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신화적 상상력에 대한 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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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조현설
- 조회수 : 210
- 04.05.1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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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지혜 1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니브히 족이라는 소수 종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곰 넋 보내기’라는 정교하고도 흥미로운 제의를 치릅니다. 이들은 숲에서 데려온 새끼 곰을 아이를 기르듯 젖어미가 젖을 먹여 키웁니다. 그리고 이 새끼 곰이 두세 살 쯤 되었을 때 의례를 거행합니다. 그날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니브히 인들의 반지하 식 움집 안으로 곰은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움집 안에서 곰은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음식과 대화를 나누고 놀이를 벌인 후 제의장소로 끌려갑니다. 거기서 그는 제의용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니브히 인들은 죽은 자의 옷을 벗기듯 조심스레 죽은 곰의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을 해체합니다. 니브히 인들은 이렇게 해주어야 곰의 넋이 기뻐하면서 인간과의 우애를 회복시켜준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근대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웃기는 일이고 미개하기 짝이 없는 행위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곰의 넋을 보내야만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1927년에 이들을 만난 러시아 인류학자 크레이노비치가 물었더니 한 노인이 대답 대신 신화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옛날 니브히 사람 하나가 사냥 도중에 길을 잃고 식량은 바닥이 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곰 발자국을 발견하고 잡으려고 발자국을 따라 굴로 들어갔는데 굴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잘 대접을 받고 지냈는데 봄이 오자 집주인이 하류 지역에서 친구들이 사냥하러 올 테니 누가 손님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니브히 사냥꾼을 데리고 내려가기로 했는데 그 여자가 털가죽을 걸쳐 입자 놀랍게도 곰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곰은 굴 밖으로 나가 친구들의 창에 찔려 죽습니다. 그때서야 이 니브히 사냥꾼은 곰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참 후 손님으로 갔던 여자가 돌아와서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넌 숲에서 길을 잃어서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사실은 네가 길을 잃도록 우리가 유인한 거야. 이리 데려와서 이곳의 규율을 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지.” 노인의 옛날이야기는 황당한 듯하지만 니브히 사람들의 곰 넋 보내기 의례의 정당성을 보증해 줍니다. 신화는 곰이 사람이고, 니브히 인들의 친구이고 친척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곰은 니브히 사람들의 손님으로 죽어야 하고 곰들은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호혜(互惠)의 관계인 것이지요. 수천 년을 지속해온 니브히 인들의 의례와 신화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너와 나는 자매형제라는 무차별적 사고, 전체성의 세계관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그런 세계관의 실천이 바로 자연을 조절하는 문화적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인이 동물과 다른 것은 문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지닌 자연의 일부이면서 제작 행위를 통해 자연과는 다른 인간 특유의 생활양식, 즉 문화를 지닙니다. 자연과 문화, 문화의 화엄(華嚴)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핵심적 주제가 여기서 떠오릅니다. 모든 신화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제작techne, 정신적 제작poiesis이라는 제작행위의 두 가지 측면은 문화의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말에서 포이에시스가 꽃이 피듯 자연이 안에 숨기고 있는 풍부한 어떤 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테크네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풍부한 것을 바위산을 깨뜨려 철광석을 캐내듯이 도발, 개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이에시스가 증여의 성격이 강하다면 테크네는 교환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신화란 원시사회에서 증여가 교환으로 가지 못하도록 통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곰은 형제이고 조상이기 때문에 사냥을 하되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수만큼, 달리 말하면 곰과의 우애를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의 욕망을 조절하고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그리고 문명의 한 극점인 근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지혜가 사라진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을 야만의 