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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길을 내주렴… '토끼' 만나러 가게

_______! 2011. 2. 20. 19:21

파도야 길을 내주렴… '토끼' 만나러 가게

 

 

저물녘 비토섬을 안은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낮게 엎드린 작은 섬들을 배경으로, 굴을 양식하는 지주(支柱)들이 실루엣으로 가지런하다.


경남 사천 기행―비토섬·대숲·다솔사

눈부셔라…竹竹 솟은 비봉내 대숲


신묘년(辛卯年)을 맞아 토끼를 만나러 간 길이었다. 경남 사천 끝자락에 별주부전의 고향, 비토(飛兎)섬이 있다. 그 섬이 품은 또 다른 섬들이 토끼와 거북을 똑 닮은 모양으로 별주부전의 후일담을 품고 있다 했다.

거기서 뜻밖에도 압축된 한 해를 만났다. 입춘(立春)을 넘긴 겨울의 끝자락, 계절은 급속도로 바뀌었다. 첫날 대숲에 내리쬐던 햇살은 다음날 바람에 흩날리는 잔설(殘雪)이 되어 반짝였다. 일몰을 만나러 간 비토섬에선 저 멀리 소나기가 몰려왔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을 향한 길엔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봄빛과 겨울 눈, 여름 비와 가을 바람이 사천에서 뒤섞였다.

계절감을 지운 사천은 고요와 평온으로 충만하다. 한려수도와 맞닿아 바다 멀리 작은 섬들이 출렁인다. 그 해안가 갯벌은 지주(支柱)식 굴 양식으로 어촌의 생활을 머금고 매일 파도와 숨바꼭질한다. 뿐인가. 바다 먼 육지에선 대숲이 출렁이며 봄바람을 부르니, 사천을 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쉽다.

별주부전의 후일담, 비토섬

양편에서 몰아치던 파도는 조금씩 멀어졌을 것이나 파도의 잔영으로 그 뒷걸음이 보이지 않았다. 길이 열린 건 순식간이었다. 양편의 파도가 서로 만나지 못한 빈자리가 곧 길이었다.

경남 사천 비토섬에서 월등도(月登島)로 넘어가려 할 때였다. 월등도는 늘 오갈 수 없다. 두 섬을 잇는 길은 오직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전남 진도의 '신비의 바닷길'과 같은 이치다. 주위보다 해저 지형이 높을 때, 조류를 막는 섬으로 해류의 방향이 바뀔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그 '순간의 길'에 오르는 시간은 묘하다. 양쪽으로 파도가 조용히 나서고 물러서길 반복하는데, 발을 딛고 선 땅을 침범하진 않는다. 월등도를 향한 길 위 풍경은 갯벌을 수놓은 굴 양식장을 넉넉히 동반하고 있다.

월등도에 들어서면 더 이상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섬이 작아 섬 내 모든 길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건너온 길 그대로 나아가면 정면으로 토끼섬과 목섬이, 옆으로 거북섬이 보인다. 거북섬은 이름처럼 목을 쭉 내민 거북을 닮았다. 토끼섬은 어렵다. 한 월등도 주민이 말했다. "여기선 잘 모르겠죠? 배 타고 섬 뒤편으로 가봐야 또렷이 알 수 있어요."

겨울 사천 대숲에는 겨울과 봄이 동거하고 있었다. 봄바 람 부르는 연녹색 댓잎에 바람에 흩날리는 잔설이 쌓여 햇빛에 반짝인다.


토끼섬과 거북섬과 목섬은 별주부전의 후일담을 공유한다. 거북 별주부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궁에 갔던 토끼가 '간을 떼 말린다'는 허황된 얘기로 위기를 모면한 건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토끼의 고향, 월등도에 다다랐을 무렵 토끼는 육지를 보고 성급히 뛰어내리다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다. 별주부는 용왕이 내릴 벌을 걱정해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토끼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바위 끝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거나 가지 못해 머문 자리가 각각 섬이 됐다. 이들이 토끼섬과 거북섬, 목섬이다(모두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예전부터 구전(口傳)돼 오는 얘기다).

다시 토끼섬에서 월등도를 거쳐 비토섬으로 나올 때 그 섬들의 유래는 서로 공명한다. 토끼가 죽은 자리에서 토끼의 고향을 거쳐 토끼가 나는 형태의 섬으로 돌아오는 것. 그때, 비토섬이란 이름은 꼭 별주부전의 토끼를 기리기 위한 이름 같다.

비토섬은 아무래도 아침보다 저녁에 찾는 편이 낫다. 전설이 지닌 슬픔의 중량도 무겁거니와 비토섬이 지닌 고요의 풍경 때문이다. 해가 질 무렵이면 멀리 운무가 감싼 섬들을 배경으로 굴을 양식하는 지주(支柱)들이 실루엣으로 가지런하다. 사이사이, 파도가 철썩일 때마다 낮게 몸을 숙인 해에 비쳐 발간 물비늘이 반짝인다. 해진 뒤에도 풍경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겨울, 찬란한 대숲

사천은 곳곳이 대숲이다. 낮게 출렁이는 산맥 사이, 혹은 평지에 홀로 솟은 작은 언덕에 대가 모여 산다. 겨울에 대나무는 쉽게 눈에 띈다. 간혹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그 풍경에 들어설 때도 있다. 그러나 침엽수의 진녹색과 대숲의 연녹색은 다르다. 대나무 쪽이 더 청량하고 맑다.

