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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의병 연구

_______! 2008. 7. 13. 17:34
  1) 일제의 군권침탈계획

        (1) 광무제의 강제퇴위

  일제는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후 한국 안에 일본 경찰조직을 강화함으로써 반일운동을 탄압하려고 하였다. 광무제는 을사조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1905년 11월에 궁중 고문인 헐버트(H.B. Hulbert)를 워싱턴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미국에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무효화하는 데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헐버트는 1882년 5월에 한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양국은 영원히 화평과 우호를 지키되, 만약 타국이(그 중 어느 한 나라를) 침해하는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서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미국은 한국을 지원할 의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헐버트의 요구를 외면하였다.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을사조약을 체결한 박제순 내각을 타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1907년 5월에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이 무렵인 6월에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세계의 이목을 모으게 되었다.

  공무제 고종은 1907년 6월 15일부터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침략행위의 진상을 폭로함으로써 국제 여론을 조성하여 조약을 폐기시키려고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이들 3인은 황제의 신임장을 가지고, 6월 11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 의장에게 본 회의에 참석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황제의 밀사가 헤이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자 6월 28일의 현지 신문보도를 통해 각국에 전파되었다. 7월 3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의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이어 8일부터는 이토에 의해 궁정 출입이 통제됨으로써 광무제는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는 이완용으로 하여금 광무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도록 압박하였다. 7월 16일, 각의를 소집한 이완용은 송병준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궁중에 들어가 황제에게 제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협박하였다. 결국 19일 새벽에 이완용 내각이 미리 만들어 놓은 양위 조칙(詔勅)이 반포되고, 그리고 이튿날(20일) 오전 8시에 경운궁의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약식 양위식이 일방적으로 거행되었다. 광무제 고종은 재위 44년 만에 황태자[純宗]에게 재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2) 정미7조약의 비밀각서

  광무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통감 이토는 7월 24일 아침에 이른 바 정미7조약으로 불리는「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날 밤에 순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조인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정미7조약의 조인과 동시에 시행 세목을 규정한 5개항의 비밀각서에 명시되었다. 제6조에서 외국인은 용빙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아예 일본인 관리를 각부 차관으로 채용하여 이른 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군부도 일본인 차관에 의해 군권을 상실하고 군대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와 동시에 일제가 시도한 다음 단계의 음모는 대한제국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앞서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시위 군중에 가담하였던 시위 보병연대 일부 병사들과 총격전까지 벌였던 사실에 충격을 받아 5개항의 비밀각서 중 세 번째 항목에 군대해산 문제를 삽입시켰다. 5개항의 비밀각서 중에서 제3항목은 정미7조약의 어느 항목에도 보이지 않는 무관한 것이며, 정미7조약에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는 핵심 내용인 비밀각서에 '다음 방법에 의하여 군대를 정리함'이라고 전제한 후에 제시된 3개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circle08_gray.gif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 임무를 담당하게 하고, 기타 부대는 해산할 것.
circle08_gray.gif 교육을 받은 사관은 한국군대에 잔류할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케 하고, 실지 연습하게 할 것.
circle08_gray.gif 일본에서 한국 사관을 위하여 상당한 설비를 할 것.


  그러나 이 비밀각서가 만들어지기 이전 단계의 '원안'에서 위 3개항의 내용을 살펴보면 ②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에 관계되는 관아를 전폐할 것. ④ 해산한 하사와 졸병 중에서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가급적 실업에 종사토록 할 것. 그 방법은 첫째,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킬 것, 둘째, 둔전병(屯田兵)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이라고 한 조항은 비밀각서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내용은 '비밀각서'의 핵심이며, 동시에 '정미7조약'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방침이 수립되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이 파견되어 경성 이남의 수비를 담당함으로써 기존의 경성 이북지역을 담당하는 제13사단과 함께 전국을 양분하여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수도권의 치안 확보를 위하여 경성위수사령부를 신설하여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2) 군대해산과 해산군의 항쟁

        (1) 군대해산의 과정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소멸시키기 위해 근대적 군제를 개혁할 것을 강요하였다. 대한제국군이 국가의 막대한 예산으로 운용하는 용병(傭兵)이기 때문에 의무감이 부족하다고 단정하고 직업군인제도를 폐지하여 모병에 의한 새로운 군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모병령은 군제의 개혁과는 동떨어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음모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통감부는 1907년 7월 24일에 정미7조약이 조인된 이후부터 대한제국군 해산의 수순을 구체적으로 밟아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첫단계로서 대한제국 군대에 '금족령(禁足令)'을 내려 이동을 금지시키고 주요 탄약고 등도 장악함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미 주둔하고 있는 보병 제13사단의 주요 부대들이 경성으로 집결하는 가운데, 추가로 보병 제12여단 증원부대가 대구·대전·용산·평양의 주요 거점지역과 15개 부속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인천 앞바다에는 일본 구축함 4척이 대기하고 제2함대가 연안해역을 초계함으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대장은 31일 밤에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를 앞세우고 창덕궁에 입궐하여 미리 준비해 간「군대해산조칙」을 재가하도록 순종을 강박하였다. 결국 순종 황제는 협박에 못이겨 이를 재가하였는데, 그 조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이 생각컨대, 나라 일이 다난한 이때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민생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이 급선무다. 지금의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상하가 일치되지 않고 국가를 완전하게 방위할 수도 없다. 짐은 이제 군제를 쇄신하여 사관(士官)의 양성에 전력하고 장차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군사력을 갖추려 하므로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는 뽑아놓고 나머지는 모두 일시 해산하게 한다. 짐은 너희 장졸들의 그간의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銀金)을 내리니, 장병들은 짐의 뜻을 따라 각기 생업으로 돌아가 차질없기를 바라노라."


  이와 함께 군대해산으로 인하여 야기될 수 있는 폭동을 진압할 임무를 통감에게 위임하는 황제의 조칙도 발표되었다. 7월 31일부로 반포된 조칙은 "군대해산 때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 조칙을 거역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자를 진압하는 임무를 통감에게 의뢰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중앙군과 지방군을 막론하고 부대별로 3차로 나누어 축차적으로 해산시킨다는 기본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중앙군인 시위연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결정이 7월 28일부(극비 제105호)로 일본 총리대신에게도 보고되었다. 그리고 중앙군을 해산할 구체적 행동방법 2개항을 다음과 같이 마련하였다.

제1, 군부대신은 헌병사령관, 여단장, 보병연대장, 보병대대장, 기·포·공병대장을 소집하여 조칙을 전하며, 해산순서 제2항 포고를 제시할 것.

제2, 전항(前項)의 제관(諸官)은 곧바로 그 부하에 대하여 대신이 전한 조칙 및 포고를 명시하여 이때 각 대장과 동시에 일본병 약 2개 중대를 각 병영에 동행케 하고 필요가 있으면 병력을 사용할 것.

비고, 제1항의 보병대대장 중에는 지방대장도 포함된다.


