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투쟁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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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간다는 것은 사나운 싸움의 강을 여럿 건너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인터넷 게임에서 한 스테이지가 끝나면 더 난이도가 높은 다음 스테이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과도 같다고 할까요.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이미 존재를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화학자는 모태를 빠져 나와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인간은 이미 최고의 영웅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싸움에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곧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싸움도 인간의 외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싸움과 같은 것입니다. 혹시 수업시간에 금지된 문자메일 보내 본 적이 있나요. 예컨대 지금 할까, 쉬는 시간에 할까 잠시 갈등하는 것, 이게 내면의 싸움이라면 문자 보내다가 걸려서 혼나는 것, 이게 사회 속에서의 싸움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둘로 보이지만 둘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쉼 없이 솟아나는 욕망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사회 속에서의 싸움은 아예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문자메일을 쉬는 시간에 보낸다면, 아니 아예 핸드폰을 지니지 않는다면 벌을 받는 일도 없지 않을까요? 부시와 그 일당들이 자신들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더라면 이라크 전쟁은 없었겠지요. 우리 마음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좀 어려운 동아시아적 말투를 사용한다면, 마치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관계처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에 대해 신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신화 속에는 어떤 싸움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싸움은 어떻게 해결될까요? 그리고 이런 싸움과 해결의 이야기는 어떤 뜻을 감추고 있을까요? 자 이제 신화적 투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아시아 신화 속으로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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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싸움이 신화의 관심사인 것은 아닙니다. 신화는 그 가운데서도 심각한 싸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싸움,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싸움, 자연과의 싸움이 그런 것이지요.
몽골 초원으로 가볼까요? 몽골 창조신화를 보면 식그무니 보르항, 마아다르 보르항, 에첵 보르항이 함께 세계를 창조합니다. 몽골 말 보르항은 신을 뜻하기도 하고 부처를 뜻하기도 하는데 본래 신을 뜻했다가 불교가 들어온 후에 부처의 뜻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세 신은 사이좋게 오리를 시켜 온 세상을 덮고 있던 물의 밑바닥으로 들어가 검은 흙, 빨간 흙, 모래를 가져오게 한 다음 그것을 물 위에 뿌려 땅을 만들고 식물들을 자라게 하지요. 그리고는 빨간 진흙으로 몸을, 하얀 돌로는 뼈를, 물로는 피를 만든 후 생명을 불어넣어 남자와 여자를 만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이 좋게 만든 인간을 세 신이 함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혼자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신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싸움은 내기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세 신은 각자 그릇을 하나씩 앞에 놓고, 잠을 자는 동안 누구의 그릇에서 꽃이 피고 빛이 나오는가 내기를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내기에 속임수가 개입됩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식그무니 보르항이 마이다르 보르항의 그릇에 꽃이 피고 빛이 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그릇과 바꿔치기를 합니다. 결국 식그무니가 승자가 됩니다. 속임수를 모를 마이다르가 아니지만 마이다르는 “네가 나를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네가 보살필 사람들 역시 서로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도둑질을 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에첵 보르항과 같이 지상을 떠나게 됩니다. 드디어 인간 세상은 식그무니 보르항의 차지가 된 것이지요.
