월 5일에는 죽산군(竹山郡) 마옥산(麻玉山) 부근에서 3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 헌병대를 기습하여 섬멸하였다.171)

 

이러한 사실들은 1908년 4월부터 5월 초순에 걸쳐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의 총지휘 아래서 다수의 의병부대들이 소규모 편대를 만들어 서울을 향해서 진군(進軍)했으며 서울의 외곽(外廓)을 포위(包圍)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허위(許蔿)가 전국 13도에 격문을 발송한 것은 이러한 작전의 배경 위에서 전국의 의병들이 재봉기하여 서울을 향해서 재집결할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이 격문(檄文)이 4월 21일 전국에 발송된 후에는 의병운동이 더욱 고양되었다. 예컨대 일본군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도 이 격문 이후에는 「4월 25일 진부(珍富)에 도착, 전수비대장(前守備隊長)의 신고에 의하면 폭도(暴徒)의 행동(行動)이 활기(活氣)를 대(帶)하여서」172) 700∼800명의 부대를 이루기도 하고 우편호위병들이 섬멸당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도 1908년 5월에 들어서자 의병운동이 봉기 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보게 되었다고 보고한 것이었다.

 

의병부대들의 서울을 향한 진군(進軍)과 서울의 포위(包圍)에 당황한 일본군(日本軍)은 긴급히 두가지 방어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하나는 서울의 일본군을 서울 외곽(外廓)에 전진 배치하여 의병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긴급히 일본으로부터 2개 연대(聯隊)의 일본군 병력(兵力)을 서울에 증파(增派)토록 하는 것이었다.

 

한국 의병부대들의 서울 포위탈환작전이 다가옴에 당황한 일본군은 우선 4월 21일 일제경찰대를 한국 「의병(義兵)」으로 변장시킨「변장토벌대(變裝討伐隊)」를 각20명씩 2개부대를 편성하여 ① 양주(楊州)·적성(積城)·마전(麻田) 방면과 ② 고양(高陽)·파주(坡州) 방면으로 긴급히 출동시켰다.173) 또한 서울에 사단본부를 둔 일본군 13사단 참모부는 북부수비관구(北部守備管區)의 일본군에게 다음 표와 같은 작전에 의하여 한국 의병의 서울 공격을 방어하라고 명령하였다.174)

십삼도(十三道) 연합의병부대 제 2차 서울탈환 작전에 대한 일본군(日本軍)의 대응배치(對應配置)

병력(兵力)

토벌구역(討伐區域)

행동개시일 (行動開始日)

행동개시시점

적요(摘要)

 

보병(步兵)1중대 (中隊) (1소대결(小隊缺)) 경성둔재(京城屯在)의 것

경성(京城)으로부터 광주(廣州)-과천(果川)을 연결(連結)한 선(線)에 향하여 압박(壓迫)

5월 4일

경성(京城)

상호책응(相互策應)할 것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주력(主力)

이천(利川)으로부터 광주(廣州)-과천(果川)을 연결(連結)한 선(線)에 향하여 압박(壓迫)

5월 3일

이천(利川)

동(同)

 

보병(步兵)1소대(小隊)와 반소대(半小隊)경성둔재(京城屯在)의 것

경성(京城)으로부터 청평(淸平)-천점(川店)-고안(高安)을 연결(連結)한 선(線)에 향하여 압박(壓迫)

5월 4일

경성(京城)

상호책응(相互策應) 할 것

 

지평수비대(砥平守備隊) 주력(主力)

지평(砥平)-홍천(洪川)을 연결(連結)한 선(線)으로부터 청평(淸平)-천점(川店)-고안(高安)을 연결(連結)한 선(線)을 향하여 압박(壓迫)

5월 4일

지평(砥平)및 홍천(洪川)

동(同)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주력(主力)

적성(積城)으로부터 영평(永平)-양주(楊州)를 연결(連結)한 선내(線內)의 토벌(討伐)

5월 4일

적성(積城)

상호책응(相互策應)할 것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 주력(主力)

춘천(春川)-경성가도(京城街道)와 원산(元山)-경성가도간(京城街道間) 지구(地區) 토벌(討伐)

5월 4일

춘천(春川) 및 가평(加平)

동(同)

 

또한 일본군은 긴급하게 일본에 있는 제6사단의 보병(步兵) 제(第)23연대(聯隊)와 제7사단의 보병(步兵) 제(第)27연대(聯隊)를 차출하여 한국에 증파해서 5월 7일자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에 증가 편입하여 한국의병(韓國義兵)의 공격을 방어할 것임을 내부 경무국장에게 통고하였다.

한참통(韓參通) 제(第)145호(號), 명치(明治) 41년(年) 5월(月) 7일(日)

한국주차군참모장(韓國駐箚軍參謀長) 모전경구랑(牟田敬九郎)내부(內部) 경무국장(警務局長) 송정(松井) 무(茂) 앞

별지(別紙)와 여(如)히 본일(本日) 육군대신(陸軍大臣)으로부터 전선(傳宣)되었으므로 통보(通報)함.

칙(勅)을 봉(奉)함.

일(一). 한국(韓國) 폭도(暴徒)를 되도록 속(速)히 진정(鎭定)할 목적으로 보병(步兵) 2개 연대(聯隊)를 일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에 증가(增加)한다.

이(二). 제(第)6사단장(師團長)은 보병(步兵) 제(第)23연대(聯隊)를, 제(第)7사단장(師團長)은 보병(步兵) 제(第)27연대(聯隊)를 한국(韓國)에 파견(派遣)하라.

삼(三). 파견연대(派遣聯隊)는 한국주차군사령관(韓國駐箚軍司令官)의 예하(隸下)에 입(入)하는 것으로 한다.

사(四). 파견연대(派遣聯隊)의 편성급(編成及) 수송(輸送)에 관하여는 육군대신(陸軍大臣)의 지휘(指揮)를 수(受)하여야 한다.175)

 

한국 의병부대들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에 대응하여 일제가 일본으로부터 2개연대를 증파하면서 서울 외곽(外廓)에 일본군과 일제경찰을 대규모로 전진배치하여 반격을 가해 왔으므로, 1908년 5월∼6월에는 서울외곽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서 한국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한국 의병부대들은 투지는 사기충천했으나 병기(兵器)에서 열세이고 탄약(彈藥)이 고갈되어 증강된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가 없었다. 또한 전국 각 지방에서 재봉기하여 고양된 의병부대들도 곳곳에서 증강된 일본정규군(日本正規軍)의 막강한 화력(火力)에 진로가 차단되어 서울근교에 집결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의 지휘하에 감행된 <제(第)2차(次) 서울 탈환작전(奪還作戰)>은 작전 그 자체는 훌륭했으나 화력(火力)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한국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시도에 그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8.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軍師長)의 일제통감에의 요구조건(要求條件)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이 시작되어 2월중에 퇴조되어 가던 의병운동이 형세(形勢) 일변(一變)해서 다시 고양되어 의병운동 봉기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보이기 시작한 조건 위에서, 군사장(軍師長)이며 총대장의 위임을 받은 허위(許蔿)는 서울탈환작전의 정치적 측면의 일환인 연합의병부대의 30개조의 요구조건(要求條件)을 박로천(朴魯天)을 서울에 파견하여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에 통보하도록 하고 서울 시내에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태황제(太皇帝)(고종(高宗))을 복위(復位)시켜라.

2) 외교권(外交權)을 환귀(還歸)시켜라.

3) 통감부(統監府)를 철거하라.

4) 의관(衣冠)을 복고(復古) 하라.

5) 일본인(日本人)의 서임(敍任)을 시행치 말라.