  시위연대의 해산계획과 함께 군 관련기관 및 진위대 8개 대대에 대한 해산계획도 수립되었다. 1차로 8월 1일에 해산을 단행하고, 2차는 8월 3일에서 9월 3일까지 1개월 간에 걸치며, 3차는 전후에 별도로 지정한다는 일정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의 군사기관 및 부대별 해산여부와 해산 일정이 확정되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개시일로 계획된 8월 1일 아침 7시에 군부대신 이병무가 시위혼성여단장 참장 양성환을 비롯하여 주요 지휘관인 연대장, 대대장, 기병·포병·공병대장을 일본군 사령관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집결시켰다. 이어 오전 10시에 해산식을 거행할 예정임을 비로소 공개하고 하사·병졸을 비무장으로 10시까지 훈련원 연병장에 집결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12시가 지나서도 훈련원 연병장에 집결한 인원은 1천 명에도 미달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2시까지 집결한 1,812명의 인원만으로 겨우 해산식을 강행하였다.

  한편, 이들의 소극적인 저항과는 달리 해산대상 인원 3,441명의 47%에 해당하는 불참자 1,629명 중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부대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킴으로써 군대해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그리고 제2연대 제3대대원으로서 불참한 186명과 제1연대 제3대대의 불참자 103명 등도 병영을 이탈하여 무장봉기에 가담하였다.

  진위대는 전국에 걸쳐 분산된 조직이기 때문에 약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제의 계획상 제2차에 해당하는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약 1개월간이 진위대의 해산 대상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8월 10일 이전까지 진위대 주력부대를 우선적으로 해산시키려고 하였으므로 7개 대대본부가 8월 10일까지 모두 해산 계획 속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진위대는 불과 7일 만인 8월 10일까지 몇몇 분견대를 제외하고 3분의 2가 넘는 병력이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2) 해산군의 항일전쟁

  시위대(侍衛隊)의 적극적인 거부 항쟁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박승환 대대장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3월에 보병 참위로서 시위대에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친위대를 거쳐 1904년 2월에는 참령으로 진급하여, 1907년 4월 30일부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8월 1일 아침 7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로 집결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중대장 정위 사재흡을 대리로 참석시켰다. 그후 부대로 돌아온 중대장 사재흡의 보고를 받자 명령에 따라 일단 전 대대원의 무기를 무기고에 반납하도록 지시한 다음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였다. 이때 연병장에 집결하고 있던 대대원들은 무기고에서 무기와 탄약을 꺼내어 무장하였고, 인접한 제2연대 제1대대 대원 591명도 훈련으로 출발하려다가 다시 무장을 갖추고 함께 봉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의 제9·제10중대의 각 1개 소대가 병영을 접수하기 시작하기 위하여 도착하자, 시위대가 일본군 양개 소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공병폭파조가 시위대 병영의 일부를 폭파하자 병영 안에 있던 시위대 제2연대 1대대원들은 건물을 포기하고 서소문 밖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원들도 남상덕 부위의 지휘 아래 일본군 제10중대의 정문돌파를 수차례나 저지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를 지휘하던 남상덕 부위가 전사하는 등 전사자가 속출하자 퇴각하였다. 시위대 양개 대대는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1천 명의 부대원 중에서 68명이 전사하고 1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백병전을 벌이던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도 42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진위대는 지방에 분산되어 주둔하였으므로 시위대에 비하여 항쟁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범위도 광범위하여 여러 지방을 이동해 가면서 장기간 계속하였다. 진위대의 해산 계획에 의하면 8월 3일에 수원의 진위 제1대대 본부를 비롯하여, 진위 제1대대의 4개 분견대 중 하나인 개성 분견대와 청주 제2분견대 본부가 해산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그리고 4일에는 대구의 진위 제3대대, 5일에는 진위 제1대대 소속 안성 분견대의 해산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추진되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은, 진위 제5대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원주에 대대본부를 둔 진위 제5대대는 편제상 4명의 장교와 251명의 하사·졸로 편성되어 10월에 해산계획이 잡혀 있었다. 이러한 원주 진위대는 시위대 해산 소식을 8월 1일에 전해 듣고 있었으나, 대대장 참령 홍우형이 해산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하자 이 틈을 이용하여 봉기하였다. 대대장 직무대리인 정위 김덕제와 특무정교 민긍호가 주동이 된 원주 진위대는, 5일 오후에 무기고를 부수고 소총 1,200여 정과 실탄 4만여 발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남은 총기와 실탄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함께 무장함으로써 진위대원 250여 명을 주축으로 1천여 명의 무장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경성의 일본군 사령부는 일본인들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고는 토벌부대를 급파하였으나, 진위대가 8일에 이미 외곽을 빠져나간 다음에 도착하였으므로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였다.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여 이미 활동을 전개하던 8월 9일에 강화 분견대도 봉기하였다. 8월 9일에 진위대 하사 출신의 유명규와 강화 분견대의 부교 지홍윤 등이 병사들을 규합하여 친일 군수 정경수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강화 분견대의 봉기군 50여 명은 중과부적으로 지탱하지 못하였으며, 결국에는 강화 읍성마저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원주의 진위 제5대대 본부와 수원의 진위 제1대대 강화 분견대의 조직적인 해산거부 투쟁 이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진위대의 반발이 있었다. 청주에 대대본부를 둔 진위 제2대대 휘하 2개 분견대 중의 하나인 홍주 분견대 대원 50여 명은 8월 10일의 해산 예정일을 앞두고 봉기를 시도하다가 도중에 실패하고, 대구의 진위 제3대대 휘하 6개 분견대 중의 하나인 진주 분견대도 9월 2일의 해산 예정일을 앞두고 봉기하였다가 진해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안동 분견대의 진위대원은 8월 16일 해산에 반대하여 병영을 탈출하는 병사가 속출하였다.

  한편, 이 무렵인 1907년 7월, 고종 황제의 양위에 반발한 전국적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0월에 소장을 대장으로 하는 '한국주차헌병대'로 개칭하여 지위를 크게 격상시켰다.
 

      3) 정미의병의 항일전쟁

        (1) 충청·경기도 지역의 전투

  1907년 8월, 원주지역을 장악한 원주 진위대의 봉기군은 의병부대로 전환하여 평창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1개 부대는 민긍호가 지휘하고, 다른 부대는 김덕제가 지휘하였다. 김덕제 부대는 평창~대관령~동해안 지방으로, 민긍호 부대는 평창~영월의 산간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 보병 제49연대 시모바야시(下林)지대가 8월 10일에 원주에 도착하여 부근지역을 수색할 때, 민긍호 부대는 이미 주천으로 이동하여 제천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이강년은 정미년(1907년) 3월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하려고 지평·횡성·강릉·단양 등지를 전전하다가 단양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부상을 입고 제천에서 북쪽 10여㎞ 떨어진 배향산에서 치료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이때 봉기한 원주 진위대에 합류하였다. 이강년은 민긍호·김덕제 부대가 무장하고 난 나머지 무기 중의 일부를 입수하여 리를 배향산으로 옮긴 다음 수백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강년은 전 판서 심상훈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았다.