신들이 함께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창조된 세상을 서로 차지하려고 신들이 내기를 한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 내기와 싸움에는 적지 않은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이 세상에 악(惡)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거짓과 불행의 원인을 신들의 내기와 원초적 속임수에서 찾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근원을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신의 잘못으로 보는 신화적 사유의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내려온 것보다 바다를 건너온 서구 기독교에 익숙하기 때문에 악이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독교 창조신화의 바탕을 이루는 중근동의 창조신화를 보면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바빌로니아 신화를 담고 있는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나 <길가메쉬>를 보면 세상의 악은 태초에 이미 있었던 것이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의 원형인 <길가메쉬>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홍수는 인간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라 신들끼리 싸우다가 일어났다고, 신들의 분노가 지나쳐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이 <길가메쉬>의 홍수 이야기가 ꡔ성서ꡕ 안으로 들어가면서 홍수의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다는 쪽으로 변형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야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식그무니와 마이다르의 싸움에 나타난 신들의 모습이 <길가메쉬>나 <에누마 엘리쉬>의 신들과 꽤나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그무니나 마이다르가 석가모니나 미륵의 몽골식 발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의 창조신화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이름뿐입니다. ꡔ성서ꡕ와 같은 변형이 몽골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몽골의 창조신화 속에는 신화가 세계를 보는 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의 악과 불행은 태초에 인간을 만들었던 신들의 원초적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창조신화에 보이는 싸움에는 다른 그림도 숨어 있습니다. 이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몽골 창조신화와 비슷한 우리의 <창세가>를 참조해야 합니다. 1930년대에 함경도 무당 김쌍돌이는 천지창조에 관한 노래를 이어가다가 몽골신화와 비슷한 미륵과 석가의 내기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미륵과 석가가 우주창조와 인간 창조에 함께 참여하는 몽골신화와는 달리 우리 신화의 석가는 미륵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이후 미륵이 다스리는 태평세상을 빼앗으려고 옵니다. 그래서 몽골신화에 비해 우리 신화에 미륵과 석가의 적대성과 싸움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석가와 미륵의 싸움이 우리 신화에서는 삼세판으로 진행된다는 데 있습니다. 몽골에서 싸움은 꽃피우기 한 판으로 끝나지만 우리 신화에는 꽃피우기 앞에 ‘동해에 줄 내려 안 끊어지기’, ‘여름에 강물 얼리기’가 더 있습니다. 우리 신화는 두 판에서 계속 진 석가가 마지막 판에서 속임수로 판을 뒤집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어 점증효과에 의해 이야기의 흥미와 의미가 배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경 써야할 대목은 싸움의 내용입니다. 한 판으로 끝나는 싸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싸움의 숨은 의미가 두 판, 세 판으로 반복되면서 좀더 분명해지기 때문이지요.
미륵은 우주만물과 인간의 창조자로 세계의 운행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신입니다. 미륵 안에서 자연과 인간의 삶은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미륵은 여름에도 강물을 얼릴 수 있고, 무릎에서 꽃을 피울 수도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요. 그에게는 남의 무릎에 핀 꽃을 꺾어 제 무릎에 꽂아놓고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파괴적 능력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미륵과 석가의 대립 속에서 자연의 두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은 순환하는 리듬 속에서 안정되어 있는 듯하지만 한번씩 파괴적 힘을 드러냅니다. 홍수나 태풍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미륵과 석가의 대결은 자연의 질서와 무질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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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후 신들의 싸움은 인간에게로 옮겨옵니다. 석가가 다스리는, 다시 말해 자연의 균형이 깨지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싸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수행해 나가는 전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싸움에는 국가 대표와 같은 대표선수가 필요합니다. 신화는 상징적 이야기니까 이야기의 주인공인 상징적 인물, 다시 말해 대표적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바로 그런 신화의 대표선수들이지요.
자연의 균형이 깨져 있기 때문에 해와 달이 여럿 하늘에 나타나 인간의 생존을 힘들게 합니다. 여기서 해와 달을 숫자를 조절하기 위해, 다시 말해 자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런 영웅들이 동아시아 신화에는 적지 않습니다.