6) 형벌권(刑罰權)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7) 통신권(通信權)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8) 경찰권(警察權)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9) 정부조직(政府組織)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10) 군대시설(軍隊施設)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11) 을미(乙未)·을사(乙巳)·정미(丁未)의 국적(國賊)을 자유로이 처참(處斬)케 하라.

12) 내지(內地)의 산림(山林)·천택(川澤)·금은동광(金銀銅鑛)을 침략하지 말라.

13) 내지(內地)의 부동산(不動産) 매매를 하지말라.

14) 항해권(航海權)을 환귀시켜라.

15) 어채(漁採)의 이(利)를 침략하지 말라.

16) 교육권(敎育權)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17) 출판권(出版權)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18) 군용지(軍用地)를 환귀시켜라.

19) 일본인(日本人) 거류지(居留地)를 환귀시켜라.

20) 철도(鐵道)를 환귀시키고 물러가라.

21) 학회(學會) 이외를 자유롭게 해산시켜라.

22) 해관세법(海關稅法)의 자유(自由)를 회복시켜라.

23) 일본인(日本人)의 상업(商業)을 제한(制限)하라.

24) 일본인(日本人)의 상업물품(商業物品)을 제한하라.

25) 일본인(日本人)의 상륙(上陸)을 제한하라.

26) 국채(國債)를 시행하지 말라.

27) 인민(人民)의 손해(損害)를 배상하라.

28) (일본)은행권(銀行權)을 시행하지 말라.

29) 지방(地方)의(일본군)병참(兵站)을 철거하라.

30) 일본(日本)에 현재(現在) 있는 망명객(亡命客) 등을 속히 포래(捕來)하라.17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의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에 대한 32개조 요구조건(要求條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근일 풍설(風說)을 거(據)한즉 의병소(義兵所)에서 통감부파원(統監府派員)과 교섭(交涉)하고 32조(條)의 요구서(要求書)를 제출하였는데 태황제폐하복위(太皇帝陛下復位)하실 사(事)와 통감부철환사(統監府撤還事)와 관청(官廳)의 일본인관리(日本人官吏) 퇴송사(退送事)와 외교권환귀사(外交權還歸事)와 그 외의 각항 중요한 사실이라더라.177)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군사장 허위(許蔿)가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에게 보낸 위의 32개조 요구조건(要求條件)의 내용은 그동안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빼앗아간 모든 국권(國權)과 이권(利權)을 되찾아 회복하고 일본은 한국에서 물러갈 것을 조목화하여 요구한 것이었다. 이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 의병부대가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면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와 담판을 지으려고 했던 <정치적(政治的) 목표(目標)>의 <강령(綱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의 연합의병부대만이 아니라, 당시 전국에서 봉기하여 용감히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모든> 의병부대들의 <정치적(政治的) 목표(目標)>를 집약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가 일제에게 통보한 위의 <30개조>은 의병운동사에서 획기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용감무쌍한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일본정규군(日本正規軍)의 증파(增派)로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 긴급히 증파된 일본군 제27연대와 제23연대는 서울의 외곽(外廓)에 막강한 현대적 방어화력(火力)을 배치함과 동시에, 일본군 제27연대는 일본군 제51연대로부터 의병 「토벌」에 경험이 있는 하사(下士)들을 배속받은 후에 서울 근교(近郊)의 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강화(江華)·풍덕(豊德)·교하(交河)·고양(高陽)·동두천(東豆川)·한강(漢江) 좌(左)·우안(右岸)을 수색하는 대대적 작전을 6월 1일부터 개시하였다.178) 일본군은 서울 외곽(外廓)을 비롯하여 경기도(京畿道) 일대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을 강행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들은 새로이 증파(增派)된 막강한 일본군(日本軍)에 대항하여 용감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6월 2일에는 의병부대가 강화군(江華郡) 송정면(松亭面) 중성동(中城洞)에 출현하여 자산가(資産家)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해 갔으며, 6월 3일에는 다른 의병부대가 영정포(領井浦)에 상륙하였다.179) 6월 8일에는 약 20명의 의병부대가 부평읍(富平邑)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일시 이를 점령하였다.180)그러나 당시 무기(武器)가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탄환(彈丸)이 거의 고갈되어 있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화력(火力)으로서는 서울외곽(外廓)을 포위하기는 했으나 증파(增派)된 일본군 제23연대와 제27연대 및 제13사단의 막강한 화력(火力)을 이길 수가 없었으므로 서울 진입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밀리어 분산해서 퇴각(退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본군(日本軍) 2개연대(聯隊)의 증파(增派)로 말미암아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여기서 좌절당하게 되었다.

 

더욱 불행이 겹친 것은, 1909년 6월 11일 의병장 허위(許蔿)가 일본헌병대(日本憲兵隊)의 급습을 받고 체포된 일이었다.181) 일본군 경성헌병대(京城憲兵隊) 철원분견대((鐵原分遣隊)는 포로가 된 김모(金某)라는 한 의병으로부터 허위 의병장이 은신하고 있는 촌락을 알아낸 다음,182) 태전(太田) 헌병대위 이하 12명의 일본군 헌병이 1908년 6월 11일 새벽 7시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서면(西面) 유동(柳洞)의 박정연(朴政淵)의 집을 급습하여 허위(許蔿)를 체포하였다.183)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군사장 허위(許蔿)는 6월 17일 서울로 이송되어,184) 조사를 받고 7월 7일 평리원(平理院)에 회송(廻送)되었다.185) 허위(許蔿)는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제1회 신문(訊問)을 받고186) 1908년 9월 18일 일제 재판장에 의하여 사형(死刑)선고를 받았다.187) 허위(許蔿)는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형이 집행되어순국(殉國)했는데,188)『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천일무광(天日無光)(하늘의 태양도 빛을 잃었다)」는 제목으로 그 전말을 보도하여 추도하였다.189)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이 일본군(日本軍) 2개연대(個聯隊)의 증파(增派)로 말미암아 좌절된 이후 의병부대들은 다시 각 부대의 근거지로 돌아가 분산(分散)해서 <유격전(遊擊戰)>에 의거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9. 맺 음 말

 

