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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웅녀의 운명, 그 몇 개의 변주

_______! 2008. 8. 9. 21:19

3.웅녀의 운명, 그 몇 개의 변주

타자화는 웅녀만의 운명은 아니다. 남성지배의 제도담론인 건국신화에 등록된 모든 여성적 존재들의 운명이다. 여기서 운명이란 사회적 관계 체계의 다른 이름인데 이 체계의 실체는 사회적 차별화의 체계이다. 그리고 이 체계는 그것이 운명이라는 믿음 위에, 즉 집단적 오인 위에 구축된, 사회적으로 구성된 운명이다.

그런데 이런 운명의 장에서 주몽신화의 유화는 마치 예외적인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유화는 남성(신)들의 강간과 추방, 그리고 유폐의 고난을 거쳐 성스러운 생명의 알을 낳은 후에도 웅녀와는 달리 건국서사에서 소거되지 않는다. 주몽을 양육하고, '장사 나면 용마 난다'는 속언처럼 영웅의 조력자이자 표징인 명마를 얻게 해줄 뿐만 아니라 건국의 장도를 앞에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주몽을 종용하여 길을 나서게 한다. 게다가 비둘기를 통해 오곡의 종자까지 보내 준다.

 

  이런 유화의 형상은 그야말로 대모신의 이미지가 가시화된 것일 뿐만 아니라 대모신으로서 건국의 실질적 향도와 같은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형상은 고구려 건국신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주건국신화에서 건국주 포고리옹순의 어머니 천녀 부쿠룬은 포륵호리 호숫가에서 홀로 아이를 양육하는데 포고리옹순이 성장한 후 난국의 안정과 통합이라는 천명을 고지하고 배를 만들어 태워 하류로 내려 보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서야 승천하는 것을 보면 거기까지가 부쿠룬의 신화적 역할이라고 만주신화는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몽골건국신화에서 유화의 위상을 지닌 성모 알란 고아도 싸우는 아들들에게 천명을 이야기하고 아들의 아들 중에서 카한이 탄생하리라는 예언을 전하고 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건국주를 양육하고 천명을 고지하고 건국을 지시하거나 예언한다는 점에서 유화·부쿠룬·알란 고아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세 나라의 건국과정에서 여성들을 참으로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문제는 세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의 정체이다. 유화의 생산신적 기능은 다른 두 여성에 비해 특별한 것이니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리고 그 기능은 건국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외로 한다면, 건국과 관련된 이들의 핵심적인 기능은 건국주의 생산과 천명의 고지이다. 문제는 이 생산과 고지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생산의 문제, 즉 대리모적 기능은 이미 웅녀에게서 발견한 것 다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논의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천명의 고지 역시 그것과 마찬가지로 보인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으로부터 직접 고지되는 천명이 여기서는 여성 중개자들을 통해 간접 고지되고 있을 따름이다. 국가라는 것이 남성지배의 제도화라면 건국이라는 천명이 여성 자신의 목소리일 까닭은 없는 것이다. 유화나 부쿠룬이나 알란 고아가 자신의 목소리로 아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하지만 그 목소리가 실은 이들의 신체를 숙주로 삼아 이미 신체 내부에 살고 있는 '남성-파견자-지고신'의 목소리라는 점, 이것이 문제의 요지이다.
물론 이런 여성들의 형상들은 일정 부분은 이들이 주체였던 시조신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만유의 어머니인 창세신화의 대모신-생산신의 이미지를 이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건국신화에서는 이미 전쟁을 발명하고 국가를 창설하고 계급과 서열을 만들고 권력의 지속적 보존을 주야로 강구하는 '알파수컷(Alpha Male)되기'에 의해 감염된 이미지들이다. 남성지배라는 사회적 체계에 의해 영토화된 이미지들이다. 그러므로 감염된 신체 속에서 발화되는 목소리는 이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셈이다. 건국신화가 상징폭력을 통해 보여주는 남성지배의 영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신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유화가 겪은 강간과 추방, 그리고 유폐라는 일련의 실제적 폭력이다. 그런데 이 폭력들은 한결같이 해모수·하백·금와라는 남성에게서 온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라는 권력의 징표를 현시하며 도망가는 유화를 붙잡거나, 혹은 유인하여 억지로 씨를 뿌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쓰고 딸들의 상위신격으로 군림하고 있는 하백은 '아버지의 법에 대한 거역'이라는 누명을 씌워 유화를 추방(귀양)하고, 국왕의 권력을 지닌 금와왕은 임신한 것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유화를 방에 가둔다. 이 유화의 신체에 가해진 거듭된 폭력의 과정은 유화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이란 피해자의 인격을 재조직화하는 과정의 하나인 것이다. 주몽을 향한 유화의 목소리는 결국 재구성된 아이덴티티, 상징폭력의 장 위에서 가능한 실제적 폭력을 통해 신체에 새겨진 아이덴티티에서 발화된 목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화는 후에 국가에 의해 세워진 신묘의 신[夫餘神]으로 성화된다. {삼국사기}를 참고하면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의 왕들도 정기적으로 신묘에 참배하여 부여신을 경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유화에 한정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시조모 숭배는 고대국가에서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화와 경배가 어디까지나 국가의 위엄과 왕실의 정체성확보를 위한 신화적-의례적 수단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신화적-의례적 수단은 성화를 통해 대상을 오히려 수단화한다. 부여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유화-부여신만이 성화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천신에 대한 제사가 '먼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건국주인 주몽에 관한 의례도 아울러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성-부여신은 이런 남성신들을 위해, 혹은 그들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수단화된 신격이다. 그러므로 이는 국가의 시조와 대등하게 숭배된 여성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화된 여성신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여신 숭배는 하나의 아이러니일 수 있고, 다른 형식의 상징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료를 중국 문헌신화 전반으로 확장해도 그 자료가 건국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웅녀의 얼굴이다. 중국신화에는 簡狄·姜嫄·華胥· 祖·塗山氏·附寶·慶都·女登·女祿·女節·女樞·女喜 등과 같은 여신들이 다수 등장한다. 이들은 이른바 感生신화의 저 '느낌'의 주역들이다. 이 느낌은 달리 말하면 천명에 대한 자각이 육체의 반응으로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느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느낌'은 쾌락이 아니라 회임과 생산으로 연결된 것이고 오로지 씨족의 남성 조상을 낳기 위해 동원된 '느낌'이다. 적어도 이 신화들이 담론화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시조의 생산을 위해 느닷없이 포획된 여성의 신체이다. 이 감생신화들이 부권제의 기원에 관한 신화, 혹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신화로 해석되고 있는 것도 실은 이 포획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여신들 가운데 하나의 사례만을 거론해 보기로 한다.

