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스크랩] 왜 동아시아 신화인가? [조현설]

_______! 2008. 8. 9. 16:07
왜 동아시아 신화인가?(우선 인사삼아 짤막한 글 하나)
  • 글쓴이: 조현설
  • 조회수 : 199
  • 04.04.12 17:14
http://cafe.daum.net/poet04/ERae/1주소 복사

  근래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두 가지 현상이 있다. 하나는 떠들썩하다가 잠잠해졌고, 다른 하나는 조용한 열풍으로 번지고 있다. 잠잠해진 것은 중국의 동북프로젝트를 둘러싼 고구려사 논란이고, 조용히 번지고 있는 것은 ꡔ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ꡕ 탐독이다. 고구려사 논란은 고구려연구재단이라는 별 실속이 없을 듯한 국책 연구소를 낳았고, 현재 18권까지 출간된 ‘만화’는 열렬한 어린이 그리스 로마 신화 소비자를 낳고 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듯한 두 현상이 ‘왜 동아시아 신화인가’라는 우리의 질문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2000년 11월부터 출간되기 시작해 1000만부가 넘게 팔렸다는 ꡔ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ꡕ 시리즈 과열 현상은 그 직전에 있었던 이윤기 판 ‘그리스 로마 신화’ 소비과잉 현상의 연장이다. 열기를 감지한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만화가 그려지기 시작했고, 책을 읽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만화를 사 주었다. 이미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은 근육질의 남신과 바비인형같이 예쁜 여신들이 벌이는 이야기의 맛 속에 빠져들었고, 이제 부모들은 만화책값에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문제는 만화책값이 아니다. 혹자는 이 탐독 현상을 두고 만화 속에 그려진 고정된 성 역할이 지닌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 비판의 시선을 던지고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 독서열이 그러하듯이, 만화로 재현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리스-서구적 보편성을 인간 보편의 이름으로 강제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스펀지같은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의 형식으로 제공되는 이 ‘무의식적 강제’는 더 효과적이다.

  이런 문화적 불행, 혹은 식민성 속에서 ‘왜 동아시아 신화인가’라는 물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정체성의 발견은 식민성을 지우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초기 동아시아 신화학의 자국 신화에 대한 발견이 이미 서구의 시선을 경유한 발견,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결과였다면 오늘날 동아시아 신화학은 새로운 기획을 요청한다. 그리스 로마적 전범에 견주어 파편적이고 빈곤하다는 문화적 콤플렉스를 벗어나 양자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서구에는 빈곤하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풍부한 구술전통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만주의 니샨 샤만, 몽골의 장가르, 티벳의 게사르, 그리고 우리의 무가들, 이들 신화 속에는 좀더 우리와 닮은 인간이 숨쉬고 있다. 이들을 버려두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보편적 인간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문화적 해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동아시아이고 동아시아 신화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동북공정에서 극명하게 표출된 중국의 정체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변방사로 규정하여 우리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지만 중국을 좀 아는 사람들에게 이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나는 중국에서 출판된 ꡔ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ꡕ의 표지에 찍혀 있는 ‘(唐)慧超’라는 이름을 보고 오래 전에 놀란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혜초가 당나라(?) 사람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심중에는 신라도 동북공정의 괄호 속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소 과장된 언사를 사용하긴 했지만 문제는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호명하려는 중국인들의 내면에 흐르는 저 도저한 자기중심주의, 달리 말하면 중화주의이다. 그리고 이 중화주의 구성의 첫머리에 동아시아 신화가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

  중화주의와 신화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긴 우회로가 필요하겠지만 이 관계를 요약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ꡔ상서(尙書)ꡕ에 보이는, 황제(黃帝)가 묘민(苗民)들이 마음대로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을 금하고 중려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하게 했다는 이야기, 즉 절지천통(絶地天通)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묘민들의 하늘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단절되고 하늘과의 소통은 오직 황제가 임명한 중려를 통해서만 가능해졌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화이론(華夷論)의 신화적 기원이다. 황제가 중화의 표상이라면 묘민은 중화의 주변으로 치부되는 사이(四夷)의 표상이다. 이 관계 속에서 사이, 즉 오랑캐들은 황제의 중개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하늘과 직접 소통할 수 없는 타자가 된다.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동북공정이라는 무모한 기획의 정신적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동아시아 신화인가’, 나아가 ‘왜 동아시아 신화학이 구축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기실 중국신화라는 상(像)은 황제와 묘민의 관계에서 보듯이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포획을 통해 구성된 것이다. 마치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포획하려는 시도처럼 반고, 여와․복희 등 중국신화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신과 신화들도 기실 타자의 소유였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명확하다. 동아시아의 공존을 지향하는 동아시아 신화학은 중화의 신화학이 아니라 그것에 길항하는, 그것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사이의 신화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동아시아 신화의 중심을 중국신화가 아니라 동아시아 소수민족의 구전신화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우리가 동아시아 신화에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자는 것이고, 동시에 동아시아 내부에 귀신처럼 떠도는 중화주의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이중의 고투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고투 없이 이웃이 무단 점거하려는 마당을 지키기도, 이웃집에 빼앗긴 아이들을 되찾아 오기도 어려울 것이다.

출처 : 그닥 시답잖은 나의 공간
글쓴이 : 이충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