지금까지 1907년 하반기에 편성되어 1908년 전반기에 서울탈환작전(奪還作戰)을 전개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비교적 상세히 고찰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 편성은,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軍隊解散) 후 해산군인(解散軍人)들이 봉기하여 의병(義兵)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전국(全國)에 걸쳐 의병운동이 급속히 고양되면서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전국 각지에서 분산적(分散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자, 의병운동의 고양기(高揚期)에 이를 통합(統合)하여 지휘체계를 통합 정비하면서 의병부대를 집중적(集中的)으로 근기(近畿)지방에 투입하여 서울외곽(外廓)을 포위(包圍)한 다음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1907년 10월부터 의병부대들 사이에 <통문(通文)>을 돌리는 방식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여기에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성립의 주체세력이 된 의병부대는 ①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와 ② 허위(許蔿) 의병부대였고, 이 두 개의 대규모 의병부대의 연합에 결정적으로 연계를 놓은 것이 ③ 이인영 의병부대에 통합되어 있던 이은찬(李殷瓚) 의병부대이었으며, 이들의 연합운동에 ④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⑤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가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그밖에 ⑥ 황해도의 권중희(權重熙) 의병부대 ⑦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 ⑧ 전라도의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 ⑨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 ⑩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의병부대의 호응이 있자, 경기도 양주(楊州)에 집결하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연합의병부대를 성립키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전라도의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는 약속된 기일에 양주(楊州)에 모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집결한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가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성립되었다. 이 때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양주(楊州)에 도착하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의 편성에 실제로 참가한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민긍호(閔肯鎬), 호서(湖西)창의대장에 이강년(李康年), 교남(嶠南)창의대장에 박정빈(朴正斌), 진동(鎭東)창의대장에 권중희(權重熙), 관서(關西)창의대장에 방인관(方仁寬), 관북(關北)창의대장에 정봉준(鄭鳳俊)이 선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종래 신돌석(申乭石)이 평민출신이었기 때문에 교남(嶠南)창의대장을 교체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해석이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성립될 시기에 신돌석(申乭石)은 경기도 양주(楊州)에 집결하지 못하고 강원도와의 접경지대인 경상북도의 일월산(日月山)과 백암산(白岩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중이었기 때문에 교체된 것이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편성의 실제 내용을 보면 당시 전국(全國) 각지의 대표적 의병부대가 모두 집결하여 편성된 것이 아니라 <중부(中部)> 지역의 대표적 의병부대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편성되고 다른 도(道)의 의병부대는 상징적으로만 참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군(日本軍)이 전국에 수비구(守備區)를 만들어 의병(義兵)에 대한 치열한 <토벌> 작전을 강행하는 조건 위에서는 함경도·평안도·경상도·전라도의 <북부(北部)> 및 <남부(南部)>의 의병부대들은 <거리>와 당시 의병부대의 <기동력>으로서는 단시일에 일본군(日本軍)의 저지선을 돌파하여 경기도 양주(楊州)에 집결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자연히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는 <중부(中部)>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들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중부(中部)>지방의 의병부대들로서는 ①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② 허위(許蔿) 의병부대 ③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④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가 대표적인 대규모 의병부대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4대 의병부대들이 다른 소규모 의병부대들을 각각 모두 통합하여 다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했고 다른 도(道)는 상징적으로 모두 참가한 것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조건에 비추어서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는 상징적으로 <전국적(全國的)>이라는 의미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종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서울탈환작전>은 1908년 1월 한 번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를 보면 1908년 4월말∼5월말에 걸쳐 한 번 더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이 있었으며, 이 제2차 작전은 제1차 작전과 마찬가지로 서울 진공 그 자체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국(全國)에서 의병의 재봉기(再蜂起)를 결과하여 일제의 기록에서도 의병운동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종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은 군사장 허위(許蔿)가 인솔하는 선봉대(先鋒隊)가 일본군과 한 번 싸운 후에 본격적 작전 직전에서 이인영(李麟榮)의 부친의 별세로 인한 귀향 때문에 실패 또는 중지된 것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관찰과 해석으로 보인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기 위하여 지평(砥平)·양주(楊州)로 모이는 과정에서 여기에 참가하려고 이동한 모든 의병부대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며 집결했고, 또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편성 후 서울을 향하여 진군(進軍)하는 도중에도 무려 38회(回)나 대소규모의 전투(戰鬪)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들의 탄환(彈丸)은 거의 고갈상태에 다다랐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위에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 30리 지점에 도달한 허위(許蔿) 인솔하의 선봉대(先鋒隊)는 후속 본대(本隊)가 도착하기 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치열한 전투에 들어가게 되고 혈전(血戰)끝에 선봉대(先鋒隊) 역시 탄환(彈丸)이 고갈되어 퇴각(退却)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선봉대(先鋒隊)는 대대장 연기우(延基羽)와 김규식(金奎植)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연합의병부대의 본대가 분산하여 그 후 동대문(東大門)밖 30리 약속된 지점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산포(山砲)와 기관총(機關銃)으로 중무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는 일본군과 연합의병부대가 <정면전(正面戰)>을 전개해서는 패전(敗戰)이 명확히 내다 보이는 어려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지휘부가 무기(武器)와 탄약(彈藥)의 절대적 부족 속에서 이 정면전(正面戰)을 중단(中斷)하여 연기시켜서 더 준비를 갖추어야할 필요가 절실한 때에 마침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부친의 별세의 부고가 진중에 도착하자 독실한 유생 이인영은 그 자신만 상례(喪禮)를 위하여 귀향한 것이 아니라 <제1차 서울탈환작전>자체를 중지(中止)하도록 통문(通文)을 돌리게 하고는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귀향함으로써, 그 자신의 <효(孝)>뿐만 아니라, <정면전(正面戰)>에서의 패전(敗戰)이 가져올 전체 의병무장투쟁에 대한 충격을 회피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탄약(彈藥)의 고갈로 말미암아 조성된 전투력의 열세에서 <정면전(正面戰)>을 피하고 연기시키기 위하여 부친(父親)의 상례(喪禮)를 맞자 그 자신을 희생시킨 것은 아닐까?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는 총대장 이인영의 결정에 따라 다시 분산(分散)하여 각지에 흩어져서 이번에는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의 지휘와 연락 아래 약 3개월간 소규모 유격전들만 전개하면서 재거(再擧)의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① 의병을 증모하여 비밀리에 훈련시키고 ② 무기(武器)와 탄약(彈藥)을 구입하여 무장을 보강하며 ③ 군량(軍糧)을 비축하고 ④ 서울에 의병장을 잠입시켜 내응세력을 조직하고 ⑤ 각 의병부대의 연락을 긴밀히 강화했다가, 1908년 4월 21일 마침내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이인영(李麟榮)·유인석(柳麟錫)·박정빈(朴正斌)등의 이름으로 의병의 재거(再擧)와 제2차 서울탈환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통문(通文)>을 전국 13도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全國) 13도에서 의병운동(義兵運動)이 다시 치솟아 오르고 중부(中部)지방의 의병부대들은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위하여 다시 경기도(京畿道)에 진입하여 서울외곽(外廓)을 포위하기 위해서 서울 주변에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2월∼3월에는 거의 전투가 없었던 서울 외곽(外廓)에서 4월∼5월말에는 크고 작은 의병부대들의 진출과 공격에 의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이 연일 재연되었다. 이러한 형세의 급전환에 대하여 일제측 자료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까지도 「1908년 초두에는 의병항쟁이 정온(靜穩)의 역(域)에 향하여, 충돌의병의 총수가 1월에는 약 9,000명, 2월에는 겨우 1,900명이었다가 4월부터 형세일변(形勢一變)하여 의병봉기 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보게 되어 충돌의병의 총수가 5월에는 1만 4,000명에 달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보고를 한 것이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재봉기와 <제2차 서울탈환작전>의 시작에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의병부대들이 속속 경기도에 진입하여 서울 외곽(外廓)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하여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군 제(第)13사단(師團)본부 병력과 헌병경찰 병력만으로는 방어에 불충분하다고 보고 일본(日本)으로부터 제6사단의 제(第)23연대(聯隊)와 제7사단의 제(第)27연대(聯隊)를 5월 7일자로 한국에 급파하여 서울을「방위」하고 서울외곽(外廓)의 의병부대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이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있는 서울의 방어를 위해서 일본(日本)으로부터 2개연대(個聯隊)를 급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의 기세가 얼마나 드높았는가를 알 수 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일본군 2개연대(聯隊)의 증파(增派)로 의병부대의 병력의 열세가 심하게 되어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전국(全國)에서 의병항일무장투쟁을 급격히 고양(高揚)시켜 1904년이래 의병운동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가져왔다. 1908년 1∼2월에 거의 퇴조(退潮)되어가던 의병운동이 4∼5월에 갑자기 고양(高揚)되어 의병운동 봉기이래 최고조(最高潮)에 달했던 배경에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이 있었음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래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그들이 시종일관 <유격전(遊擊戰)>만을 전개하지 않고 일본 정규군(正規軍)에 대항하여 <정면전(正面戰)>을 전개하려 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적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군사 <전술적> 측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전략적(戰略的)> 측면을 경시한 것은 아닐까?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한 각 의병 부대들은 이미 무수한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한 유격전 부대들이었으며 그들 자신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의병부대(義兵部隊)들은 단위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제보다는 국권회복(國權恢復)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패전과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의용대(義勇隊)였으므로, 그들이 국권회복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를 선행시켜 고려한 의병작전이 필요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견해로는,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부대의 <서울탈환작전>은 우수한 전략이라고 본다. 정치적 전략으로서는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있는 수도(首都)를 포위하거나 공략하는 것은 지방의 소전투들에서 큰 승전을 하는 것보다 정치적 효과가 훨씬 더 큰 지름길이기 때문에 이 작전은 의병부대들로서는 반드시 시도해 볼 만한 것이었다. 물론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서울탈환작전>은 이를 수행할 화력(火力)(무기(武器)·탄약(彈藥))과 기동력(機動力)의 부족이라는 전술적 결함이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병원(兵員)의 부족이 아니라 화력(火力)의 부족(不足)인 한 유격전(遊擊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큰 한계를 가져오는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탄약(彈藥)을 공급할 길이 없던 의병부대들로서는 탄환이 고갈되어 전체 의병운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기 전에 정치적 효과가 매우 큰<서울포위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여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서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하여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와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담판(談判)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이 순전한 군사적 작전이 아니라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를 정치외교적으로 굴복시켜 <을사 5조약>, <정미 7조약>등 각종 침략조약들을 파기하려는 정치적 목적의 작전의 성격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입작전> <서울탈환작전>은 화력(火力)의 부족과 일본군(日本軍)의 증파(增派)로 말미암아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의병운동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것은 전국(全國)의 의병운동을 크게 고양(高揚)시켰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제1차 서울탈환작전>은 군대해산(軍隊解散) 후 의병운동의 고양의 결과의 측면이 강하지만, 특히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퇴조되고 「진압」되어가던 의병운동의 추세를 역전(逆轉)시켜 형세일변(形勢一變)케 해서 의병운동 봉기이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이라고 일제가 기록할 만큼 최고조(最高潮)로 의병운동을 고양(高場)시킨 것이었다.