일본신화에는 아만자쿠라는 영웅이 소나무 그루에 앉아 활로 일곱 개의 태양 가운데 여섯 개를 쏘아 떨어뜨리는 이야기, 수인 천황 때 아홉 개의 태양이 나타났는데 사수 8명이 명을 받아 여덟 개를 쏘아 떨어뜨리자 모두 까마귀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ꡔ삼국유사ꡕ에도 신라 경덕왕 때 하늘에 해가 둘이 나타나 열흘이나 없어지지 않는 괴변이 생겼는데 월명사라는 이가 <도솔가>라는 노래를 지어 불러 괴변을 사라지게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는 원시, 고대 사회에서 해의 괴변, 다시 말해 한발이 홍수와 더불어 대단히 심각한 자연의 폭력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울러 자연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일일이 영웅의 중요한 과업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일월을 조절하기 위해 싸우는 영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동이족으로 알려진 예(羿)일 것입니다. ꡔ회남자(淮南子)ꡕ라는 책을 보면 예는 요 임금 시절에 요의 명을 받아 벼와 초목을 말라죽게 하고 백성들을 살기 어렵게 하는 열 개의 해 가운데 아홉을 활로 쏘아 떨어뜨립니다. 이때 활에 맞은 해가 실은 까마귀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너무 단편적입니다. 문헌 기록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헌 기록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전신화를 만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 흥안령 산맥에 사는 허쩌족의 영웅 메르겡의 이야기인데 아쉽지만 줄여서 소개해야 되겠습니다.
옛날에 하늘에 해 셋이 있었다. 그것들은 하늘 가운데 걸려 있었는데 마치 불 항아리와 같아 숨을 쉴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땅 위의 식물들은 모두 타 죽었고 강물도 모두 말라 버렸다. 날짐승 들짐승들은 다 해변에 모여들고 동굴로 숨어들어 낮에는 감히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흑룡강 하류의 한 마을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열여섯 먹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한 번 힘을 쓰면 산을 밀고, 한 번 물을 마시면 큰 강물을 마르게 했으며 한 번 발을 디디면 깊은 연못이 생길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메르겡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 자란 것을 보고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해를 쏘아 떨어뜨리라고 말했다. 당장 떠나겠다는 메르겡에게 아버지는 1년 동안 더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그 사이 99개의 활을 부러뜨리고, 99000대의 화살을 쏘았는데 이제 활을 한 번 당기면 휙휙 큰 바람이 일어나고 화살이 꽂히는 곳은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다 부서질 정도였다. 메르겡은 드디어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메르겡은 99개의 높은 산을 넘고 99개의 강을 건너고 99개의 협곡을 거쳐 동해 가에 이르렀다. 큰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막 물 위로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해 둘을 쏘아 떨어뜨렸다. 세 번째 해는 놀라 구름 뒤에 숨어서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메르겡은 낮에는 나와 비추고 밤에는 돌아가 쉴 것이며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라고 세 번째 해에게 명한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편안한 나날을 누렸다.
지금도 날씨가 나쁠 때 높은 곳에 서면 해 셋을 충분히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늘에 걸려 있고 나머지 둘은 마치 하늘에 있는 저 태양 귀처럼 동서 양 쪽 땅에 바싹 붙어 있다. 노인들은 두 태양을 가리키며 메르겡이 화살로 쏘아 떨어뜨린 것인데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고 해도 그때 화살에 날개가 끊어져 날아오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예가 중국의 문헌 기록 속에 갇혀 있는 존재라면 메르겡은 살아 있는 영웅입니다. 몽골에도 메르겡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고, 몽골의 에르히 메르겡 역시 세상에 지독한 가뭄을 가져온 일곱 개의 해를 쏘러 떠나는 것을 보면 메르겡은 이 지역 여러 민족들의 대표적 영웅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메르겡은 명사수를 뜻하는 말로 고구려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주몽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고구려의 주몽이 해를 쏘았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제주도 무속신화에 등장하는 대별왕 소별왕이 천 근이나 되는 활과 백 근이나 되는 화살로 해와 달을 쏘았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도 활로 쏘아 해와 달의 숫자를 조정하는 신화가 전래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 역시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해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문화입니다. 원시 수렵민이나 유목민들에게 활쏘기 능력은 정착해서 농사짓는 민족들이 계절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능력과 흡사한 것입니다. 활을 잘 쏜다는 것은 최고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위해 최고의 능력자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영웅이 떨어뜨린 여러 개의 해와 한 개의 해는 어떤 의미를 숨기고 있을까요? 물론 그 의미는, 화살에 맞아떨어지는 멍청한 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겠지요.
