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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400여년전 거북선 실체 더듬어 보기

_______! 2008. 10. 29. 15:12


거북선(龜船)은 한국의 전통 무기 체계 중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부터 시골의 촌로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 중 거북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거북선 연구사(硏究史)를 중심으로 거북선의 실체를 분석해 본다.

불행히도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연구는 외국인이 시작했다. 1933년 호리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연희전문 교수는 ‘한국의 배’(Korean Boats and Ship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언더우드가 연구한 거북선 복원도에는 큰 오류가 있었다. 한국식 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언더우드가 거북선 노를 그리스·로마 갤리선의 서양식 노처럼 복원한 것.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제작, 현재 아산 현충사 유물관에 소장돼 있는 6분의 1 크기 거북선 복원 모형(1969년 제작)의 노도 서양식 노로 복원돼 있다.

비슷한 시기 한국기자협회 후원으로 제작된 이순신 십경도(十景圖)에 나오는 거북선이나 북한 당국이 제작, 중국에 기증한 중국 역사박물관 거북선 모형도 마찬가지다.

거북선의 노가 한국식 노라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은 1976년 남천우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와 고대 선박연구가인 이원식 선생의 공이다.

1970년대 고(故) 김재근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거북선 내부 구조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김교수는 갑판을 2층으로 만들어 선실을 포함, 총 3층으로 만든 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板屋船)이고 거북선은 판옥선에 지붕 역할을 하는 개판(蓋板)을 씌운 것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든 이유는 동일하다. 근거리 보병 전투에 약했던 조선 수군이 적들이 배 위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선체 높이를 높인 것이 판옥선이고, 아예 지붕을 씌워 적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남교수는 1976년 거북선의 내부 구조가 3층이라고 주장,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남교수에 이어 오늘날 최두환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 장재근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사부장까지 가세하고 있는 3층설의 근거는 노를 젓는 격군과 전투 요원들이 다른 갑판에서 근무해야 전투 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2층설을 주장하는 김교수의 근거는 거북선의 기본 자료인 ‘이충무공전서’ 본문 설명이 2층임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전통군사 연구가 신재호씨처럼 2층에는 격군과 총통 운용 요원, 3층에는 활 쏘는 사부가 탑승했다고 절충적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거북선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1979년에 최초 복원, 해군사관학교에서 전시하던 실물 크기 거북선은 고 조성도 해군사관학교 교수가 복원을 주도했지만 김교수의 주장에 가까운 2층 구조 내지 반 3층설에 가까운 거북선이다. 서울 한강에 계류된 거북선과 전쟁기념관 거북선 모형 등 현재 복원된 대부분의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2층 구조로 돼 있다.

최근 거북선 연구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최실장에 의해 이뤄졌다. 최실장은 1999년 발표한 ‘임란시의 원형 거북선에 관한 연구’를 통해 1795년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따른 거북선이 아닌 임진왜란 당시의 원형 거북선 모습을 밝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최실장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머리에서 유황 연기를 피운 것이 아니라 현자 총통을 운용했다는 점과 총통을 쏘는 총혈이 총 14개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거북선 복원 모형들은 수많은 연구가의 고뇌와 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좀 더 개연성이 높은 거북선 복원 안이 제시돼 온 것이다.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고 있는 거북선의 실체를 좀 더 정확히 밝히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 과연 철갑선인가?-日 역사 ‘조선에 철로 감싼 배있다’ 기록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아닌가. 일반인들은 명쾌한 해답을 원하겠지만 학자들의 결론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지만 철갑선일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 ‘이순신행록’ ‘이충무공 전서’ 같은 한국 측 역사 자료에는 거북선의 지붕에 쇠송곳을 장착했다고 돼 있을 뿐 철갑선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때문에 이미 1920년대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위당 정인보 선생은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광복 이후에도 저명한 조선공학자였던 김재근 교수가 “철갑선일 경우 부력과 복원력이 없어 전복될 것”이라며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일본 측 역사 기록인 ‘지마군기’(志摩軍記)나 ‘정한위략’(征韓衛略)을 보면 ‘세 척의 장님배가 철로 보호돼 있다’거나 ‘조선 수군에는 완전히 철로 감싼 배가 있다’고 기록, 거북선이 철갑선일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서구권 학자 중에 최초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한 인물은 선교사이자 사학자였던 미국인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였다. 1906년 집필한 ‘한국견문기’에서 ‘이순신 제독이 철갑선을 개발했다’고 소개한 것. 헐버트가 말한 철갑선의 원래 용어는 ‘ironclad’다. 이것은 목제 혹은 철제 재질의 배 일부에 철제 장갑을 덧붙인 배를 의미한다.