둘째, 그것은 소규모 의병부대들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의 대동단결(大同團結)과 상호연대(相互連帶)의 강화(强化)를 가져왔다. 자발적으로 봉기한 수많은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성립을 계기로 대규모 의병부대들로 통합(統合)되었으며 상호 긴밀하게 연락(聯絡)하면서 상호연대(相互連帶)를 크게 강화하여 전체 의병부대들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이 크게 강화되었다.

세째, 그것은 의병무장투쟁의 정치적(政治的) 전략과 경륜을 발전시키고 과시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탈환작전>과 그에 병행하여 준비한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에 대한 요구조건(要求條件)과 새 애국적 정부조직(政府組織)의 주장은 국권회복(國權恢復)을 목적으로 한 의병무장투쟁의 정치적 전략과 내용을 보다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근대적으로 발전시켜 의병들의 사기(士氣)를 고양시켰으며, 의병무장투쟁의 정치적 성격을 크게 발전시켰다.

네째, 그것은 전국민(全國民)에게 애국주의(愛國主義)를 크게 고양(高場)시켰다. 의병무장투쟁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들도 높은 산맥(山脈)속에서 싸우고 있는 줄 알았던 의병(義兵)들이 수도(首都)서울을 포위(包圍)하고 서울을 탈환(奪還)하러 진군(進軍)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적으로 크게 각성하여 전국민들 사이에 애국주의(愛國主義)가 크게 고양되었다.

다섯째, 그것은 항일무장투쟁의 정치적(政治的) 효과(效果)를 크게 제고시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보위하고 고취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서울탈환작전>은 의병운동의 중요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일부 지식인들로 하여금 이를 재인식케하고 의병운동에 보조를 맞추어 연무제진(聯武齊進)해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작용하였다.

여섯째, 그것은 한국인들의 국권회복 운동과 의병항일무장투쟁을 전세계(全世界)에 알리는 중요한 정치적·선전적 효과를 산출하였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수도(首都)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운동을 알지 못했던 외국인(外國人)들도 한국인들이 국권회복을 위해서 서울근교에까지 진출하면서 용감하게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영국 『데일리 매일』기자 멕켄지의 의병에 대한 취재는 그 좋은 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의 의병운동과 두 차례에 걸친 <서울탈환작전>은 이상과 같이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주석*

* 본연구소(本硏究所) 소장(所長), 서울대학교 교수(敎授)

1.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동양학연구소판(東洋學硏究所版)>, 상권(上卷), 465∼466면.

2.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6면.

3. 〈의병운동(義兵運動)〉의 여기서의 〈4단계〉 구분은 1904년 이후의 한말의병(韓末義兵)에 한정(限定)된 것이고,만일 우리가 1895∼96년의 〈을미의병(乙未義兵)〉을 포함시키는 경우에는 〈5단계〉구분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4. 〈한국군대(韓國軍隊)は일대대(一大隊)を잔(殘)し전부해산(全部解散)の건(件)〉, 1907년(年) 7월(月) 28일(日)조(條) 〈진전외무차관(珍田外務次官)의 서원사총리대신(西園寺總理大臣)에의 보고(報告)〉,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편(金正明編)), 제(第) 1권(卷), 1967, 15∼16면 참조.

5.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제1권, 〈의병항쟁사〉, 1972, 469∼470면 참조.

6. ① 성대경(成大慶), 〈한말(韓末)의 군대해산(軍隊解散)과 그 봉기(蜂起)〉, 〈성대사림(成大史林)〉, 제1집, 1965.

② 김의환(金義煥), 〈정미년(丁未年) (1907) 조선군대해산(朝鮮軍隊解散)과 반일의병투쟁 (反日義兵鬪爭)〉,

《향토(鄕土)서울》, 제26집, 1966 참조.

7.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단국대학교(檀國 大學校) 동양학연구소판(東洋學硏究所版)), 상권(上卷) 323∼327면 참조.

8.〈팔월일일(八月一日)における남대문부근전투상보보고(南大門附近戰鬪詳報報告)の건(件)〉,〈위비발(衛秘發) 제(第)14호(號)〉, 1907년(年) 8월(月) 3일조(日條), 〈제(第)13사단참모장(師團參謀長)의 비서관(秘書官)에의 보고(報告)〉,《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편 (金正明編)〉제(第)1권(卷), 16∼19면 참조.

9.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판(國史編纂委員會版)), 427면. 「기직주성외자(其直走城外者)개전여의병합(皆全與義兵合)」 참조.

10. 송상도(宋相燾), 《기려수필(騎驪隨筆)》, (국사편찬위원회판(國史編簒委員會版)), 남상덕조(南相悳條), 121면 참조.

11.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편찬(編纂)),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39면.

12. 박은식(朴殷植),《한국통사(韓國痛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327∼328면 참조.

13.《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제(第)1권(卷), 139∼140면 참조.

14.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326면 참조.

15. 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 427면 「유안동(惟安東) ·원주양대(原州兩隊) 담총이산(擔銃而散) 외심고지(倭甚苦之)」참조.

16.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432면 참조.

17. 《조선병합사(朝鮮倂合史)》,(석미동방(釋尾東邦)), 1926, 385면.

18. 박성수(朴成壽), <1907∼1910연간(年間)의 의병전쟁(義兵戰爭)에 대하여>,《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제(第)1집(輯), 1968 참조.