이에 대해 고대 중국을 연구하는 미국 학자 사라 알렌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예 신화를 분석하면서 열개의 해와 한 개의 해를 각각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문화에 대응시킵니다. 상나라에 열 개의 해를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면 주나라에는 오직 하나의 태양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가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리는 것은 상나라에서 주나라로의 역사적 교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라 알렌은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문헌 기록의 문맥을 떠나서도 이런 해석이 가능할까요? 예컨대 허쩌족의 메르겡 이야기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 신화적 싸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조절자 영웅이라는 우리는 시각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허쩌족 신화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해가 셋이 나타나 “햇살이 뜨거워 숨을 쉴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땅 위의 식물들은 싹이 트자마자 곧 타 죽었고, 강물도 모두 말라 버렸고, 산의 나무도 말라서 모두 죽었으며 날짐승 들짐승들은 다 해변에 모여들고 동굴로 숨어들어 낮에는 감히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결국 세 개의 태양은, 그것이 둘이든 일곱이든 열이든 조화로운 순환을 벗어난 폭력적 자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폭력적 자연의 모습은 구체적으로는 더위나 한발이 될 것이고, 해와 짝하여 달이 나타나면 달의 상징성을 따라 추위나 홍수가 될 것입니다. 이런 폭력적 자연에 맞서 문제를 해결할 영웅이 원시 고대 사회에 요청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영웅의 모습에서 샤만(무당)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샤만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원시 고대 사회에서 샤만은 사회적 고통의 치료자, 문제 해결자의 했었지요. 중국 고대 문헌에 보이는 의례 가운데 한발이 심할 때 지내는 폭무(爆巫) 의례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샤만을 볕에 장시간 내놓아 탈진해 죽게 함으로써 비를 내리게 하는 상당히 위협적인 주술이지요. 샤만은 비를 부르기 위해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조절자로서의 문화영웅의 이미지가 신화의 보편적 토양입니다. 사라 알란이 국가 권력의 변동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던 것은 특정 문화에 나타나는 특수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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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신들의 싸움, 영웅과 자연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인간들 사이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물론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영웅적 인간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이 영웅적 인간은 단지 개인이 아니라 늘 어떤 집단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 속에 나타나는 인간들 사이의 싸움은 대개 집단들 사이의 싸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우리 신화 몇 편을 살펴볼까요. 우리가 다 잘 아는 건국 영웅 주몽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알에 있을 때부터 싸움을 벌이지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유화를 방에 가둔 북부여의 금와왕은 유화가 낳은 알을 갖다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금와왕의 태자 대소를 비롯한 일곱 아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당합니다. 많은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주몽의 성장과정은 투쟁 자체입니다. 마침내 위협을 피해 북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이제 건국을 위한 본격적인 싸움에 나섭니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이 건국과정을 송양과의 싸움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주몽이 비류수(지금의 혼강) 가에 졸본부여를 세우는 과정에서 상류에 있던 송양국과 싸우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싸움의 형식입니다. 신화에서의 싸움이 대개 그러하듯이 주몽과 송양의 싸움도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 싸움이 아닙니다. 누가 천제의 자손인가를 따지고, 활쏘기 시합을 하고, 고각(鼓角)을 훔쳐 오래된 것으로 속이지요. 마치 장난 같은 경쟁입니다. 이 경쟁은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상징투쟁이라는 것입니다. 신화 속의 싸움은 늘 상징적 싸움입니다. 천제의 자손은 왕권의 정당성을, 탁월한 활쏘기 능력은 뛰어난 전쟁능력을, 고각은 체계적으로 정비된 국가를 상징하지요.