  "오호라, 내 죄가 커서 하늘이 돌보지 않는 것인가. 사나운 이웃나라가 틈을 엿보고, 역신(逆臣)이 권세를 가지고 노니, 4천년 종사(宗社)와 삼천리 강토는 하루 아침에 짐승의 땅이 되었도다. 나의 한가닥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종사와 백성을 생각하면 애통하기 그지없다. 선전관 이강년을 도체찰사로 삼는다. 양가(良家)의 재자(才子)들을 7로(七路)에 보내어 각각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하는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하라. 스스로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를 만들어 사용하라. 만약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나 수령들이라도 먼저 베고 파직하여 처리하라. 그것이 경기(京畿)를 보전하는 길이니,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라. 이 문서는 비밀리에 내리는 것이니, 잘 알아서 거행하라."


  이에 용기 백배한 이강년 부대는 10일에 배향산을 출발하여 제천으로 남하하였다. 이강년 부대가 13일 제천을 무혈로 점령하자 민긍호 부대가 주천에서 제천으로 이동하여 이강년 부대와 합류하였다. 이들 두 부대가 제천에서 전열을 정비중이던 15일, 일본군이 원주에서 제천으로 이동한다는 급보가 전달되었다. 이강년이 제천 서쪽의 천남리 북쪽 고지에 부대를 매복시켰으나 이날 일본군 1개 소대가 의병의 매복 지점을 피하여 제천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부대와 민긍호 부대는 읍내에서 야영중인 일본군을 급습하였고, 일본군은 타격을 입고 제천을 탈출하여 충주로 패주하였다.

  그후 이강년 부대는 19일에 주천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이강년은 40여 명의 대소 의병장들에게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자,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재편성하였다.

중군장 : 김상태(金相台)   좌선봉장 : 하한서(河漢瑞)   우군선봉장 : 백남규(白南奎)   전군장 : 윤기영(尹基榮)   좌군장 : 이용로(李鏞魯)   우군장 : 이중봉(李重鳳)   감군장 : 이세영(李世榮)   총독장 : 이만원(李萬源)   사서(참모) : 강순희(姜順熙)


  부대의 진용을 정비한 이강년은 충주를 공략하기로 하고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 부대는 제천~주포~충주로 진격하였다. 8월 21일에 제천을 출발한 이강년 부대는 남한강을 도하하여 23일 오전에 충주성 동쪽 10여리 떨어진 마지막 고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충주로 진출한 민긍호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단독으로 충주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제천~단양~죽령을 거쳐 경상도 풍기로 남하하였다.

민긍호.이강년 의병부대의 전투상황.  경성에서 내려온 일본군 이다찌(足達) 지대는 23일 아침에 제천에서 의병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민가에 방화하여 제천읍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충주 공격에 실패한 이강년 부대는 단양을 거쳐 풍기로 남하하였고, 민긍호 부대는 충주에서 장호원으로 북상하였는데, 장호원 지역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긍호 부대와 이천지역의 허준(許俊 : 전 시위대 중대장)부대, 양근지역의 조인환부대, 여주지역의 이구재부대, 장호원 지역의 방관일 부대 등은 각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나갔다. 이들은 소규모의 일본군과 일본경찰 초소를 기습하고,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의 통신망을 차단하는가 하면, 양말 호송대(糧 호송대 : 보급 수송대)를 습격하여 일본군의 탄약과 식량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토벌대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가 급증하자 민긍호 부대는 홍천지역으로, 조인환 부대는 파주지역으로, 이구재·방인관 부대는 지평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 토벌대도 용문사를 소각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다가 복귀하였다.

  장호원 지역의 일본군 토벌대가 원대로 복귀한 뒤에도 제천지역의 일본군(이다찌 지대)은 원주 주변과 평창·영월 등지에 주력을 투입하여 의병 수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제천의 이강년 부대는 풍기지역으로 남하하였고, 민긍호 부대도 장호원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후 9월에 민긍호 부대는 홍천을 장악하고 해산 군인 250명을 주축으로 4백여 명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였다. 민긍호는 이들을 이끌고 홍천을 근거지로 삼아 새로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횡성·양덕원·춘천 등지를 세력권에 두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10월에 홍우철을 강원도 선유사로 보내어 민긍호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민긍호는 이를 반박하면서 대일 항쟁을 계속할 것임을 거듭 천명하였다.

  8월 말에 장호원 지역을 수색하던 일본군 토벌대가 원대로 복귀하고 나자, 장호원 서남쪽 진천에서 다시 서북쪽의 장양리를 중심으로 하여 의병이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9월 하순에 일본군 남부 수비 관구 사령관이 진천지역 의병에 대한 토벌계획을 세우고 10월 6일부터 8개 중대의 토벌대를 편성하여 장양리를 목표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그러나 의병은 일본군의 작전기도를 사전에 간파하고, 10월 1일부터 5일 사이에 소부대로 분산되어 청안~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이동하였다. 활동무대를 옮긴 의병부대들은 10월에 들어서면서 지평~횡성 산간 지역의 의병들과 연합 진영으로 '관동 창의대'를 결성하고 문경의 명망 있는 유학자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관동창의대장 : 이인영(李麟榮)   총독장 : 이구재(李九載 : 球采)   중군장 : 이은찬(李殷瓚)   좌군장 : 방인관(方仁寬)   우군장 : 권중희(權重熙)   유격장 : 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 : 정봉준(鄭鳳俊)   우선봉장 : 김병화(金炳和)   후군장 : 채상준(蔡相俊)   운량관 : 현이보(玄履甫)   재무관 : 신창광(申昌光)·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 : 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 : 이귀성(李貴成)


  이인영 부대는 2천여 명으로 구성되어 원주와 충주를 점령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서울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토벌대와 지평~삼산리 사이의 구둔치 전투에서의 실패로 삼산리의 근거지를 잃게 되어, 일부 병력이 분산된 가운데 원주 부근의 산간지역을 전전하면서 새로운 기지의 확보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해산 이후 해산 군인을 포함한 각계 각층의 광범위한 참여로 의병의 세력이 전례 없이 신장되었다.

  이인영은 이를 계기로 서울로 진공하여 일본 통감부와 매국 내각을 도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선 11월 하순에 각 도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전 의병의 대동단결을 호소하고, 12월까지 경기도의 양주(楊州 : 의정부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관에도 격문을 돌려, 한국이 처한 입장을 알리고 '의병이 일본의 주장과 같은 단순한 폭도나 비도(匪徒)가 아니라 순수한 애국단체이니, 열강제국(列强諸國)은 의병을 국제공법상의 전쟁 단계로 인정하고,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성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해외 동포들에게도 일본의 타도를 촉구하는 영문의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을 보내기도 하였다.

  관동 창의대장인 이인영은 각 도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낸 다음, 관동 창의대를 이끌고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의병활동이 용이한 양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호응한 각지의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부터 이인영이 구상한 연합 의진의 결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인영의 관동 창의대는 양주지역의 허위부대로부터 먼저 협조를 구할 수 있었는데, 당시 허위는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 연기우·김규식 등을 거느리고 연천·적성·양주 등지에서 세력을 크게 떨치는 중이었다.