殷나라 설의 어머니는 간적인데 有 氏의 딸이고 帝 의 둘째 妃이다. 세 사람이 목욕을 하러 갔다가 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簡狄이 그것을 주워 삼켰다. 그로 인해 임신을 해서 설을 낳았다.

주지하다시피 이 이야기는 은나라 시조인 契(卨)의 탄생신화이다. 물론 {사기}에 등재된 이 자료에는 지고신에 관한 언급이나 건국에 관한 기사들은 빠져 있고, 있는 것은 시조의 계보와 탄생담뿐이어서 건국신화의 체모를 부실하게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신화의 시조모 간적의 형상이, 만주신화의 시조모, 곧 두 언니들과 목욕하러 왔다가 붉은 과일을 삼키고 임신한 부쿠룬의 형상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신화도 본래는 지고신에 관한 대목이나 건국에 관한 기사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역사화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그런 문맥들이 소거되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원가의 지적대로 간적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제곡이 바로 천제이다. 이 제곡의 비와 유융씨의 딸로 새롭게 자리매김된 간적의 위상은 건국주를 위해 신체를 포획당하고 신체를 증여 하는 유화나 웅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남성성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알'을 삼키면서 간적은 이미 감염된 신체, 재구성된 인격이 새겨진 신체를 지닌 신격이 된 것이다. 이 알은 주몽신화의 하강한 해모수의 신체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가화한 단군신화의 환웅의 신체와 다르지 않다.
이처럼 건국신화에서 시조모되기란 여신이 자신의 신화를 상실하면서 이룬 영광스럽고도 신성한 지위지만 기실 그것은 신성의 의상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의상에 의해 실체가 가려진 타자화된 여신의 다른 표정인 것이다.