주몽과 송양의 싸움은 신라와 가야 신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석탈해의 싸움에서도 반복됩니다. 바다를 건너온 키는 작고 머리는 큰 가분수 석탈해는 먼저 가락국으로 가서 수로왕과 싸웁니다. 갑자기 어디서 굴러온 놈이 다짜고짜 왕위를 내놓으라니 싸울 수밖에요. 그런데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를 보면 싸움의 내용은 상징적인 변신 대결입니다.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는 독수리로, 참새로 변하면 새매로 변하는 식이지요. 이런 변신 경쟁은 해모수와 하백의 변신 대결에도 나타나는 아주 흔한 신화적 싸움의 한 형식입니다. 현실에서야 칼을 들고 활을 쏘았겠지만 신화는 그것은 집단을 대표하는 왕의 변신능력 경쟁담으로 변형시켜 놓고 있는 것이지요.
가락국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석탈해는 이웃 신라로 찾아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신라에 도착해 궤짝 속에서 나타난 탈해는 자신은 용성국에서 온 사람이라면서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고 일주일 동안 들어가 있더니 나와서 살만한 곳을 찾다가 호공의 집에 가서 시비를 겁니다. 꾀를 써서 미리 집 옆에 숫돌과 숯을 묻어 놓고는 다음날 찾아가 우리 할아버지 집이라고 내놓으라고 생떼를 씁니다. 고소장이 접수되자 관가에 가서 자기 집안은 본래 대장장이인데 이웃 지방에 가 있는 동안 빼앗긴 것이라면서 땅을 파보자고 합니다. 한 마디로 사기를 친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남해왕이 탈해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서 사위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남해왕은 속임수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지혜를 본 것이지요.
중국신화로 가면 염제와 황제의 전쟁이 있습니다. ꡔ산해경(山海經)ꡕ이나 ꡔ로사(路史)ꡕ 등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 탁록이라는 곳에서 황제와 치우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 자체가 황제 쪽에 기울어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에서 치우는 대단히 용맹스럽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패하여 살해되고 맙니다. 여기서 황제는 보통명사인 황제(皇帝)가 아니고 고유명사인 황제(黃帝)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패배자 치우(蚩尤)의 다른 이름은 염제(炎帝)구요.
그런데 이 싸움에서도 황제와 염제가 싸우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황제는 응룡(應龍)이라는 용의 도움으로 치우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夔)라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북과 뇌신(雷神)의 뼈로 만든 북채로 천둥소리보다 큰 북소리를 울려 치우와 그 연합군인 묘족 등에게 큰 패배를 안깁니다. 패배한 치우는 북방의 거인족 과보(夸父)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전열을 가다듬지만 이번에는 하늘나라의 선녀한테 전수받은 병법과 곤오산의 붉은 구리로 만든 보검을 가진 황제에게 결정적으로 지고 맙니다. 싸움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하는 셈인데 북이나 칼 한 자루로 싸움에서 이긴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북이나 칼이 실재적인 무기가 아니라 상징적 무기라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주몽이 송양국의 고각을 훔쳤듯이 황제는 북을 만들고, 주몽의 활쏘기 능력처럼 보검 한 자루가 빛을 발한 것이지요. 이 싸움도 피를 흘리는 싸움은 아닙니다.
내기 혹은 사기, 지혜 겨루기, 상징적 무기로 싸우기. 신화에 나타나는 인간 영웅들의 싸움은 늘 이렇게 상징을 가지고 싸웁니다. 변신술이나 지혜, 혹은 활쏘기나 상징적 무기를 획득하는 능력 등은 적대적 세계를 살아가는 영웅, 집단을 대표하는 영웅이 마땅히 지녀야할 능력이라는 것이지요. 신화적 영웅은 메르겡처럼 자연의 조절자로서의 이미지만 지닌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조절자로서의 이미지와 능력을 지닌 존재인 셈이지요. 저 창조의 시공에서 미륵과 석가가 상징적 내기를 했듯이 이런 것이 바로 신화적 투쟁의 수수께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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