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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단풍’ 아쉬움에 젖고 ‘억새군락’ 운치에 반하고

_______! 2008. 11. 15. 01:47
문화일보

‘마른 단풍’ 아쉬움에 젖고 ‘억새군락’ 운치에 반하고

기사입력 2008-11-14 11:00 |최종수정2008-11-14 14:00 기사원문보기

유명산 정상 직전 북능길의 숲길. 진녹색의 키 큰 전나무와 단풍 빛깔이 대조를 이루며 색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북능선은 다소 가파르지만 정상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코스다.

“유명산은 뭐가 유명해서 유명산인가요?” 경기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을 끼고 있는 유명산(有明山·864m) 정상에 오르면 누군가 꼭 이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주변 누군가 이 질문을 받아 “1970년대에 한 산악회가 이름이 없는 이 산을 발견해 등반대원 중 유일했던 여성의 이름을 따서 유명산으로 이름 붙였다”고 으쓱해 하며 말해 준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다소 기대에 못미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기 마련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 “옛날 이 산의 정상에서 말을 길렀다고 하여 말이 뛰노는 산이란 뜻의 마유산(馬遊山)으로 불렸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번 주초에 유명산을 찾으면서 가평군에 문의해서 확실하게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았다. 1973년 한 일간신문사의 후원으로 제2차 국토 중앙자오선 종주등반을 하던 산악회원들이 아름다운 산임에도 지도에 산 이름이 없어 대원 중 유일한 여자대원이었던 진유명씨의 이름을 따 ‘유명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신문 지면을 통해 산 이름이 처음 호명되면서 유명산으로 정착됐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지도상에 이름이 없었을 뿐,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이미 ‘마유산’이라 기록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명산 정상이 조금 편평하긴 해도 그곳까지 말들을 몰아 뛰놀게 할만한 지형은 아닌 것 같아 옛 문헌의 정확성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 옛 이름 마유산과 관련한 알려지지 않은 슬픈 전설을 가평군으로부터 듣게 됐다. 옛적 여기 산속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어렵사리 아이를 하나 얻었다. 그런데 아침에 낳은 아이가 저녁에 밥상 위로 올라가더란다. 옛적에는 상서롭지 않은 아이는 역적이 될 인물이라 하여 아이와 함께 그 일족까지 멸하였으니, 겁이 더럭 난 부부는 급기야 아이를 죽여 땅에 묻었단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이의 무덤에서 말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산 이름이 마유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모르긴 해도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던 조선시대에 한 부부가 가문의 씨를 잇기 위해 이곳까지 숨어들었으나 불행히도 갓난아이가 죽어 이같은 전설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전설을 들으니 다시 한번 유명산을 둘러보게 된다.

어쨌든 처음 개척된 암반 코스에 산악회나 등반자 이름이 붙은 곳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멀쩡한 이름이 있는 산을 ‘처음 발견했다’면서 연고도 없는 사람 이름을 붙인 것은 개운치 않다. 이미 ‘유명산’으로 유명해졌지만, 역사적 유래나 전설이 담긴 이름이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유명산은 흔히 유명계곡으로 알려진 입구지계곡과 국내 최초로 지정된 휴양림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맘 때 유명산의 ‘천불동’으로 불리는 입구지계곡의 ‘만추(晩秋)’는 볼만한데, 올가을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단풍도 일찍 말랐고 계곡의 수량도 적어 기대했던 풍광은 보지 못했다.

입구지계곡 코스를 통해 유명산을 오를 때 정상 바로 밑에서 만나는 억새밭.

유명산은 동쪽으로 용문산(1157m)이 이웃해 있다. 약 5㎞에 달하는 입구지계곡은 용문산에서 시작되면서 수량이 풍부하다 보니 박쥐소, 용소, 마당소 등 소(沼)들이 많고 협곡과 단애도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발달해 있다.

유명산 휴양림 주변에는 100개가 넘는 야영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오토캠핑장도 있어 여름에는 물놀이와 등산을 동시에 즐기려는 가족 단위 야영객으로 붐빈다. 이날도 다소 철이 지났지만 캠핑객들이 적지 않았다.

산행 들입목은 보통 휴양림과 계곡이 있는 설악면 가일리 쪽을 택한다. 산행은 입구지계곡을 충분히 감상하면서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내려오는 것이 가장 좋다. 산행 시간은 3시간30분 정도. 좀 더 산을 타려면 정상에서 바로 떨어지지 않고 소구니산과 선어치고개까지 갔다가 도로를 타고 내려오기도 한다.

요즘은 아예 유명산의 동쪽 어비산에서 시작해 유명산 - 소구니산 - 중미산까지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을 종주하는 사람도 많다. 유명산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다보면 왼편으로 입구지계곡과 오른편으로 바로 정상으로 오르는 북능길로 갈라진다. 입구지계곡은 들어갈수록 너덜바위로 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여름에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경험해본 독자가 있겠지만 늦가을에 바싹 마른 나뭇잎도 잘못 디디면 잎이 가루로 부서지며 물에 젖은 바위만큼이나 미끄럽다. 늦가을 산행 땐 조심해야 한다.

한 시간 정도 계곡으로 들어가면 두 계곡물이 만나는 합수지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이 정상으로 가는 코스다. 다소 가파른 길을 30여분 오르면 정상이 나오는데 정상 직전에 크지 않은 억새군락이 있다. 이곳에서 탁 트인 전망을 만나게 되는데 멀리 남한강이 들어오고, 정상에 군사시설이 설치된 용문산과 함왕봉, 대부산 등 주변 첩첩 산들이 한눈에 보인다. 하산은 북능길을 택하면 되는데 다소 가파르다.

등산코스


▲ 가일리 주차장-입구지계곡-정상-북능-주차장(8㎞, 3시간30분)

▲ 가일리 주차장 - 입구지계곡 - 정상 - 소구니산 - 선어치고개 - 가일리 주차장(12㎞, 4시간10분)

대중교통

▲ 서울 상봉터미널에서 유명산휴양림 직행. 1일 8회 운행

▲ 동서울터미널 또는 상봉터미널에서 춘천행 타고 청평에서 하차 후 시내버스 이용

자가운전

▲ 경춘국도 청평 팔각정 휴게소에서 설악 방면으로 접어들어 청평댐을 건너 37번 국도를 타고 청평호반 유원지를 지나면 신천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남쪽 도로를 12㎞ 정도 달리면 유명산 종합주차장이 나온다.

글·사진 =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