19. 강재언(姜在彦), 〈반일의병운동(反日義兵運動)の역사적전개(歷史的展開)〉,《조선근대사연구(朝鮮近代史硏究)》1970, 272∼273면 참조.

20. 신용하(愼鏞廈), <허위(許蔿)의 의병활동(義兵活動)>, 《나라사랑》, 제27집, 1977년 ; 《한국근대사(韓國近代史)와.사회변동(社會變動)》 (문학(文學)과지성사(知性社)), 1980, 56∼78면 참조.

21.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439면.

22.《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9월 7일자〈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 9월 13일자 〈잡보(雜報)(파주(波州)>, 9월 14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및 9월 22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참조.

23.《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9월 21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참조.

24.<허위판결선고서(許蔿判決宣告書)>,《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별집(別集), 1, <의병항쟁(義兵抗爭) 재판기록(裁判記錄)>, 450∼451면 참조.

25.《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 융희(隆凞) 2년(年) 11월(月) 18일(日) 조(條),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규완 보고(李圭完報告)> 참조.

26.《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10월 1일자, <잡보(雜報)(지방정형(地方情形))>참조.

27.《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10월 3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 참조.

28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 융희(隆凞) 2년(年) 11월 18일조(日條),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규완보고(李圭完報告))> 참조.

29.《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11월 12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 참조.

30.《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 융희(隆凞) 2년(年) 1l월 18일조(日條),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규완.보고(李圭完報告)> 참조.

31.《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발(警秘發) 제(第)786호(號)>, 융희(隆熙) 2년(年) 6월 4일 조(條),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ノ폭도(暴徒)>

32.《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발(警秘發) 제(第)786호(號)>, 융희(隆熙) 2년(年) 6월 4일 조(條),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ノ폭도(暴徒)> 참조.

33. <이은찬판결선고서(李殷瓚判決宣告書)>,《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별집(別集) 1, <의병항쟁재판기록>254∼255면 참조.

34.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7∼468면 참조.

35. 김진식(金鎭植), <1907년~1910년 경기지역(京畿地域) 의병항쟁(義兵抗爭)의 성격(性格)>,《기전문화연구(畿甸文化硏究)》, 제6집, 1975 참조.

36. <이인영판결선고서(李麟榮判決宣告書)>,《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別集) 1, 〈의병항쟁 재판기록〉, 371∼372면참조.

37. <제(第)1회(回)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39∼40면 참조.

38. <제(第)2회(回)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9∼50면 참조.

39.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발(警秘發) 제(第)786호(號)>, 융희(隆凞) 2년(年) 6월(月) 4일(日)조(條)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ノ폭도(暴徒)>, 「또한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는 음력 9월 10일경 강원도(江原道)의 폭도(暴徒) 이인영(李麟榮)으로부터 13도관찰사(道觀察使)와 각국(各國) 영사관 (領事館)에 보내는 격문(激文)이 거대한 날인(捺印)이 되어 보내온 것도 있었음. 들은 바에 의하면 동인(同人)으로 부터도 신보사(申報社)에 송부(送付) 관계를 신청하였었다고 함.」참조.

40.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제(第)41권(卷) 제(第)1책(冊), 문서번호(文書番號) 856 「재상항한국인(在桑港韓國人)へ한국(韓國)ヨリ송부월(送付越)ノ배일적격문(排日的檄文)ニ관(關)スル건(件))「Compatriot, we must . unite and to consecrate ourselves to our land and restore our independence. We must appeal to the whole . world about grievous wrongs and outrages of barbarous Japanese. They are cunning and cruel and are . ..enemies of progress and humanity. We must all do our best to kill all Japanese, their spies, allies and . . soldiers.」 참조.

41. <김수민판결선고서(金秀民判決宣告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別集) 1, <의병항쟁 재판기록>, 76∼77면 참조.

42.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71면 참조.

43.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제1권<의병항쟁사 자료집>, 205∼309면 및 689∼736면 참조.

44. 김의환(金義煥), <한말의병운동(韓末義兵運勳)의 분석(分析)-이강년부대(李康年部隊)를 중심으로->, 《한국근대사연구논집(韓國近代史硏究論集)》, 1972 참조.

45. <이강년판결선고서(李康年判決宣告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別集) 1, <의병항쟁재판기록>, 466면 참조.

46. 송상도(宋相燾), 《기려수필(騎驢隨筆)》, 노병대조(盧炳大條), 130면. 「정미팔월(丁未八月) 여김운로(與金雲老)·송창헌(宋昌憲)·전주사임용헌등(前主事林容憲等) 입속리산중거의시(入俗離山中擧義時) 응모자이백여인(應募者二百餘人) 해산경병수백(解散京兵數百) 우래부(又來附) 불기중지천여(不幾衆至千餘)」 참조.

47.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勳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70면 및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제1권, <의병항쟁사>, 574∼576면 참조.

48.《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의병항쟁사자료집>, 373∼.406면 및 945∼961면 참조.

49.《유의사전(柳義士傳)》,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의병항쟁사자료집>, 207∼219면 및 895∼897면 참조.

50.《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55∼156면 참조.

51.《독립운동사》, 제2권 <의병항쟁사>, 589∼593면 참조.

52.《삼의사행장(三義士行狀)》,《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의병항쟁사자료집>, 277∼303면 및 917∼924면 참조.

53.《호남의병열전(湖南義兵列傳)》,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권, <의병항쟁사자료집>, 595∼679면 및 931∼961면참조

54.《정제이석용창의일록(靜齊李錫庸倡義日錄)》,《독립운동사자료집》, 제2권, <의병항쟁사자료집>, 507∼560면 및 895∼914면 참조.

55.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독립운동사자료집》, 제2권, <의병항쟁사자료집>, 369∼505면 및 845∼893면 참조.

56.《심남일실기(沈南一實記)》,《독립운동사자료집》, 제2권, <의병항쟁사자료집>, 561∼593면 및 915∼929면 참조.

57.《담산실기(澹山實記)》,《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의병항쟁사자료집>, 317∼371면 및 929∼944면 참조.

58.《의소일기(義所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권, <의병항쟁사자료집>, 681∼711면 및 963∼974면 참조.

59. 최근무(崔根茂), <을사(乙巳)·경술간(庚戌間)(1905∼1910) 의병전쟁(義兵戰爭)에 관한 연구(硏究)-전북지방(全北地方)을 중심으로->,《전주교대논문집(全州敎大論文集)》, 제16집 ,1980 참조.

60. 《독립운동사》, 제1권, <의병항쟁사>, 616면 참조.

61. 신용하(愼鏞廈), <홍범도의병부대(洪範圖義兵部隊)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집, 1986 참조.

62.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72면 참조.

63.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71면참조.

64. 신용하(愼鏞廈), <안중근(安重根)의 사상(思想)과 의병운동(義兵運動)>,《한국사학(韓國史學)》 제2집, 1980 ;《한 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5, 141∼204면 참조.

65.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8일자 <잡보(雜報)(지방소식(地方消息))>

66.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鳶先生擧義事實大略)》,《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훤회 편), 제2권, 234면 및 793면에 의하면, 허위(許蔿)가 1895년 말 민비시해(閔妃弑害)와 단발령(斷髮令)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허위(許蔿)와 이은찬(李殷瓚)은 모두 이기찬(李起燦)을 대장으로 한 의병부대의 간부였다.

67.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29일자,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 (속(續))>, 「용병지요(用兵之要), 피기고독(避其孤獨) 이재어일치단결(而在於一致團結) 칙(則) 통일각도지병(統一各道之兵)야 승궤제지세(乘潰堤之勢)야 범입근기(犯入近畿)면 거천하(擧天下)는 불능위아가물(不能爲我家物)이나 가견유리어한국지해결의(可見有利於韓國之解決矣). 」 참조.