시대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2 한국 현대시와 신화적 상상력이란 주제를 앞에 두고 신화를 길게 거론한 것은 원시사회의 신화적 상상력이나 신화의 기능이 현대시의 상상력이나 사회적 기능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물을 형제로 보는 마술적 상상력이나 그런 상상력이 지닌 지혜의 마음이 시적 사고, 혹은 시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신화와 시의 친연성, 나아가 한국 현대시와 신화적 상상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이 근작시들을 읽다가 「개」(이정록)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낯선 골목에서 /비쩍 마른 개를 만났다 /이빨에 생 고무줄을 묶어놓은 듯 /한 걸음 나아가면 한 걸음 쫓아오고 /고개 돌려 한 발 다가가면 /한 발 물러나며 끈질기게 짖어”대는 개를 봅니다. 그러나 개는 목줄에 묶여 컹컹거리기만 합니다. 그 개의 목줄은 시인에게 “골목길을 빠져 나오는 내 뒷덜미를 /확 잡아채는 목줄이여”라는 영탄조의 인식을 불러냅니다. 여기서 시인은, 시적 자아는 개가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은유라고 부르는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개가 들으면 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본능적으로 동일시의 상상력을 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인의 상상력 속에는 이미 신화적 의식이 녹아 있습니다. 니브히 사람들이 곰과 자신들을 형제로 인식했던 바로 그런 의식 말이지요. 그러나 개는 곰과는 다릅니다. 곰은 니브히 사람들과 호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인이 만난 개는 목줄에 잡혀 있는 존재, 이미 호혜가 아니라 지배 관계 속에 놓인 존재입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시인의 일이란 존재를 반성하는 일뿐입니다. 니브히 인들에게는 반성이 필요 없었겠지만 근대의 불행한 시인은 “담 너머 /얼굴도 모르는 발자국 소리에 /오래 짖어댄 나의 질긴 이빨이여”라는 반성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브히 인들에게 곰과의 동일시가 자연을 조절하는 문화의 지혜였다면 시인의 동일시는 조절 불가능한 시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성찰적 지혜는 지혜 부재의 시대를 밝히는 거의 유일한 지혜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식물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몸살」(이응인)이라는 시 역시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시인은 “나무 심어 놓고 쓰러져 자는데 아이들 방 창가에서 우렁우렁 저 소리 고무줄과 밧줄에 묶였던 십 년 생 동백이 아픈 발을 주무르는 갑다 담장 옆에는 꽁알꽁알 산수유 앳된 꽃잎이 노오란 입술 빈 젖꼭지를 빠는 갑다 왼종일 밭에 돌 주워내고 살구나무, 배나무, 수수꽃다리 심고 앞마당에 사철나무 어린 울타리 치고 모로 쓰러져 누웠는데 나무들의 앓는 소리가 등골을 들쑤시며 잠을 뒤채고 다녔다”고 산문 투로 노래합니다. 시인과 나무들 사이에는 간격이 없습니다. 시인은 나무가 되어 있고, 나무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은유와 의인화가 동시에 구사되고 있는 이 시에서 우리는 신비적 사고, 다시 말해 신화적 상상력을 발견합니다. 나무들이 앓는 소리를 함께 앓으며 밤새 잠을 뒤척이는 시적 화자는 샤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자를 불러내는 진오귀굿에서 무당이 접신을 통해 망자가 되어 망자의 한을 토로하듯이 시적 자아는 나무들의 앓는 소리를 풀어내는 무당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왜 나무들이 끙끙 앓느냐는 것이지요. 시를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답이 될 만한 신화의 말을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중국 운남성에 가면 라후족이라는 소수 민족이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옛날 빛이나 밤낮의 구분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빛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쉼 없이 나무를 찍어 마침내 빛을 찾았다는 것이지요. 그때 뻐꾸기가 날아와 홍수가 날 것이라고 울어댔지만 아무도 그 말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쫓아버렸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쓰러진 나무의 뿌리를 흰개미가 갉아내자 그 속에서 엄청난 물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모두 휩쓸어 갑니다. 이 홍수 속에서 모두 죽고 오누이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지요. 빛을 구하려고 나무를 베었더니 빛은 얻었는데 그 때문에 모두 죽었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하지만 이 역설 안에 신화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는 보통 나무가 아니라 우주수(cosmic tree)라는 신화적 나무입니다. 이걸 벤다는 것은 창조의 리듬을 파괴하는 행위지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 인위의 과잉이 항상 문제인 것입니다. 노자는,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했는데 나무를 베는 것은 도를 넘어선 행위지요. 홍수는 그 결과입니다. 홍수는 세계의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창조와 재창조의 과정에서 신화와 시인의 지혜란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는 뻐꾸기와 같은 것이지요. 나무의 앓는 소리에 밤새 잠을 뒤척이는 근대 이후의 시인은 바로 신화 속의 뻐꾸기와 같은 존재인 셈이지요. 세계는 이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늘 그 말은, 뻐꾸기를 쫓아냈듯이, 너무 늦게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 문명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숲가에 발을 멈춘다. 