  허위는 유학자이면서도 전술과 전략에 능통하여 그 동안 경기지역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따라서 양주에서의 연합 의진 결성문제는 허위와 을미의병 당시 그의 동지였던 관동 창의대 중군장 이은찬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허위는 이은찬과 협의하여, 전국 13도의 의병부대를 통합 지휘할 수 있는 사령부인 '13도 창의대'를 편성하기로 하고,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관동 창의대의 참모진을 골간으로 하여 지휘 부서인 원수부를 구성한 다음, 도별 의병부대를 원수부 산하의 단위 부대로 삼아, 총대장인 이인영이 통합 지휘하기로 하였다.

  이인영은 상징적인 총대장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작전지역인 경기지역의 지리와 전술전략에 밝은 허위가 군사장이 되어 13도 창의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도별 단위 부대장은 다음과 같이 선임되었다.

경기도·황해도 : 진동 창의대장 권중희, 충청도 :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 강원도 :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 경상도 : 교남 창의대장 박정빈, 전라도 : 전라 창의대장 문태수, 평안도 :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 함경도 :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

  허위는 13도 의병 연합 진영을 편성한 다음, 12월 중에 서울 진공 계획을 아래와 같이 수립하였다.

① 각 도의 의병을 집결시켜 전력으로 서울로 진공, 일본군을 격멸하고 통감부를 점령하여 일본세력을 척결한다.
② 동대문을 최초의 공격목표로 선정한다.
③ 동대문 공격일자는 1908년 2월 2일(음 1. 1)로 예정한다.
④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공격준비 지점을 설정하여 각 부대의 병력을 집결시킨다.
⑤ 공격개시 전에 서울 성안에 공작원을 투입하여, 의병부대의 공격과 동시에 내응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허위는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구리의 수택리 일원을 공격준비 지점으로 선정하고, 1월 하순까지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각 도의 의병부대들이 집결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사령장 김규식은 시위대의 병사였던 윤수정을 도성 안에 잠입시켜 형세를 살펴 의병부대에 보고하게 하는 한편, 전 시위대 부위인 백낙정과 함께 성안에서 내응할 병력을 모으도록 하였다. 이에 윤수정은 성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백낙정은 은밀히 중서(서울의 행정구역인 5서의 하나)의 대빈궁에 1백여 명의 동지를 모으고 내응할 태세를 갖추었다.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본군은 주한 일본군의 병력을 증강시켜, 7월 하순에 제12여단이 증파한 후로 전국을 2개 관구로 나누었다. 북부 수비 관구는 제13사단이, 남부 수비 관구는 제12여단이 각각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서울은 북부 수비 관구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리고 군대해산에 따르는 수도권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제13사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경성위수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2월에는 다시 대대규모의 임시파견 기병대를 증파하여 대의병전에 투입하였으며, 종래 228명이던 제14헌병대도 주차헌병대로 개편하면서 12월 말에는 1,400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따라서 서울에는 보병 6개 중대, 기병 2개 중대, 포병 1개 중대, 공병 1개 중대 외에 헌병과 경찰병력을 합치면 1개 연대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13도 창의대가 작전에 돌입할 무렵인 1908년 1월 28일(음 12. 25)에 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자, 그날로 군사장 허위에게 군무 일체를 위임하고 부친의 장례를 위해 문경으로 귀향하였다. 지휘관을 물려받은 허위는, 원수부의 병력 3백명을 선발대로 이끌고 양주를 출발하여 수택리에 이르러 통제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전 의병 부대를 24진으로 재편성하여, 경춘가도를 따라 동대문으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일본군은 1월 25일부터 동대문 밖에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다가, 허위의 선발대가 나타나자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허위의 선발대는 주력의 도착을 고대하면서 항전하였으나 그 동안에 부장을 비록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다시 양주로 퇴각하였다. 결국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 통감부를 타도한다는 13도 창의대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허위와 이은찬 등은 양주를 거쳐 1908년 2월에 임진강 유역으로 다시 북상하였다. 이곳에서 허위는 당시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중이던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 부대와 박종한·김수민·김응두 부대 등 새로운 의병부대들을 망라한 여러 의병부대들을 통합 지휘하였다.

  4월에 허위는 이강년이인영유인석박정빈 등과의 연명으로 전국 13도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면서 서울진공작전을 재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6월에 영평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므로 실패하고 말았다. 허위는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08년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허위가 순국한 후로 임진강 일대의 의병은 형세가 약화되었으나, 김수민 부대는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면서 김수민의 뛰어난 지휘력으로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눈부신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1908년 10월 상순에 김수민 부대는 장단지역에서 한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입, 일본인들을 처단하고 강화도를 장악하였다. 10월 하순에는 정족산 전등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토벌대(오야마 소대)를 격퇴하는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그후 일본군 토벌대가 증강되자, 재빨리 강화도를 탈출하여 다시 그 북쪽의 황해도 지방으로 이동해 갔다. 11월 하순에 강화도를 탈출한 김수민은 서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단신으로 서울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해 12월 17일 처형당하였다.

  허위와 김수민이 일본군에게 체포된 후로 13도 창의대의 중군장이었던 이은찬이 이끄는 부대가 이 지역의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1908년 12월부터 양주·포천·영평·연천·삭령·금천·배천·연안 등지와 황해도 서남 해안의 도서들에서, 적게는 10~20명, 많게는 100~200명 규모의 의병부대들이 활발한 활동을 보이게 되었다.

  이은찬은 정용대·윤인순 등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연백 지방과 연평도·증산도 등 도서 지방을 왕래하면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다가 1909년 2월 27일 다시 양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석우리에서 일본군의 헌병·경찰 부대와 격전을 벌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부대를 잠시 해산시키고, 서울에 잠입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이은찬이 3월 11일에 용산 정거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6월 27일에 순국하자, 임진강 유역에서의 의병활동도 쇠퇴하게 되었다.
 

        (2) 강원·경상도 지역의 전투

  이강년 부대는 1907년 8월에 충주 공격에 실패한 후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경상도의 풍기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다시 적성~당포를 거쳐 9월 7일에 문경에 도착하여 청풍의 조동교 및 여주의 김현규 부대와 합류하였다. 이강년은 조령과 이화령(문경 서쪽 8㎞)에 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문경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무렵인 9월 3일에 문경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일본인 경무 분견소와 우편 사무소를 습격함으로써 이 지역 일본인들이 함창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남부 수비 관구 소속의 보병 제14연대장 기쿠치 대좌는 토벌대(제14연대<대구> 및 제47연대<대전>와 기병 반개 소대, 산포병 1대, 공병 수명)를 편성하였다. 5개 종대로 편성된 토벌대는 각 종대별로 다음과 같이 지역을 분장하였다.