6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원비발(原秘發) 제(第)50호(號)>, 융희원년(隆熙元年) 11월(月) 28일(日)조(條),<원주경무분서(原州警務分署)의 경무국(警務局)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국사편찬위원회판(國史編纂委員會版)), 제(第)8권(卷), 157면 참조.

69. <십삼도창의대장이인영체포(十三道倡義大將李麟榮逮浦)の건(件)>,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편(金正明編)), 제(第)1권(卷), 38면 참조.

70.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植全書)》, 상권(上卷), 466면 및 <제(第)3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 1권(卷), 52면 참조.

71. <제(第)3회 이인영문답조서(回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53면 참조.

72. <제(第)3회 이인영문답조서(回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51면 참조.

73. <제(第)3회 이인영문답조서(回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51면 참조.

74.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0일자,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속(續)> 참조

75.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 18∼19면,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6∼467면 참조.

76.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을 신돌석(申乭石)으로부터 박정빈(朴正斌)으로 교체(交替)한 문제에 대하여 종래모든 연구들은 신돌석(申乭石) 의병장이 평민출신(平民出身)이었기 때문에 양반유생(兩班儒生)출신인 이인영(李麟榮)이 신분차별(身分差別)에 의거하여 교체한 것이었다고 설명해 왔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를 갖고 한 설명들은 아니었다.

77. 「십삼창의대진소(十三倡義大陣所)」가 실제로 중부지방(中部地方)에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고있던 위의 사대의병부대(四大義兵部隊)들의 연합(聯合)이라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놀랄 만한 대진전(大進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日本軍) 2개사단의 주차군(駐箚軍)이 각 지방에서 의병(義兵)을 「토벌(討伐)」하고 있던 조건에서 단시일에 전국(全國) 의병부대(義兵部隊)나 의병장(義兵將)들이 한 곳에 모여 통일의병부대(統一義兵部隊)를 편성(編成)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막강한 사대(四大)의병부대(義兵部隊)가 하나로 통일연합(統一聯合)하고 그 밖의 도(道)에 대하여 상징적 의병대장들을 임명한 것은 <전국(全國) 십삼도(十三道)>라는 상징적 용어를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국적(全國的)인 것이었다고 상대적 의미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8. <십삼도창의대장(十三道倡義大將) 이인영체포(李麟榮逮捕)の건(件)>,《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 (卷), 38면 참조.

79∼8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발(京秘發) 제(第)44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5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93면 참조.

8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원비발(原秘發) 제(第)46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10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성경시청(京城警視廳)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제(第)8권(卷), 104면 참조.

8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04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9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將)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의 내부경찰국장(內部警察局長) 송정무(松井茂)에게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8~129면 참조.

8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원비발(原秘發) 제(第)46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10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성경시청(京城警視廳)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104면 참조.

84.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발(京秘發) 제(第)44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5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시총감(警視總監)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94면 참조.

8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원비발(原秘發) 제(第)46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10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성경시청(京城警視廳)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105면 참조.

86.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04호(號)>, 융희(隆熙) 2년 4월(月) 9일조. .(日條),<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게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9면 참조.

87.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원비발(原秘發) 제(第)46호(號)의 1>, 1907년(年) 11월(月) 10일조(日條), <원주분견소(原州分遣所)의 경성경시청(京城警視廳)에의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105면.

8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발(京秘發) 제(第)115호(號)>, 1907년(年) 11월(月) 12일조(日條), <강원도금성분견소(江原道金城分遣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 108면 참조.

8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04호(號)>, 융희(隆熙) 2년 4월(月) 9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게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9면 참조.

9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금비발(金秘發) 제(第)117호(號)>, 1907년(年) 11월(月) 12일조(日條), <강원도금성경무분견소(江原道金城警務分遣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 109∼110면 참조.

9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금비발(金秘發) 제(第)117호(號)>, 1907년(年) 11월(月) 12일조(日條), <강

. 원도금성경무분견소(江原道金城警務分遣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

. 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109면 참조.

9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춘비발(春秘發) 제(第)51호(號)>, 1907년(年) 12월(月) 6일조(日條), <춘천경무서(春川警務署)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卷), 249면.

93. <십삼도창의대장(十三道倡義大將) 이인영체포(李麟榮逮浦)の건(件)>,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편(金正明編)), 제(第)1권, 38면 참조.

94. F.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1920, 61∼170면 참조.

맥켄지는 한국의 의병(義兵)을 취재하기 위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편성되고 있던 시기인 1907년 10∼11월경에 이천(利川)-충주(忠州)-제천(堤川)-원주(原州)를 거쳐 양근(楊根)에 도착해서 의병(義兵)의한 소부대를 만나보고 그들의 무기(武器)의 빈약한 상태와 탄약(彈藥)의 결핍을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즉 그가 만난 6명의 의병들이 각각 다른 5가지 종류의 무기(武器)를 갖고 있었는데 1명이 화승총, 2명이 구한국군(舊韓國軍)의 열악한 라이플총, 1명이 장난감 같은 엽총, 1명은 기병단총(騎兵短銃)을 갖고 있었고, 1명은 총(銃)이 없었다. 면제품 탄띠에는 대장만 탄환(彈丸)이 반쯤 채워져 있었고, 다른 의병들은 탄환이나 탄약이 거의 없었다(162면). 그는 한국의병(韓國義兵)들이 <빈약(貧弱)한 무기(武器)(poor weapons)>와 <고갈된 탄환(彈丸)(little ammunition)>의 상태에서 싸우고 있음을 관찰한대로 기록하였다(166면). 또한 그는 그가 만난 소규모 의병부대 대장의 그(맥켄지)에 대한 요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그는 목적한 바가 있어 나를 찾아왔다. '우리 대원들은 무기(武器)가 필요합니다'고 그는 말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용감하오, 그러나 무기(武器)는 당신이 아는 바와 같으며, 탄환(彈丸)은 거의 없소. 우리는 그것을 구입(購入)할 수 없지만 당신은 마음대로 어디든지 갈 수 있지 않소. 그러니 제발 당신이 우리 대리인으로서 총(銃)을 사다 주시오. 대금(代金)은 얼마든지 요구해도 좋소. 5천달러이건 1만달러이건 당신이 원하는대로 드리겠소. 오직 우리들에게 총(銃)만 사다 주시오!」(165면) . 맥켄지는 일단의 심부름꾼 한국소년들을 데리고 호신용 무기들을 휴대하여 의병봉기 지역을 여행했는데, 맥켄지가 양근(楊根)을 떠날 때 그의 심부름꾼 소년들은 맥켄지의 무기들을 의병(義兵)들에게 주고 가자고 졸랐다고, 「내 소년들의 일부는 의병(義兵)들이 일본인(日本人)들을 죽일 수 있도록 우리의 무기(武器)를 의병(義兵)들에게 주고 가자고 애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맥켄지의 기록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편성 무렵에 의병(義兵)들의 탄환(彈丸)은 이미 고갈 상태에 있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오직 2장의 의병 사진(한장은 중앙에 해산군인(解散軍人) 출신 의병이 서 있고 주위에 소년의병과 농민의병 등 10명이 서 있는 사진과 다른 한장의 농민의병 3명의 사진)은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연합의병부대 휘하 의병을 이 때 맥켄지가 찍어 보도한 것이었다.

95.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0일자,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속(續))>

96.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편(金正明編)), 제(第)1권(卷), 43면.