숲은 나를 거부하며 말하고 있다, 이제 전환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꽃은 세상의 끝에 닿아 더 이상 태울 게 없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너무 늦기 전에는 전환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내 슬픔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김진경, 「슬픔의 힘」 부분) 바로 여기에, 이 모순에, 세상을 움직이게도 하고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도 하는 욕망의 이중성에 슬픔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운명적으로 슬픔의 힘을 믿는 존재입니다. “나는 밤나무 숲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숲은 여전히 우리의 재난을 거부하지만 /또한 우리의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듯 /내 이마에 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나는 밤나무 가지 사이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믿음 속에서 숲과 시인은 통정(通情)을 통해 “슬픔이 세상을 태우는 불을 끄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태우는 불길로부터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킬 수는 있을 거라고”(「슬픔의 힘」) 노래합니다. 이 노래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잃어버린 니브히의 노인의 이야기와 그 안에 담겨 있던 지혜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아마도 90년대 이후의 우리 시가 생태주의적 경향이나 여성성의 발견 쪽으로 기울고, 불교적 세계관에 특히 경도된 것은 근대의 과학적 이성과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속도에 상처받은 시인들에게 상처를 치유할 신화적 지혜의 약물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략 9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하여 독서 시장에 신화가 인기 있는 상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도 우리 사회의 신화적 지혜에 대한 욕구와 무관치 않습니다. 물론 신화에 대한 소비가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평가해야 할 부분은 신화적 사유에 대한 관심이 근대의 반성에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적 경향이나 여성성의 발견, 혹은 불교적 세계관으로의 경사가 신화와 무관치 않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시들의 흥미로운 풍경은 생태주의적 경향이 불교적 사유와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팔꽃 속에서 생명의 만다라를 발견하고 있는 「생명만다라」(정현종)라는 시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어릴 때 참 많이도 본 나팔꽃 아침을 열고 이슬을 낳은 꽃 아침하늘의 메아리 이슬 맺힌 꽃 이슬에 비췬 꽃 만다라 無限反映의 꽃 만다라 피, 붉은 이슬 의 메아리, 그 메아리 속에 생명 만다라 눈동자 에 맺히는 이슬 그 이슬 속의 삶 만다라 시인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하늘을 향해 핀 나팔꽃의 둥근 원에서 만다라를 포착합니다. 연약한 꽃잎 속에서 강력한 생명의 약동을 보는 것이지요. 불교의 그림인 만다라는 안에 붓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깨달음의 경지와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는 둥근 원입니다. 이 원은 기실 우주의 상호연관성과 조화를 표상하는 것이지요.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은 나팔꽃에서 우주의 조화를 읽어냅니다.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인 화엄의 세계를 나팔꽃 속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박노해가 다시 시를 쓰면서 “작아지자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지게 하자 /자신을 지키려는 수고도 /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 /나의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이요 /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 /나의 완성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져 순결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희망을 담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진 나”(「작아지자」 부분)를 발견하려고 했을 때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공(空)의 사유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무화(無化)되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또는 “시계소리 시계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누군가의 무거운 발짝소리 /시계소리 시계소리 /? /귀뚜라미 울음소리”(이시영, 「고요」 전문)라고 말을 아끼다 못해 ?표로 한 행을 채우는 절제의 언어 속에서 들리는 것은 지극히 소란스러운 세상 이편의 고요 속에서 미세한 우주의 소리를 듣는 선사(禪師)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선적인 음성은 “양수강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공광규, 「수종사 풍경」 전문)와 같은 시편 속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가지고 드러납니다. 시인들은 거대하고 소란스러운 세계, 자본의 속도로 위험한 세계 속에서 지극히 작고 앙상하고 존재들, 침묵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90년대 이후 많은 우리 시인들은 불교로 갔을까요? 