제1종대(藤田 대위) : 영천에서 봉화로 북상, 지역 수색
제2종대(江澤 소좌) : 대구에서 안동으로 진출, 예천·풍기·봉화 지역의 적정 수집
제3종대(菊池 대좌) : 대구에서 선산~상주~함창을 거쳐 문경으로 진출
제4종대(水野 대위) : 봉화에서 소백산맥 남쪽을 따라 함창으로 진출
제5종대(生田目 중좌) : 대전에서 화령장~함창으로 진출

  일본군 토벌대가 문경지역으로 집결하고 있는 동안, 이강년 부대는 일본군과 한차례 접전을 치르고, 10일에 모항령(毛項嶺)에서 문경 동쪽의 갈평으로 이동하다가 갈평에서 추격대에 타격을 가하고 단양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일본군 제2종대가 영주를 중심으로 적성·죽령·풍기 지역을 정밀 수색하고 있는 동안, 이강년 부대는 단양을 거쳐 18일에 영춘으로 북상하여 토벌대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이강년 부대는 영춘 의병장 이명상 부대와 통합하고, 그 동안 삼척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한 소모장 원건상 부대도 합류하였으므로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강년 의병부대의 전투상황.  이강년 부대가 영춘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신돌석 부대가 해산 군인들을 흡수하여 다시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군 제14연대장(기쿠치 대좌)은 영춘과 동해안 지역에 대한 의병 토벌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9월 25일에 이강년 부대는 일본군 토벌대(제11중대, 西岡 대위)가 적성에서 영춘으로 진출함에 따라, 영춘에서 접전을 치른 뒤 영월로 북상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10월 6일에 영월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또 한차례 접전을 벌이고 영춘으로 다시 남하하여 남한강~임현(영춘 서북쪽 10㎞)~신평(임현 서북쪽 17.5㎞)을 거쳐 제천의 송한(신평 북쪽 3㎞)으로 진출한 후 배향산으로 북상하였다.

  이강년 부대가 충청도 단양과 경상도 풍기 지역을 잇는 죽령을 차단하자, 일본군 수비대 병력이 죽령으로 집중되었다. 11월 10일에 죽령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강년 부대는 소백산을 거쳐 영춘으로 이동하였다가, 11월에 영춘에서 의풍(영춘 동쪽 10㎞)~고치령(의풍 남쪽 5㎞)을 넘어 순흥(의풍 남쪽 15㎞)을 공격하였다. 이때 신돌석 부대도 함께 순흥 공격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순흥의 일본군 헌병 분견소와 경찰 관서를 파괴한 다음, 이강년 부대는 의풍으로, 신돌석 부대는 봉화에서 동북쪽으로 16㎞ 떨어진 서벽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이강년 부대는 의풍 북쪽의 영춘으로 남하하던 중, 11월 26일에 영춘 동쪽에서 일본군 중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이 접전에서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열이 무너지자 일본군과의 접촉을 끊은 채 죽령 부근으로 남하하여 전열을 수습하였다. 죽령지역에서 부대를 수습한 이강년은 백남규·권용일 등으로 하여금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나머지 참모진과 함께 충청도 지역의 의병을 모집하면서 경기지역으로 북상하였다. 단양을 거쳐 남한강을 건너 제천으로 향하던 중, 12월 16일에 임현 부근에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진로를 바꾸었다. 28일에 평창을 거쳐,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하여 1908년 정월에 소양강을 도하, 경기도 가평 서북쪽 18㎞의 용소동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부대는 13도 창의대의 서울 진공 계획에 맞추어 공격준비 지점인 수택리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강원지역의 민긍호 부대도 대장인 민긍호가 1908년 2월에 충주 수비대 순사대에 체포되었으므로, 역시 이강년 부대와 같이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1908년 1월 8일 경기도 동북단의 용소동에 도착한 이강년 부대는, 3월 하순에 일본군 토벌대와 용소동에서 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하여 부대가 분산되었다. 이에 이강년은 병력을 수습하면서 다시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4월 2일에 낭천의 간척리로 이동한 후 인제를 거쳐, 10일에 설악산 백담사로 진출하였다. 백담사에서 병력을 다소 보강하여 전열을 정비하던 중인 13일에 다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강년 부대는 신흥사로 옮겼다가 양양~강릉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월 상동의 운기리에서 백남규권용일 두 의병장이 이끄는 5백 명의 의병부대와 합류하였으며, 삼청 의병장 성익현의 5백여 명의 의병도 합세하였으므로 일시에 대부대가 되었다. 이같이 이강년 부대가 영월지역에 출현하자, 태백산 일원의 군소 의병부대들과 일월산 일대의 신돌석 부대 등이 활기를 되찾게 되어 태백산·일월산 지역 의병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강년 부대는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남하하던 중, 일본군 영주 수비대를 서벽에서 포위 섬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내성(봉화)으로 진격하여, 일본군 헌병 및 경찰 병력과 6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내성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일본군 안동·영주·함창 수비대 병력이 내성으로 몰려들자, 이강년 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서벽으로 철수하였다.

  그후 이강년 부대는 내성 동쪽의 재산지역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다가, 6월에 일본군 수색대 20여 명이 출동하자 재산 서쪽 20리 지점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일본군과 재산에서 다시 격돌하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에 이강년 부대는 황지로 북상하여 배향산에 숨겨둔 무기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제천·충주 수비대 병력이 이강년 부대의 토벌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포기하고 평창 서쪽으로 12㎞ 떨어진 사자산으로 북상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제천평창 지역을 전전하면서 부대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탄약도 더 이상 보충할 수가 없었다. 겨우 70여 명의 병력으로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하다가 청풍 동쪽 작성에서 일본군 제천 수비대의 기습을 받고 와해되었다. 그 뒤, 이강년은 서울로 압송되어 10월 13일에 51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한편, 신돌석은 혼자서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영덕에서 부하인 김상렬의 집에 투숙하고 있다가, 김상렬 형제가 권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정미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이강년 부대와 신돌석 부대가 1908년 말을 전후하여 그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 종식은 곧 충청·강원·경상 3도 의병의 전반적인 활동의 종식을 뜻하는 것이었다.
 

        (3) 전라도 지역의 전투

  1907년 2월에 양한규·박재홍 부대가 남원 전투에서 패전하고, 4월에 고광순 부대가 동복 전투에서 실패한 이후로 호남지방에서 의병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에 광무제가 퇴위하고 8월에 군대가 해산되는 등 상황의 급변으로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정미의병 봉기에 선도적 역할을 한 김동신은, 을사의병 당시 충청도 홍산에서 기병한 민종식 부대의 선봉장으로서, 전라도 지방에서의 호응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었다. 무주 덕유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민종식 부대의 홍주 공격을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때 맞추어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고 동지 규합에 노력하던 중에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9월 10일에 병력 80여 명으로 순창의 우편취급소와 경무 고문 분파소를 습격하고, 18일에 구례 순사 주재소를 급습한 다음, 경상도 서부 지역의 안의·거창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진해만 중포병 대대에서 오야마 대위가 지휘하는 일부 병력을 진주 파견대로 삼아 안의·거창 지역의 의병을 공격하게 하였다. 김동신 부대는 10월 14일부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일부는 서북쪽의 무주지역으로, 다른 일부는 서남쪽의 하동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후 하동지역에서 구례~남원을 거쳐 용담(금산 남쪽 17.5㎞) 지역으로 북상하여 진안 지역의 의병과 함께 운장산(용담 서쪽 10㎞)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역시 을사의병으로 봉기하였던 고광순은, 동복에서 관군에 패하였으나 9월 11일에 담양 운산리에서 재봉기하였다. 고광순 부대는 을사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안 근친들을 중심으로 지휘부서를 편성하고, 담양에서 곡성을 거쳐, 15일에 동복의 순사 주재소를 공격함으로써 동복에서의 패전을 설욕하였다. 이들은 16일에 곡성을 거쳐 구례로 진출한 후, 연곡사(화개장 서북쪽 7.5㎞)에 진영을 설치하고 전투력 배양에 주력하였다.