4.남성신, 도주와 지배의 형식
우리가 앞에서 읽은 곰나루의 곰녀나 봉화산 암콤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종말은 남성의 건국신화를 통해 재구성된 웅녀의 신체가 필연적으로 봉착한 운명같은 것이다. 웅녀의 신체는 건국주의 탄생이라는 '지하드'를 위해 파견자-환인에게, 혹은 중개자-환웅에게 동원된, 말하자면 '전쟁물자'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물자는 다음 전쟁까지 고철이 된다. 자살하는 웅녀들의 비극은 거기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물자로 타자화되기 이전 곰신은 자신의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서 실현해야 할 자신의 목적, 즉 수조신되기라는 당위가 있었지만 이 목적이 새로운 욕망의 작동에 의해 남성의 신화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물자로 수단화되자 이제는 수단이 목적이 되어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실현해야 할 과업을 '미련한 곰처럼' 묵묵히 수행하게 된다. 육체의 증여를 통해 남성지배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곰나루의 곰녀에게는 수행할 과업조차 없다. 환언하면 곰녀는 남성-나무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어윈커신화의 곰녀는 남성-사냥꾼 없이도 수조신되기라는 할 일이 있었지만, 단군신화의 웅녀는 환웅 없이도 국모되기라는 할 일이 있었지만 곰녀에게는 그것조차 없는 것이다. 배를 타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남성에게는 자식살해의 위협도 소용이 없다. 남성으로부터의 철저한 외면, 지독한 타자화의 문법이 여기에 관철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곰녀의 자살, 혹은 귀신되기라는 곰나루전설의 서사적 결말은, 그러므로 어디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의 의의를 확보하지 못한 여신의 필연적 경로이다. 비극의 파국이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나무꾼이든 사냥꾼이든 남성들은 한결같이 도망자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문은, 설화의 구연자들이 이야기하듯이 단지 무서운 곰에게 붙잡혔던 인간이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것이라는 식의 해답으로는 해소될 수 없다. 게다가 이 도주는 사냥꾼이나 나무꾼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도주는, 앞에서 거론한 대부분의 건국신화의 남성형상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의 깊이가 여기에 있다. 이 남성(신)들의 필사적 도주는 남성지배의 형식이라는 문제와 견고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주몽신화로 돌아가 보자. 주몽신화를 읽어 가다보면 우리를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대목이 튀어 나오는데, 그것은 갖가지 빛깔의 구름 속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흰 고니를 탄 수백의 시자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지상에 하강한 해모수의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당한 해모수가 지상에서 한 것은 기대와는 달리 놀러나온 유화 자매들을 말채로 땅을 그어 순식간에 마련한 궁궐로 꼬셔 술을 취하게 하고는 겁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화를 차지하기 위해 장인되는 수신 하백과 신성능력시합을 벌인 후, 딸을 만취한 자신과 함께 가죽 가마에 넣고 용수레에 실어 하늘로 보내려는 하백의 지극한 노력도 뿌리치고 유화의 황금비녀로 가죽 가마를 뚫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해모수의 위풍당당과 필사적 도주 사이에는 모종의 모순이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는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다.
도주는 해모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일 밤 天窓으로 들어와 알란 고아의 배를 문지르고는 누런 개의 형상으로 기어나가는 몽골신화의 黃人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이로 '위장한' 겁간과 도주일 수 있는 것이다. 환웅은 웅녀의 간걸에 못이겨 가화했다고 했는데 이 가화라는 말 속에는 이미 인간의 형상으로 잠시 변하여 웅녀와 접촉한 후 혼자서 가버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주신화에서 부쿠룬이 삼킨 붉은 과일도 기실은 새의 가면을 쓰고 불쑥 나타났던 천신의 상징물이었던 것인데 부쿠룬은 그것을 먹고는 몸이 무거워져서 호숫가에 홀로 남겨진다. 거기에도 남성신의 도주가 서사의 문맥 속에 엄폐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건국신화의 남성만이 아니라 어윈커기원신화의 사냥꾼도 도망치고, 봉화산의 사냥꾼이나 곰나루의 나무꾼도 기를 쓰고 도망친다. 이 도주의 일관된 흐름이 우리가 풀어야할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이를  屋으로 대표되는 母處父處制의 신화적 반영으로, 나아가 시조신화에 비췬 이같은 친족제도의 이미지가 후대의 서사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반추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는 이 도주를 전승집단의 세계인식, 즉 초월계와 현실계는 일시적인 접촉은 가능해도 지속적인 동거는 불가능하다는 세계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더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남성신이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상이한 서사의 장이다.