전통군사 연구가 신재호씨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철갑선의 정의에 대한 분석 없이 막연히 철갑선 여부를 논해 온 감이 없지 않다”며 “거북선의 상부 구조가 모두 철로 된 것이 아니고 일부에만 철판을 덧붙인 것이라면 부력이나 복원력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박혜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도 “거북선의 철판은 조선 시대 성문 구조처럼 나무 위에 철판을 덧붙인 것일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사쿠라이 타케오 일본 교토(京都)대 항공학과 교수는 1999년에 발표한 ‘거북선의 복원력에 관한 조선공학적 소고’라는 논문을 통해 이들의 주장을 물리학적으로 뒷받침한 바 있다.사쿠라이 교수에 따르면 “거북선 상부에 철갑을 설치할 경우 무게 중심은 상승하지만 거북선의 흘수가 상대적으로 높아져 복원력이 손실되지 않는다”는 것.

사쿠라이 교수는 김재근·조성도 교수 등이 제시한 거북선 복원 모형을 토대로 복원력을 계산, “철판 두께가 2mm인 경우는 물론 8mm인 경우에도 복원력에 문제가 없다”는 계산 결과를 제시했다.
특히 사쿠라이 교수는 “김교수가 제시한 복원 모형의 경우 철판 두께가 32mm인 경우에도 복원력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며 “흘수가 증가돼 무게 중심이 올라간 약점을 상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최근의 연구 결과는 거북선이 철갑선일 경우에도 복원력·부력에는 문제가 없음을 보여 준다.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분명한 근거만 발견된다면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다시 인정받을 수 있다.


■ 척수와 활약상-임진왜란때 3~5척 내외 보유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의 조선 측 역사 기록에는 거북선은 세 척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거북선 보유량을 다섯 척이라고 밝힌 기록이 확인돼 최소한 다섯 척은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종결 시점에 몇 척 정도의 거북선이 존재했는지는 아직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 때까지는 전라좌·우수영, 경상좌·우수영, 충청수영에 각 한 척씩 다섯 척을 보유했다. 하지만 영조 이후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 1746년 편찬된 ‘속대전’에 따른 법적 보유 기준은 14척으로 돼 있다. 1808년 간행된 ‘만기요람’에는 거북선 보유량이 30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에는 거북선 보유량이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 무적의 배라는 거북선을 좀 더 많이 건조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김재근 교수는 “거북선은 지붕을 씌워 좁은 장소에서 승무원이 활동하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록을 보면 나대용도 임진왜란 직후 “거북선은 사부(射夫·활 쏘는 사람)가 활동하기에 매우 불편하다”며 거북선 대신 자신이 발명한 창선( 船)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김교수는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맹활약해 임진왜란 해전 승리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주력 함정은 최대 200여 척에 달했던 판옥선”이라며 “거북선이 승리의 유일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화”라고 설명한다.


■ 발명자는 누구? -태종代에도 존재… 나대용 발명설 가설

태종(1401~1418년)대에도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두 차례 남아 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발명한 것이 아니고 기존 거북선을 개조한 것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실록에도 태종대의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16세기 중반에 개발된 판옥선과 구조상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므로 태종대의 거북선은 별개의 함정”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일부에서는 거북선을 개발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고 나대용(羅大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들도 그가 단순히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는 내용일 뿐 그가 주도적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남긴 여러 기록에 본인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으므로 ‘거북선의 창제자는 이순신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거북선 제작 과정에서 이순신과 나대용의 구체적인 역할 분담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다.

현재 학자들은 발명자를 추적하기보다 “엄격한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에서 새로운 규격의 군함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그 결단을 이순신 장군이 내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4. 29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출처 : 재규의 철학사전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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