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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권율 도원수부(府)는 없었다.

_______! 2010. 5. 13. 21:19

권율 도원수부(府)는 없었다.  


 얼마 전 “ 이순신 프로젝트의 잘 못된 사업계획”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바 있었다.

그 내용 중 합천군에서 실시하려는 權慄 都元帥府 재현사업을 위한 공청회에서 일부 참석자가 이순신 장군이 합천에 머물렀던 <이어해 가>의 복원 문제로 강한 반발을 일으켜 급기야 율곡면을 중심으로 郡內에 여론이 파급되더니 12월 8일자로 이에 대한 군민. 향우 982명이 동참한 진정서를 합천군과 군 의회. 경남도. 도의회. 경남발전연구원에 발송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1996년경 합천군에서는 이순신 장군께서 합천군 관내를 백의종군한 길을 답사 복원하는 사업을 실시한바 있었고,

97, 1월에는 율곡면 낙민 2리 梅也 마을에서 초계 면사무소까지 백의종군로 걷기행사를 가진 바도 있었다.

합천군에서는 이 백의종군로의 조사를 향토사학회에 맡긴바 있었고 郡에서는 삼가면에서 시작하여 쌍백, 대양. 율곡. 초계까지의 로정에 안내표시판과 필요한 시설도 설치했다.

그 중 초계면사무소에 설치한 표지석 에는 향토사학회의 의견대로 권율 도원수부가 초계면사무소 자리에 있었고, 이순신 장군께서 모여곡에서 이곳까지 5차례 왕래했다는 내용을 기록해둔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의 제기는 <이어해 가 복원>에서 권율 도원수부에 까지로 번지게 되어 진정인 대표 몇 분은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는 등 都元帥府 사업에 대해서 고증을 거쳐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서게 까지 되었다.

백의종군로 사업은 본인 재임 시에 시행했던 사업이라 신경이 쓰여서 문제의 핵심인 권율 도원수부와 관련된 부분을 공부하게 되었다.

都元帥府라고 하면 朝廷에서 都元帥가 업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설치한 관청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시대의 역사서와 관련 문헌에서는 “도원수부(都元帥府)” 라는 관청은 없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비변사(備邊司)”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제반 軍國機務를 총괄 하였고,

도원수(都元帥)라는 직제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임시직제이다.

더군다나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한 “난중일기” 내용 중에 도원수와 접촉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매번 元帥陣이라고 했지 부(府)라는 기록은 전혀 없었다.

공부를 하던 중 “도원수부” 라는 내용을 발견하고 신중히 열람한바 都元帥斧이었다, 부(斧)는 도끼를 말하는데,  전쟁수행을 위해 전장에 나가는 장수를 임명하면서 임금이 직접 符信( 신임하는 증표)으로 주는 儀仗용 도끼인데 부월(斧鉞)이라고도 하는 이 증표는 전장에서 정벌(征伐), 군기(軍紀), 중형(重刑)에 대한 生殺權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馬牌)와도 같은 성격의 것이라 하면 될 것이다.

도원수를 배출한 집안에서는 그 도끼(斧鉞)를 가보로 보관하면서 “도원수부”라고 한다.

官廳으로는 대한제국 말엽인 1899년(광무3) 고종황제가 君主權을 강화하기 위하여 최고 군통수기관으로 설치한 관청이 元帥府인데, 황제는 大元帥로, 황태자는 원수로 하여 황궁 내에 두었다.

설치연대가 近世이기 때문에 원수부라는 용어가 쉽게 사용 될 수도 있어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도서가 약 200종이나 되어 저자에 따라 번역의 표현이 다양하여 都元帥府로 표현된 것이 있다면 이것은 誤譯이다.

예를 들면 “난중일기” 정유년 6월4일치 원문에 개벼리에 대한 내용을 쓰고 맨 끝에 그냥 <毛汝谷>이라 했는데, 이은상 선생의 번역에는 “여기가 모여곡”이라고 했으니 毛汝谷이 영전2리로 해석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권율 도원수부 재현사업 계획서에 의하면 1백억 원 대의 예산이 투입되는 점에서 역사적 고증은 물론 역사적 가치나 후세의 교육적 가치 등을 충분히 검토하여 신중히 추진돼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권율 도원수부(府)라는 관청을 임의로 꾸며서 재현이라고 한다면, 분명 큰 우를 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전문가의 충분한 고증을 거쳐 추진돼야 한다는 원칙을 합천군은 준수하기를 바란다. 

 

출처 : 강석정의 사랑방
글쓴이 : 보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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