남성신의 도주하기는 집단의 일원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시사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여전히 유효한, 통과의례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통과의례와 도주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일종의 통과의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둘째 왕인 유리의 신화이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는 어떤 부인으로부터 '아비 없어 못된 자식'이라는 꾸중을 들은 후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어머니에게 던짐으로써 '새롭게' 자기정체성 확인을 시도한다.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아버지찾기 과정은 유리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검증해가는 과정이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유리라는 한 아이가 남성으로서의 아이텐티티를 구성해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이 남성화 과정이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즉 여성으로부터 벗어나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남성적 통과의례의 상징적 징표는 '부러진 칼'이다. 물론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춰진 물건'이라는, 부러진 칼에 이르는 수수께끼를 유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어머니 예씨지만 어머니의 역할은 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머니는 수수께끼의 답을 모르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주몽의 전언을 전달하는 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유리이고 칼은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유리를 유인한다. 발견된 부러진 칼은 신화 속에서 어머니를 잘라내고 유리를 아버지에게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부러진 칼은 유리를 어머니인 여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남성적인 것의 상징물인 셈이다.
부러진 칼의 나머지는 부친 주몽이 소유하고 있다. 남성적 지혜의 증험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수수께끼풀이를 거쳐 획득된 유리의 칼은 드디어 아버지의 칼과 합체된다. 이 절단된 칼을 접합하는 두 남성의 행위야말로 통과의례의 완료, 남성화 의례의 완료를 집단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완성된 칼은 이제 비로소 전쟁의 무기, 남성적 투쟁의 동력원이 된다.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의 칼을 소유함으로써 아이는 지배자 남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리의 신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성지배의 제도화는 어머니-여성으로부터 벗어나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남성적 권위와 지배는 여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벗어나 남성적 영토에 들어가야만 확보된다는 것이 유리신화의 교의이다. 이런 점에서 이 벗어나기는 일종의 성정치이다. 사회적으로 제조된 생물학적 육체는 정치화된 육체이고 육화된 정치인 것. 위에서 거론한 사냥꾼·환웅·나무꾼 등으로 이어지는 도주의 흐름은 바로 이런 육체화한 성정치의 흐름이고, 반복되고 유전되는 지배자의 통과의례를 통해 남성의 신체에 새겨진 관습화된 행위양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종요로운 지점은 유리의 신화로부터 얻어낸 육화된 정치의 표상인 도주는,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시조신화·건국신화·전설이라는 상이한 서사의 장 위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상이하다는 것은 서사양식이 상이하다는 것이지만 상이한 서사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승집단의 세계인식이고, 이 경우에는 특히 여성들의 세계인식, 남성중심적 세계의 군림 앞에 던져진 여성-자아의 반응방식이다. 이 상이한 반응방식이 상이한 서사적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고 이 서사적 효과는 상이한 여성의 신체 위에서 발휘되는 남성지배의 효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윈커신화의 곰신은 사냥꾼의 필사적 도주 뒤에서 새끼의 신체를 찢는 신화적 행위를 감행한다. 이런 상징적 의례적 행위는 주기적으로 재현되는 의례적 살해, 흔히 신화학에서 하이누벨레형 신화라고 부르는, 세계의 생명은 신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원시사유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이 행위에서 우리가 주시하는 것은 남성의 도주에 대한 곰-여성의 반응이다. 그녀는 새끼를 홀로 양육하지 않고 신화적 절단을 통해 한 쪽을 남성에게 던짐으로써 새로운 생명, 혹은 집단의 기원을 남성과 공유한다. 도주를 통한 남성지배는 도주를 추인하는 여성의 공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여기서 곰-여신은 생명의 공유를 통해, 나아가 집단의 기원이 됨으로써 공모를 거부하고 도주를 넘어선다. 이 곰-여신 앞에서 남성지배는 무기력하다.