그것은 불교가 우리의 삶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불교의 사유가 시의 정신과 내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교의 사유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의들이 쌓여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출발입니다. 불교는 대칭성 사회가 무너진 지점에서 대칭성 사회의 지혜를 가지고 비대칭성 사회의 흐름에 맞서려고 했습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곧 붓다되기는 당대의 왕의 권력을 부정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왕과 국가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붓다는 평화와 조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왕으로 표상되는 문명을 붓다는 오히려 ‘공’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자연이 가지고 있는 충동적인 힘을 공으로 개념화하여 당대의 인도철학인 존재의 철학에 맞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왕과 국가의 일부가 되어 있는 현실의 불교와는 상관없이, 불교의 이런 본질이 시인들을 불교 쪽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왕과 국가로 표상되는 욕망에 의해 골병든 자연을 재창조할 수 있는 지혜를 거기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불교는 신화의 직관적 지혜가 깨져나간 고대 사회에서, 다시 말해 비대칭 사회에서 신화를 대신해 논리적 지혜를 설파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모두, 모두가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화엄의 연기론이나 실체를 부정하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사유는 신화의 순환적 세계관이나 카오스의 사유를 추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래 우리 시의 불교적 경향성은 신화적 세계관, 신화적 상상력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시란 논리를 넘어 직관을 지향하기 때문이지요. “그 이슬 속의 삶 만다라”, 삶은 저 영원한 순환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팔꽃은 모셔야 되는 존재이지 짓밟아야 하는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4 여성성의 발견 역시 최근 시의 한 경향이라고 했습니다만 우리 시의 여성적 목소리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굳이 생태시학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서정시가 근원적으로 생태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타자화된 존재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각 속에서 억눌린 여성성을 탐색하려는 흐름은 90년대 이래 한국시의 한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데기처럼 세계를 치유할 약물을 구해 와야 할 여성은 쓰러져 있습니다. “슬픈 별에 여자가 살고 있다 /슬픈 별에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다 /슬픈 별에 할머니께서 살다 돌아가시다 //검버섯이 핀 얼굴 /점점 굽어져 가는 등 /장롱에 고이 모셔져 있는 수의 //어머니, 병들고 늙으셨다”(안찬수, 「슬픈 별에 사는 여자」 전문).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살다 돌아가신 그 슬픈 별에 어머니도 살고 있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잃어버린 웅녀로부터 지속되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별을 정말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별 속에서 여성의 생존이란 “부조리 연극의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배우처럼 /혼자 밥을 먹는 시간 //현실은 몽롱하고 /꿈은 생생하다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두 번 다시 이 어두운 세상을 떠돌지 말았으면 //시간은 빠르고 /고통은 오래 간다 //나는 노파처럼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내 숨소리를 듣는다 //무덤 속, /말라버린 태아”(조용미, 「말라버린 태아」 부분)와 같은 것입니다. 자궁이 무덤이 될 때 여성은 더 이상 여성이 아닌 것이지요. 늙고 병들다가 태아조차 말라버린 여성의 형상은 마치 밤새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나무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지독합니다. 이런 여성의 타자화는, 기실 자연과의 관계에서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테크네의 힘이 과도하게 작동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남성지배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왕의 탄생이 조절의 지혜를 밀어내고 비대칭 사회를 조성했다고 했는데 비대칭이란 자연과 문화의 비대칭만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비대칭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여성인 자연은, 자연인 여성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부장제적 성차별주의와 개발주의적 자연 파괴의 연관성을 중시하는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라는 운동의 흐름도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겠지요. 말하자면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 문화의 대칭성, 여성과 남성의 대칭성을 복원하려는 운동입니다. 이런 복원의 운동성이 신화적 지혜, 신화적 상상력의 복권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김선우의 어떤 화자는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서 몸져누운 어머니의 소변을 받다가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된 음부를 봅니다. 