  고광순 부대가 연곡사에서 한 달 가까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김동신 부대가 화개장 지역으로 이동해 오자, 이들을 추격하던 일본군 진주 파견대도 화개장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전주 수비대와 광주 수비대장 기노 대위가 이끄는 1개 소대를 전라도 쪽으로 출동시켜 진주 수비대와 협력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광순은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각 1개 군을 거느리고 문수동으로 급진하여 일본군을 격멸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출동한 후인 10월 17일 새벽에 진주 수비대가 연곡사의 고광순 부대 본영을 급습하자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였으나, 대장 고광순과 도총 고제량 등 22명이 전사하고, 고광순의 아우이자 부장인 고광훈은 포로가 되었다. 결국 고광순 부대는 재기한 지 1개월 만에 또다시 와해되고 말았다.

  10월에는 이남규가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뒤이어 금산·진산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우편 취급소·세무서·일본인 가옥들을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이 무렵 10월 10일(음 9. 4)에 임실의 유생인 이석용은 전수용(본명 기홍) 등과 함께 진안에서 창의 동맹단이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장수·진안 지역에서 일진회원들을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자, 일본군 남부 수비 관구 사령관 쓰에요시(환길충도) 소장은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수비대를 동원하여 용담·금산·진산·고산 지역의 의병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들이 서부 경남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리산·덕유산 등 심산으로 잠적하였다가 이들 일본군이 원대로 복귀하자, 진안·용담·고산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밖에 익산의 이규홍이 그의 부친 이기영의 후원 아래 의병을 모집하고 총기를 구입하여 병력 250여 명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한 다음 12월 10일(음 11. 6)에 익산에서 고산을 거쳐 용담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1908년에 들어서 호남지방의 의병 세력이 확장되자, 보병 제14연대장 기쿠치 대좌는 대구의 제14연대 제1중대와 합천·함양·하동·진주·구례·남원·임실·순창·장성·고창·영광·고부·전주·나주 등지의 수비대를 총지휘하여 15개 종대를 편성, 2월 7일부터 3월 7일까지 1개월 동안 해당 수비 지역의 의병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였다. 일본군이 전라도 전역에서 1개월 동안이나 장기적으로 의병을 수색하게 됨으로써 그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병부대들은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김동신은 일시적으로 부대를 해산하고 고향인 충남 회덕에서 신병을 치료하다가 6월 8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또 이규홍 부대는 용담지역에서 공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가 5월 16일(음 4. 17)에 해산하였다. 이석용 부대는 진안지역에서 팔공산(임실 동쪽 16.5㎞)으로 이동하여, 21일에 팔공산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다. 이때 23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고 더 이상 부대행동이 어렵게 되자 10월에 부대를 해산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기우만과 광주·나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던 기삼연은 전주 감옥에서 탈출한 후 은거하고 있다가, 1907년 9월 말에 장성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호남의 유림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기삼연은 호남 전 지역의 의병장들을 총 망라한 '호남창의맹소'를 결성하였다. 기삼연 부대는 장성지역에서 대오를 정비한 다음 10월 29일(음 9. 23)에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서쪽 법성포로 진출하였다.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고, 창고의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군 광주 수비대는 각 분둔대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토벌부대를 편성하고, 1월 24일부터 광주·나주·장성·함평·순창 등지를 수색하였다. 기삼연은 본대 3백여 명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담양 동북쪽 18㎞)의 산성에서 담양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던 중, 일본군과 경찰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30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포위망을 탈출한 후 부대를 해산시키고, 민가에서 은거하며 새해를 맞이하다가 설날 아침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튿날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한편, 호남창의맹소의 선봉장인 김태원(일명 김준)은 동생 김율과 함께 함평 출신 조경환을 포섭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하고, 1908년 1월에 함평읍의 순사 주재소와 군청을 급습하여 일본 군경을 격멸한 후 광주 무등산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 토벌대가 공격하자 일거에 격파하여 토벌대장인 가와미쓰 조장을 사살하고, 그가 소지했던 쌍안경과 군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후 김태원 부대 80여 명은 장성~함평 등지로 이동하다가 3월 21일에 장성 광곡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에 타격을 가한 다음 부대를 분산시켰다. 이때 김율은 20명을 이끌고 이동중에 광주 월정리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포로가 되었고, 김태원은 4월 25일에 박산(광주 서쪽 16㎞)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격전을 벌이다가 부하 2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고창지역으로 이동했던 김용구 부대 150명은 1908년 2월 21일에 장성 탑정리에서 일본군 기쿠치 토벌대의 포위망에 빠져 7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김용구는 장성에서 일본군 포위망을 탈출한 후 다시 부대를 수습하여 활동을 계속하다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4월에 부대의 지휘권을 박도경에게 위임하고 장성 백암산으로 들어갔다.

  진안에서 이석용과 함께 봉기하였던 전수용은 1908년 4월에 호남창의맹소를 재건하기로 하였으나, 이미 김태원마저 전사하여 호남창의맹소가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으므로, 나주 의병장 오성술과 제휴하여 본격적인 부대 재건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전수용 부대는 1908년 8월 21일에 함평에서 영광의 불갑산(영광 동남쪽 10㎞)으로 이동하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선봉장 정원집 군의 선전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대파하였다. 그후 나주 석문산을 거쳐 11월에 장성 대명동에서 조경환 부대와 협력하여 또 한차례 일본군을 격파하고, 11월 27일에 대치에서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소총 5정, 탄환 650발을 노획하였다.