필사적 도주를 통한 남성지배는 건국신화의 장 위에서 지배의 효과를 발휘한다. 건국신화는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남성권력의 제도화, 남성중심으로 공식화된 사회적 차별의 체계를 담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건국신화의 장 위에서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적 통과의례를 통해 자신들의 신체를 재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앞에서 말한 여성의 타자화이다. 이 통과의례라는 이름의 타자화는 남성지배를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웅녀나 유화를 통해 살폈던 여성적 통과의례를 통해 건국신화의 여성-신은 건국의 공모자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모적 신체는 이제 도망치는 환웅이나 해모수를 향해 단군이나 주몽의 신체를 찢어 던지는 씩씩한 행위능력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신체이다.
이 공모적 신체의 극단에, 억압까지도 욕망하게 만드는 담론화된 질곡의 극점에 곰나루 곰녀의 봉화산 암콤의 반응이 돌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 반응은 어윈커신화에서 곰여신이 보여주었던 의례적 살해 행위가 아니다. 나무꾼의 도주는 남성지배의 전형적인 방식이지만 나무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곰녀의 인식, 다시 말해 남성지배를 무의식적으로 추인하게 만드는 곰녀의 신체화된 인식은 나무꾼의 도주를 자기살해의 형식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곰녀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남성화된 세계의 완강한 '낙화암' 앞에서 몸을 던지고 마는, 절망적인 동반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곰녀들의 자살이 새로이 부가된 원귀되기라는 변이를 통해 우리 구비사에 충만한, 여성의 원귀되기와 해원하기를 대종으로 하는, 저 원귀전설과 만나는 것은, 나아가 원귀되기를 주요 화소로 삼고 있는 {장화홍련전}류의 가정소설과 만나는 것은 마땅한 귀결이다. 이 자살이야말로 곰신에서 웅녀로 웅녀에서 곰녀로 이어지는 역사가 어떻게 원귀전설의 역사와 하나의 계보를 이루는지, 나아가 가정소설의 탄생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살은,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왜 이 계보가 남성지배라는 시각에서 조명되어야만 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5.사회적 차별체계의 외부
건국신화는 고대국가의 신성한 기원을 말하는 신화이지만, 그 고대국가는 남성에 의해 조직되고 획득된 국가라는 점에서, 건국신화는 남성권력의 사회적 제도화와 공식화를 공공의 담론으로 조직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남성권력의 사회적 공식화란 달리 말하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사회적 차별의 공식화이고 체계화이다. 이 체계의 영토 위에서, 이 상징적 주술의 영토 안에서 육체적 관습은 형성되고, 개인은-남성이든 여성이든-이 육체적 관습에 의해 사회적 의미를 체험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웅녀와 유화의 신화상실은 바로 이런 신체화된 인식을 통해 차별을 집단적 믿음, 혹은 집단적 오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적 차별체계의 영토 위에서 벌어진 고대적 사건이었다. 곰녀들의 전설은 이 사건의 지속적 파장, 파장의 한 극점이었다.


그러나 신화의 여성주의적 독해는 건국신화 읽기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사회적 행위란 정해진 습속의 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신체화된 인식에는, 사회적 차별의 체계에는 체계에 포획되지 않는 외부가 있게 마련이다. 다시말해 이 차별의 체계라는 신화적-의례적 체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주체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윈커신화에서 볼 수 있는 건국신화 이전의 여신, 이런 여신의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 건국신화 등장 이후의 여신들 속에서 그런 주체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주체야말로 남성지배의 틈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틈을 신화를 통해 다시 사유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있을 여성주의적 신화 읽기의 또 다른 경로이다.

출처 : 그닥 시답잖은 나의 공간
글쓴이 : 이충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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