한때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은 이제 산비탈이 된 것이지요. 늙고 병든 슬픈 별의 어머니가 거기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인의 역설적 상상력은 거기서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포착해 냅니다.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내력」 부분)으니까요. 어머니의 몸에서 대자연의 순환, 우주의 리듬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이 리듬 속에서는 ‘말라버린 태아’조차도 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그 속에서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앳된 잠지’로 되돌아가는 우주의 순환은 시인의 진술처럼 결코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내부에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되돌리는 카오스적 힘, 달리 말하면 홍수와 같은 가공할 힘의 약동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 여신은 언제나 자비와 공포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까요.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는 어머니의 신체가 보여주는 평화는 그런 의미에서 역설입니다. 여성에겐 평화일지 몰라도 남성에겐 공포일 테니까요. 자연에겐 안식일지 몰라도 문화(문명)에겐 두려움 자체일 터니까요. 아버지-왕의 병을 치유할 약물을 구할 유일한 존재는 바리데기라는 것이 신화의 지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내력」의 상상력 속에서, 시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창조 여신을 향한 찬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 여신에 대한 찬미는 또 다른 여성 시인에게서 알을 낳는 태양이라는 좀더 경쾌하고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동시킵니다. “공중의 허리에 걸린 夕陽 /사각사각 /알을 낳는다 /달디단 열매의 속살처럼 /잘 익은 빛 /살이 통통히 오른 빛 /뼈가 드러나도록 푸르게 살아내려는, /스물 네 시간 중 단 십 분만 행복해도 /달디달아지는 /통통해지는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 /노을로 퍼지는 /저 죽음의 황홀한 産卵”(박라연, 「공중 속의 내 정원 1 - 産卵」부분). 한데 알을 낳은 태양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꽤 낯선 것입니다. 아마도 ‘태양=남성, 달=여성’이라는 관습적 인식 때문일 테지요. 이를테면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나희덕, 상현(上弦) 부분)와 같이 달을 묘사할 때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원시 신화에서 일월과 남녀의 관계는 반드시 고정된 사태가 아니었습니다. 태양 여신도 드물지 않게 보입니다. 만주의 아부카허허나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도 여신 아닙니까? 오히려 태양은 여신이었다가 후대에 남성신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알을 낳는 태양이라는 도발적, 혹은 역설적 상상력이 저 원시의 창조신화에 안 닿아 있다고 말할 도리는 없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던 한 生의 그림자 /그 알을 먹고 사는 나날을 꿈꾼다”는 바로 그 석양을 보고 “부화 직전의 太陽이 걸렸다! /심봤다!”고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영약이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것이 지혜자 시인이 찾아낸 신화의 지혜입니다. 5 지혜의 시대, 아니 지혜가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란 없겠지만 인류의 생존이 백척간두에 선 지금이야말로 지혜가 긴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어디 있을까요? 지혜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볼 눈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듣지 못한다. 선승이나 도사의 말씀(?) 같지만 기실 자연에 대한 문화의 조절력이 사라진 비대칭 사회의 과도한 욕망이 지혜를 인지할 수 없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시는 우리에게 지혜를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되어 줍니다. 시적 사유는 본질적으로 세계를 하나로 보는 상상적 동일시의 정신에, 만물을 자매로 대하는 신비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까요. 시적 사유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지혜의 본향으로, 다시 말해 신화의 동굴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시적 사유를 신화적 사유의 친구라고 하는 것이지요. 시인은 원초적 감각의 영매자이고 언어의 무당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혜로 이끄는 시적 사고야말로 지금 인류가 지녀야 마땅한 마음이 아닐까요? 치자꽃 향기가 좋아 코를 댔더니 그 큰 꽃송이가 툭 떨어지다 귀한 꽃 다친 게 미안해서 손바닥 모아 꽃송일 감추었더니 합장 인산 줄 알았던가? 보는 이마다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간다 어허, 여기선 치자꽃이 부처일세! (김진경, 「부처」 전문) 꽃을 모시는 마음, 꽃 한 송이에서 부처를 보는 마음이야말로 시인의 마음이고 지혜로운 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치자꽃송이를 합장하듯 고이 들고 서 있는 시인의 형상 위로 저 니브히 노인의 곰 이야기가 은유처럼 불쑥 떠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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