  이같이 연전연승한 전수용은 호남의 전 의병부대를 통합한 호남동의단을 결성하였다. 전수용 부대는 7백여 명의 병력을 각급 지휘관과 참모 요원들로 하여금 나누어 지휘하도록 하되, 20~100명 규모의 소부대로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농민이나 상인으로 변장하여 각지의 일본군 헌병 분견소와 경찰 관서, 그리고 수비대의 배치상황을 파악하고 일본군의 이동상황을 세밀히 탐지하여, 이동경로상의 요지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는 전법을 구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전수용 부대의 활동 지역은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병력은 물론, 세금 징수원이나 일진회원 등 친일 분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의병의 통치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1909년 6월 중순, 전수용 부대는 전후에서 협격을 받아 73명의 전사자를 내고 겨우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수용은 부대를 해산시키고,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차려 후학을 가르치다 체포되어 1910년 8월 22일(음 7. 1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한편, 1909년 9월에 일본군이 호남 전역에 실시한 이른 바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호남 의병의 활동이 10월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08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전라남북도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이 위축되어 가던 것과는 반대로 전남지역의 남평·능주·보성·낙안 등지에서 심남일(본명 수택)·안규홍 등의 의병부대는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심남일은 함평 출신의 유생으로서 일본에 유학하고 영어에도 능통하였는데 1908년에 들어서면서 함평·남평·보성·장흥 등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6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지역주민의 민심을 얻기 위해 민폐를 근절시키는데 주안을 두고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1908년 4월부터 본격적인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4월 7일(음 3. 7), 강진의 오치동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살상시키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겨울이 되자 휴식에 들어갔다. 1909년 4월부터 다시 활동을 강화하여 남평 거성동과 능주 풍치, 그리고 보성 천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1909년 9월에 보병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전라도 지방에 대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자, 일본군의 예봉을 피한 다음 재기하기로 하고 9월 5일에 영암에서 부대를 해산시켰다. 그후 능주 풍치에서 일본군의 동태를 관찰하던 중 10월 9일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 무렵, 순천지역의 안규홍은 보성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편모를 봉양하던 인물로서, 지사인 안극의 도움으로 1908년 3월에 동소산에서 봉기하였다. 안규홍 부대는 일본군이 조성(보성 동쪽 16㎞) 지역을 수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파청(조성 서쪽 6.5㎞)에 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일본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첫 승리 후에 대원산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정비하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대원산에서 다시 격파하였다. 그리고 7월에 동복의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이동하다가 운알치(동복 동쪽 5㎞)에서 또 한번 승리하였다. 이때 안규홍 부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으므로 석호산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수습하였다. 그후 8월에 다시 진산에서 마을 주민의 협력을 받아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안규홍 부대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동복 주둔 일본 기병 분파대를 장흥으로 축출하고, 순천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10월에 순천 수비대의 후방 통로상에 위치한 병치를 차단하였다. 순천 수비대와의 병치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으나, 안규홍 부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 12월에는 배를 타고 흥양(고흥)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헌병분파소를 파괴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다시 장흥지역 일본군과 교전을 거듭하였다. 5월에도 보성지역에서 일본군 지휘관을 사살하는 등의 활약을 벌이다가 7월에 마륜(조성 동남쪽 4.5㎞)에서 흥양 헌병대의 급습으로 타격을 입었다. 9월에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이 전개되자 안규홍 부대도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후 안규홍은 10월 21일에 보성 법화촌에서 체포되어, 1910년 6월 11일(음 5. 5)에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4) 기타지역의 전투

  1909년에 이르러 호남지방의 의병이 상대적으로 기세를 높이자, 5월에는 목포의 일본인 상업회의소에서 통감부에 의병 진압을 호소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본국 국내의 각 사단 중에서 중대들을 차출하여 편성한 임시 한국파견대를 남부 수비 관구에 파견하였다. 남부 수비 관구 사령관이 된 임시 한국파견대사령관 와타나베(도변수재) 소장은 제1연대를 대전에, 제2연대를 대구에 각각 배치한 후, 8월 14일에 다음과 같은 '남한 대토벌 실시계획'을 수립하였다.

① 토벌 구역 : 장화도에서 부안~태인~갈담~남원을 거쳐 화개~하동~고포를 연결하는 선의 전라남북도 서남지구 및 그 연안과 제도서로 한다.
② 실시 구분 : 다음의 3기로 나누어 실시한다.
    제1기 : 장호도~부안~태인~갈담~남원~화개~하동~고포를 연결하는 선에서 법성포~영광~삼거리~서창~능주~보성~서동~소록도~각서도~황제도를 연결하는 선.
    제2기 : 법성포~영광~삼거리~서창~능주~보성~서동~소록도~각서도~황제도를 연결하는 선에서 서남 해안선.
    제3기 : 전라남도 서남단의 각 도서.
③ 작전 개시 일자 : 1909년 약 1일
④ 소요 일수
    제1기 : 약 15일,     제2기 : 약 15일,     제3기 : 약 10일,     계 : 약 40일
⑤ 부대 종류 : 다음의 2개 종류로 임무를 분담한다.
    1. 경비부대 : 토벌지구의 포위선을 형성하고, 소요지점을 수비한다.
    2. 행동부대 : 포위선 내에서 토벌·수색·검거 활동을 한다.
⑥ 수색 방법 : 촌락의 수색은 사전에 당국으로부터 통달되어 있는 거주민(남자) 명부에 의해 해당지역에서 거주하는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전원을 조회, 조사하고 각 가옥을 임검한다.
⑦ 각 기별 파견대 사령부 개설 위치는 다음과 같다.
    제1기 : 9월 1일 ~ 9월 7일 … 남원
               9월 8일 ~ 9월 15일 … 광주
    제2기 : 9월 16일 ~9월 20일 … 영산포
               9월 21일 ~ 9월 30일 … 목포
⑧ 사용 병력
    파견대 사령부 : 3/11,
    보병제1연대 본부 : 2/30, 제1대대 : 15/358, 제2대대 : 15/244
    보병제2연대 본부 : 3/3, 제1대대 : 21/420, 제2대대 : 21/370, 제3대대 : 19/416

  남부 수비 관구 사령관 와다나베 소장은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여 전라도 지역에 투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부 수비 관구로부터 차출한 제6사단 공병 1개 소대와 헌병 및 경찰관을 동원하였다. 해안에는 해군 제11정대와 전라남북도 지방 경무국 소속 기선 10척과 수비대에 배속된 증기선 등을 동원하여 해안 도서로의 이동을 차단하였다.

  이런 가운데 8월 하순에 작전 준비를 완료한 임시파견 제1·2연대는 오수~나주~영산강을 연하는 선을 경계로 그 서부는 제1연대가, 동부는 제2연대가 담당하여 9월 1일부터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 일본군은 부대별로 토벌구역을 분담하여 반복수색을 실시함으로써 의병의 전열을 뒤섞어 흔들어 놓은 이른 바 '교반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호남지역 의병장들은 미리 부대를 해산하여 잠적하기도 하고, 지리에 밝은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산간지역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나 중과부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9월과 10월, 2개월 동안에 걸쳐 심남일·안규홍 등 전라도 지역 의병장 및 주요인물 103명이 피살 또는 체포되었으며, 이들 휘하의 4천여 명 병력 중에 2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써 호남지역 의병의 활동은 봉쇄되고, 그 이듬해(1910)에 드디어 일제에 합방되었다.