97.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04호(號)>, 융희(隆熙)2년 4월(月) 9일조(日條),<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게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9면.

98.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0일자,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속(續))>.

99. <십삼도창의대장(十三道倡義大將) 이인영체포(李麟榮逮浦)の건(件)>,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 38면 참조.

100.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0일자,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 (속(續))>.

101. 《왕산허위선생거의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實大略)》,《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의병 항쟁사자료집>, 242면 및 795면. 「선생친솔(先生親率) 감사병삼백(敢死兵三百) 입선두(立先頭) 지문외(至門外)삼십리지(三十里地) 사전군래집(俟全軍來集) 일거계공의(一擧計攻矣) 군위시기(軍違時期) 일병졸박(日兵猝迫) 장시사격심열(長時射擊甚烈) 이후원지불지(以後援之不至) 잉퇴진(仍退陣) 김규식(金奎植)·연기우구중환(延起羽俱中丸) 」참조.

102.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7∼468면.

103.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8면.

104. <경기도급기부근폭도토벌개황표(京畿道及其附近暴徒討伐槪況表)>,《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69면 참조. 이 표(表)에서 1월(月)중(中)에 경기도(京畿道)에서 의병(義兵)과 일본군(日本軍) 사이의 2개 주요 전투(戰鬪)들 중에서 이 동두천(東豆川)에서의 의병(義兵) 300의 전투가 가장 대규모(大規模)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표에서의 의병(義兵)의 손실(損失)은 물론 과장된 숫자이다.

105.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3면.

10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1일, <의병총대장(義兵總大將) 이인영씨(李麟榮氏)의 약사(略史)(속(續))>.

107.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0면.

108.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0면.

109.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4면.

110.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0∼41면 참조.

111. 이형석, <수도 진군 작전의 의의>, 《나라사랑》, 제27집, 1977 참조.

11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42호(號)>, 융희(隆熙) 2년(年) 3월(月) 12일조(日條), <제(第) 13사단참모부(師團參謨部)의 경무국(警務局)에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2∼43면 참조.

11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42호(號)>, 융희(隆熙) 2년(年) 3월(月) 12일조(日條), <제 13사단 참모부(參謨部)의 경무국(警務局)에의 통보(通報)>,《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3∼44면.

114.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31∼132면.

11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금비발(金秘發) 제(第)169호(號)>, 1907년(年) 11월(月) 22일조(日條),<강원도금성경무분서(江原道金城警務分署)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8권, 302면 참조.

116.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330면 참조.

117. F.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 146∼158면 참조. 그는 일본군(日本軍)이 방화(放火)하여 완전히 페허가 되어버린 제천읍(堤川邑) 뿐만 아니라, 그가 여행한 지역의 청주(淸州)까지의 모든 마을들의 약 2분의1이 일본군 (日本軍)에 의하여 방화(放火)되고 파괴(破壞) 되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153면).

118.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31면.

11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877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3월(月) 2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보고(報告)>,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 3면 참조.

120. <제(第)1회(回) 이인영문답조서(李麟榮問答調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43면 참조.

121.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발(警秘發) 제(第)786호(號)>, 융희(隆熙) 2년(年) 6월(月)4일조(日條),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ノ폭도(暴徒)> 참조.

122.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발(警秘發) 제(第)786호(號)>, 융희(隆熙) 2년(年) 6월(月)4일조(日條),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ノ폭도(暴徒)> .

123. 《경성일보(京城日報)》, 1908년(年) 4월(月) 9일자(日字), <한강연안(漢江沿岸)の경계(警瞥戒)> 참조.

124.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67면.

125.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국(慶尙北道警察局)), 1934, 11면 참조.

126.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84면.

127. 《경비(警備)ニ관(關)スル서류편책(書類編冊)》, 제(第)22호(號) <경비(警秘) 제(第)124호(號)>, 융희(隆熙) 2년(年) 3월(月) 20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보고(報告), 폭도토벌(暴徒討伐)의 건(件)> 참조.

128.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경비(警秘) 제(第)1349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2일조(日條), <인천경찰서장보고(仁川警察署長報告)> 참조.

129.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융희(隆熙) 2년(年) 2월(月) 22일조(日條), <경시청탐보원보고(警視廳探報員報告)>, 「적성군(積城郡) 관곡(館谷)에 거주하는 박사(博士) 경현수(慶賢秀)는 적괴(賊魁) 허위(許蔿)의 밀서(密書)를 가지고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내통(內通)하기 위하여 본월(本月) 25일(日) 출발한 모양이다.」참조.

130. 《도폭(徒暴)ニ관(關)スル편책(編冊)》, <헌병대장보고(憲兵隊長報告)> 1908년(年) 3월(月) 17일자(日字),《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9권(卷), 344면 참조.

131.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상권(上卷), 468면 참조.

132.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19일자, <적성의요(積城義擾)>

13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258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6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제(第)10권(卷), 125면.

134.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44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7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제(第)10권(卷), 145면.

135.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1권(卷), 166면 참조.

13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 30일자, <잡보(雜報)(의병발통(義兵發通)> 참조.

1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1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 환산중준(丸山重俊) 보고(報告)>. 일제(日帝)의 이 보고(報告)는 허위(許蔿) 등 의병장들의 <격문(檄文)> 발통(發通)을 모르고 있던 상태의 보고(報告)임이 문면에 드러나 있다.

138. 《경성일보(京城日報)》, 1908년(年) 5월 1일자(日字), <적도수괴(賊徒首魁) 기병(起兵)を최(催)す>

139.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해경비(海警秘) 제(第)746호(號)), 융희(隆熙) 2년(年) 7월(月) 18일조(日條), <해주경찰서장경시(海州警察署長警視)> 평도신보고(平渡信報告)>.

140.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第) 1권(卷), 166면. 여기서 1908년 5월의 의병운동의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의 원인을 일제는 1908년 3월 23일의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의 스티븐스 처단의 보도에 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4월 21일의 의병장 허위(許蔿) · 이강년(李康年) ·이인영(李麟榮) ·유인석(柳麟錫)·박정빈(朴正斌) 등의 명의로 된 의병(義兵)과 서울진입의 재거(再擧)를 알리는 <격문(檄文)> <통문(通文)>을 매개로 하여 「미증유(未曾有)의 치성(熾盛)」을 보게 된 것이었다.

14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379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4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게의 통보>,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3일자(日字) 경성헌병분대장(京城憲兵分隊長) 약사천소좌(藥師川少佐) 보고(報告)>,《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판(版)>, 제(第)10권(卷),122∼123면 참조.

14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386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5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게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4면 참조.

14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27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3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게의 통보),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1면.

144. 김윤식(金允植), 《속음청사(續陰晴史)》(국사편찬위원회판(國史編纂委員會版)), 하권(下卷), 249면, 융희(隆凞) 2년(年) 4월(月) 3일조(日條) 참조.

14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성헌병대장보고(京城憲兵隊長報告)> 융희(隆熙) 4월(月) 8일조(日條),《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5면 참조.

146.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01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8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게의 통보>,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27∼128면.

147.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80호(號)>, 융희(隆熙) 2년 5월(月) 7일조(日條), <제(第) 13사단참모장(師團參謨長)의 한국내부경무국장(韓國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6면 참조.

14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제(第)407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9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2면 참조.

14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21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2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2면 .

15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27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13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1면 참조.

15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30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5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2∼143면 참조.

15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18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2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35∼136면 참조.

15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43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0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7면 참조.

154.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26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13일조(日條), <한국주차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郎)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0면 참조.

15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43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0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7면 참조.