  영남 출신으로 목천(충남 천안군) 군수를 지낸 바 있는 박기섭은 전 군부대신 신기선을 통해 광무제의 밀지를 전달받고 황해도 유림들의 추대를 받아 평산의 도평산 진영에 4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7년 10월 8일에 돌격장 김창호 부대가 배천읍을 습격하여 배천과 경무 분견소 및 우편국을 점령하여 무장을 더욱 강화한 후, 10월에 연안을 공격하여 긴급 출동한 일본군 해주·평산·기린장·청석두·신원·신천 지역과 해주·청단·연안 지역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게 되었으며, 경의선 철도 서쪽의 태탄·장연·송화·은율 등지에는 민효식 부대가, 옹진·마산·강령 등지에는 허덕천 부대가 새로이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곡산·신계·시변리 등 황해도의 동부지역에는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이동해 온 의병부대들이 근거지를 확보하여 황해·경기·강원 3도의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에 항쟁하면서 활동을 펴나갔다.

  황해도 지역의 일본군 수비대가 경기지역 의병의 토벌에 주력하였으므로 황해도 의병은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중지되던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해(1910) 4월에, 일본군 제6사단과 교대한 북부 수비 관구의 제2사단(사단장 마쓰나가 중장)은 보병 제29연대와 서울 용산 주둔 보병 제65연대의 제7중대와 기병·공병 약간명을 통합하여, 서흥~재령~해주~탁영대~연안~배천을 잇는 지역내의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11월 하순부터 그 이듬해 4월 중순까지 약 4개월여에 걸친 일본군 제29연대의 장기적인 토벌로 190명의 의병이 살해되거나 사로잡혔다.

  그리고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이르는 약 4주일의 기간 안에 황해도 의병의 활동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보병 16개 중대와 기병 2개 중대 및 헌병·경찰 80명의 지원 병력이 투입되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동부지역에서 5개 중대가 각기 담당지역별로 정밀수색을 벌이고, 서부지역에서는 11개 중대가 외곽에서 포위태세를 갖추어 내선으로 포위망을 압축해 가면서 수색을 반복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토벌전으로 지역내에는 250여 명의 의병이 체포당하였으며, 1911년 말부터 의병의 조직적인 부대활동은 종식되었다. 김정환·한정만·채응언 등이 소수 인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평안도 지역에서의 의병 봉기는 1908년에 들어서 본격화되어 주로 만주에 연한 국경지역과 평안·함경·황해 3도의 접경인 낭림산맥 서부 산악지대를 활동무대로 하였다.

  1908년 3월, 함경도의 삼수지역에서 활동하던 차도선이 일본군에 귀순하자 그 휘하에 있던 한영준·양혁진 등이 장진·삼수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다시 조직한 뒤, 4월에 일본군 강계수비대(제51연대 제10중대)와 후주고읍·부산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대체로 소멸되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의 무장봉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9월 6일에 이른 바, '총포화약취체법'이 공포되었다. 이때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산포수들이었으며, 특히 산포수가 많은 함경도 지역 주민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북청 50㎞에 위치한 작수동(함경남도 북청군 안산면)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많은 산포수들이 호응하였다.

  안평·안산 2개 면의 산포수 조합인 포계의 계장인 안평면 출신 임창근의 주도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임창근은 1907년 11월 16일에 갑산의 광부 출신인 차도선, 양덕의 전 진위대 하사 출신 홍범도, 북청의 포수 출신 태양욱 등과 함께 북청군 안평 면장인 주도익과 안산면장 이쾌년을 처단하고 22일 후치령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정찰대가 산포수들을 속여 그들이 소지한 총기 68정을 압수한 다음 북청으로 호송하는 것을 급습하여 총기를 탈취하고, 북청과 혜산진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일본군 토벌대와의 후치령 전투에서 임창근이 전사하였으므로, 차도선이 부대를 지휘하였다. 차도선 부대는 갑산 서북쪽의 삼수성을 점령, 성벽을 보수하여 근거지로 삼고 중평장 갑산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으나, 12월 말에 혜산진 및 갑산 수비대의 협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려는 일본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타격을 가함으로써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군 토벌대 174명은 1월 9일에 중평장·신풍 지역에 집결하여 삼수성의 차도선 부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도선은 이날(9일) 삼수성을 떠나 운봉(중평장 남쪽 2㎞)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신속히 갑산 쪽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시간만 허비하였고, 차도선 부대는 갑산을 급습하여 일본군 수비대원들을 사살한 다음, 우편국 등 각 기관을 소각하였다. 이에 일본군 북청 수비군 사령관이 간교한 술책으로 의병을 회유하자 차도선은 마침내 3월 17일에 1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신풍리 수비대에 귀순하였고, 귀순을 반대한 태양욱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차도선 부대의 잔여 병력은 차도선의 부장인 홍범도가 지휘하였다.

  이때 홍범도는 그 자신도 귀순할 뜻이 있음을 일본군에게 알리고 책임 있는 자가 의병 진영으로 와서 귀순을 받아들이라고 통고함으로써,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시키려고 하였다. 홍범도가 귀순 의사를 밝히자 북청 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 중좌는 그를 귀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들 경찰병력을 도하리(창평 서북쪽 12㎞)로 유인하여 전원을 사로잡아 처단하였다. 그후 홍범도 부대는 장진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상봉 부대와 합류하였다. 군세를 강화하여 장진지역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게 되자 7월에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후에 다시 연해주 니콜리스크로 옮겨, 새로운 항일운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에게 일시 귀순했던 차도선은 5월에 갑산 헌병 분견대를 탈출하여 황수원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독자적인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여건이 악화되자 그도 역시 만주로 들어가 포수단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에 헌신하게 되었다.

  연해주의 한인 단체들은 1908년부터 국내의 정미의병에 호응하기 위해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안중근(본명 응칠)의 제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1907년 겨울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범윤을 만난 안중근은 당시의 국내상황을 설명한 다음,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은 의병부대 조직에 필요한 자금과 병력 확보를 위해 모금과 모병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 결과 총병력 7백여 명의 의병과 30만 원의 군자금을 확보하여 진용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총   독 : 이범윤
총대장 : 김두성
대   장 : 전제덕, 김영선, 김모(성명 미상)
영   장 : 안중근, 엄인섭, 백규삼, 이경화, 김기룡, 강창두, 최천오, 장봉한

  이들은 러일전쟁에 사용했던 러시아 소총 5백 정을 구입하는 한편, 교포들이 소지하고 있던 총기들을 헌납 받아 무장을 강화하고, 러시아군 병영의 일부를 임대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범윤은 의병부대의 단기 훈련이 끝나자 정찰부대를 먼저 투입하였다. 1908년 4월에 정찰을 완료하자 국내에 진입하여 무산과 갑산·혜산진 지역에 독자적인 거점을 확보한 다음, 현지에서 국내 의병과 합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본격적인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범윤이 주도하던 연해주 의병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소부대 별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북부지역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타격을 가하는 산발적인 유격활동은 계속되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여 연해주의 의병을 탄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점차 연해주에서의 의병 활동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의병장의 신분으로 북만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방문한 이토를 사살하였다. 1910년 8월에 일본에 병합되자, 연해주의 지사들과 의병들이 만주로 이동하여 새로운 독립군의 기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http://www.sanbut.com/dosgan2/ubc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