156.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68호(號)>, 융희(隆熙)2년(年) 4월(月) 22일조(日條), <제(第) 13사단참모부(師團參謨部)의 한국내부경무국(韓國內部警務局)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50면 참조.

157.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42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0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6면 참조.

15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581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9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61면 참조.

15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폭통(韓暴通) 제(第)48호(號)>,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6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55면 참조.

16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77,78호(號)), 융희(隆熙)2년(年) 5월(月)5일조(日條), <제(第) 13사단참모부(師團參謨部)의 한국내부경무국(韓國內部警務局)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52면 참조.

16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79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1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郎)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38면 참조.

16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통감(統監) 제(第)10020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6일조(日條), (통감부통신관리국장(統監府通信管理局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4면 참조.

16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통감(統監) 제(第)10020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6일조(日條), (통감부통신관리국장(統監府通信管理局長)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4면 참조.

164.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89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9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39면 참조.

16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80호(號)>, 융희(隆熙)2년(年) 5월(月) 7일조(日條), <제(第) 13사단참모장(師團參謨長)의 한국내부경무국(韓國內部警務局)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5면 참조.

166.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488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2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439면 참조.

167.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800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6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 환산중준(丸山重俊)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송정무(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4∼445면 참조.

16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819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8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2∼3면 참조.

16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815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8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2면 참조.

17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第)80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7일조(日條), <제(第)13사단참모장(師團參謀長)의 한국내부경무국(韓國內部警務局)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446면 참조.

171.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574호(號)>, 1908년(年) 5월(月) 12일조(日條),.<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郎)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7면 참조.

172.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보병(步兵) 제(第)12단사령부(團司令部) 수(守) 제(第) 42호(號)>, 1908년(年) 5월(月) 9일조(日條), <남부수비관구사령관(南部守備管區司令官) 항현충도(恒玄忠道)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12면참조.

17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전화(電話)>, 융희(隆熙) 2년(年) 4월(月) 20일(日) 오후(午後) 6시반(時半), <영곡경시(永谷警視)로부터 암정경시(岩井警視)에게>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48면 참조.

174.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제(第)13사단모(師團謀) 제(第)428호(號)), 융희(隆熙)2년(年) 4월(月) 27일조(日條), <북부수비관구사령관(北部守備管區司令官)의 한국내부경무국장(韓國內部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0권(卷), 156∼157면 참조.

175.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참통(韓參通) 제(第)145호(號)>, 1908년(年) 5월(月) 7일조(日條), <한국주차군참모장(韓國駐箚軍參謀長) 모전경구랑(牟田敬九郞)의 내부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 송정(松井) 무(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2면.

176.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189호(號)>, 융희(隆熙) 2년(年) 5월(月) 19일조(日條)<경시총감(警視總監) 환산중준(丸山重俊)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송정(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8∼9면 참조. 「적괴(賊魁)의 복권운동(復權運動)」. 허위(許蔿)의 대리(代理)로 박노천(朴魯天)이라는 자(者)가 좌(左)의 30개조(個條)로써 통감부(統監府)에 교섭(交涉)하고자 하니 안동거(安洞居) 이기학(李基學) 등에게 그 의(意)를 통(通)하고 경성시내(京城市內) 성언(聲言)하고 있다.

.1.태황제복위(太皇帝復位) 2.외교권환귀(外交權還歸) 3.통감부철거(統監府撤去) 4.의관복고(衣冠復古) 5.일인서임물시(日人敍任勿施) 6.형벌권자유(刑罰權自由) 7.통신권자유(通信權自由) 8.경찰권자유(警察權自由) 9.정부조직자유(政府組織自由) 10.군대시설자유(軍隊施設自由) 11.을미(乙未), 을사(乙巳), 정미(丁未)의 국적자유처단(國賊自由處斷) 12.내지(內地) 산림(山林) 천택(川澤) 금은동광물침(金銀銅鑛勿侵) 13.내지부동산매매물시(內地不動産賣買勿施) 14. 선해권환귀(船海權還歸) 15.어채리물침(漁採利勿侵) 16.교육권자유(敎育權自由) 17.출판권자유(出版權自由) 18.군용지환귀(軍用地還歸) 19.일본인거류지환귀(日本人居留地還歸) 20.철도환퇴(鐵道還退) 21.학회이외자유해산(學會以外自由解散) 22.해관세법자유(海關稅法自由) 23. 일본인상업제한(日本人商業制限) 24.일본인상업물품제한(日本人商業物品制限) 25.일본인상륙제한(日本人上陸制限) 26.국채물시(國債勿施) 27.인민손해배상(人民損害賠償) 28.은행권물시(銀行券勿施) 29.지방병참철거(地方兵站撤去) 30.일본(日本)에 현재(現在)하는 망명객등(亡命客等) 속(速)히 포래(捕來)할 사(事). 우(右) 통보(通報)함.

177.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5월 23일자, <고록풍설(姑錄風說)>.

178.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제(第)13사단모(師團謀) 제(第)617호(號)), 1908년(年) 6월(月) 1일조(日條), <북부수비사령관명령(北部守備司令官命令)>,《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191면 참조.

179.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총감(總監) 갑(甲) 제(第)12898호(號)>, 1908년(年) 6월(月) 9일조(日條), <통감부통신관리국장(統監府通信管理局長)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202면 참조.

180.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경비(警秘) 제(第)2390호(號)의 1>, 융희(隆熙) 2년(年) 6월(月) 10일조(日條) <경시총감(警視總監)의 경무국장(警務局長)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193면 참조.

181.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제(第)27호(號)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규완보고(李圭完報告)> 참조.

182.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 상권(上卷) 427면 참조.

183. 《폭도(暴徒)ニ관(關)スル편책(編冊)》,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第)746호(號)>, 1908년(年) 6월(月) 18일조(日條),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將)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郎)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송정(松井茂)에의 통보(通報)>,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 제(第)11권(卷), 196면 참조.

184.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年) 6월(月) 19일자(日字) 참조.

185. 《경성일보(京城日報)》, 1908년(年) 7월(月) 8일자(日字) <허위(許蔿)の호송(護送)> 참조.

18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9월 19일자, <허위씨(許蔿氏)의 고문(訊問)> 참조.

187. <허위판결선고서(許蔿判決宣告書)>,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별집(別集), 제 I책, 450∼452면 참조.

188.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22일자, <의장귀천(義將歸天)> 참조.

189.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24일자, <천일무광(天日無光)>. 「의병대장(義兵大將) 허위씨(許蔿氏)를 사형(死刑)에 처(處)함은 이위보도(已爲報道)하였거니와 검사모씨(檢事某氏)가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할 시(時)에 허위씨(許蔿氏)를 대(對)하여 교형사(絞刑死)를 현행(現行)하거니와 후(後)에 친족(親族)에게 혹유유언(或有遺言)이거던 상언(詳言)하라 한데 허위(許蔿)씨가 안색(顔色)을 불변왈(不變曰) 여위국사(余爲國事)타가 불행피착(不幸被捉)하여 금당사형(今當死刑)하니 취사이이(就死而已)오 친족(親族)에게 갱무타언(更無他言)이로 다 한즉 검사모씨(檢事某氏)가 왈(曰) 시신(屍身)을 수거(收去)할 자(者)가 친족중(親族中)에 유수호(有誰乎)아 한 데허위씨(許蔿氏)가 우답왈(又答曰) 사후렴시(死後斂屍)를 하족괘념(何足掛念)이리오. 지옥중(地獄中)에서 부란(腐爛)이 역위무방(亦爲無妨)하니 속행교형(速行絞刑)하라 하얏다더라.」 참조.

출처 : 맑고 밝은 세상
글쓴이 : 늘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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