사천에서 가장 찬란한 대숲은 비봉내마을에 있다. 대밭고을이 그곳이다. 역사는 짧다. 1965년 거제에서 강춘성씨가 대나무 세 그루를 옮겨 심었다. 40년 넘는 시간, 대는 넓고 높게 자라났다. 약 3만㎡(1만여평) 부지에 5만 그루가 솟았다. 우후죽순이란 말이 실감 난다.

본래 대는 전남 담양이 유명하다. 규모 덕이다. 대밭고을은 작은 대신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의젓한 토종닭이 산책로 곳곳을 누빈다. 아침이면 닭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대숲에서 메아리친다. 메아리를 받아내는 대나무 역시 굵고 높아 의젓하다. 대밭고을 박순덕씨는 "여기 주종이 맹종죽"이라 했다. 맹종죽은 평소 흔히 보는 담양 소쇄원의 왕대보다 굵다.

겨울 대숲은 즐거운 모순으로 충만하다. 무성한 댓잎으로 어둑한 그곳에 들어설 때, 뜻밖에도 어둠은 냉기 대신 온기를 품는다. 하늘을 바라보면 연푸른 댓잎 사이로 햇빛이 환하다.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살피면 그 햇빛으로 대 마디가 명도를 달리하며 하얗게 빛난다. 눈이 내린 뒤 그 풍경은 더욱 찬란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에 붙은 잔설이 반짝이며 흩날린다. 멀리서 바라보는 대숲 역시 눈이 즐겁다. 파란 대숲에 하얀 눈꽃이 핀 듯하다. 바람에 출렁이는 대나무와 그 위를 한껏 덮은 눈, 모두 맑다.

사천 대밭고을 산책길은 짧다. 대략 20분이면 다 돌 수 있다. 아쉽다면 체험학습을 신청하면 된다. 한 시간쯤 숲 해설가가 동행해 설명해준다. 대나무 피리 만들기 체험도 있다.

차의 성지, 다솔사

비토섬 해안도로변 포장마차에서 맛볼 수 있는 굴구이.

다솔사(多率寺)는 검소하다.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는 일주문(一柱門)도 천왕문(天王門)도 없다. 우락부락한 사천왕(四天王) 대신 소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팔을 벌린 터에 적멸보궁, 대양루, 웅진전, 극락전 등이 옹기종기 모였다. 그 뒤편으론 널찍한 차밭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사방이 둘러싸인 다솔사는 검소한 대신 많은 이야기를 품었다. 다솔사는 '차의 성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다. 1960년대 다솔사 주지 효당 스님이 절 뒤편 수백 년 묵은 야생 차나무를 다듬고, 차 좋다는 절에서 차나무를 얻어 심었다. 그 찻잎을 물에 데친 뒤 9번 덖고(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고) 황토방에서 말려냈다. 이름하여 반야로(般若露). 그 차로 다솔사는 '차 좀 마셔봤다'는 이들이 순례 삼아 들르는 명소가 됐다.

만해 한용운과 소설가 김동리도 다솔사와 연(緣)이 깊다. 효당 스님의 스승이 만해다. 1930년대 이곳에 은거하며 독립운동단체 '만당'을 조직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4년 효당 스님이 다솔사 아랫마을에 세운 야학 '광명학원'의 교사였다. 여기 요사채에 머물며 소설 '황토기' '역마' ' 바위' 등을 썼다. 그의 대표작 '등신불' 역시 다솔사에서 만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서 촉발됐다고 한다.

다솔사에 왔다면 마땅히 보안암(普安庵)까지 걸어야 한다. 약 2km의 숲길은 처음엔 약간 가파르나 이내 능선 따라 평탄한 길로 바뀐다. 길 양편으로 펼쳐진 소나무 숲은 짙은 색으로 묵중하되 가지의 유려한 곡선으로 활달한 풍경이다.

이 풍경은 보안암 바로 앞에 다다라서야 주춤한다. 소나무가 물러선 자리에 늦가을 풍경이 들어섰다. 훤칠한 서어나무는 솟을수록 잔가지를 미로처럼 흩뜨렸고, 흙길엔 낙엽이 수북하다. 그 짧은 길 끝에 깎지 않은 돌을 층층이 쌓은 돌계단이 보안암으로 이어진다. 돌계단을 닮은 돌담에선 겨울에도 이끼가 자랐다.

고려 말 승려들이 수행하기 위해 지었다는 보안암은 석굴이다. 경주의 석굴암처럼 인위적으로 만든 굴 안에 돌부처가 앉아 있다. 그 뒤론 작은 나한들이, 아래에는 도깨비를 새긴 향 받침이 있다. 장엄하진 않아도 정갈한 모습이다.

여행수첩

다솔사→대밭고을→비토섬 순이 편하다.

①다솔사: 남해고속도로 곤양나들목→곤양 방면 우회전→12㎞쯤 가면 '다솔사' 이정표가 나온다.

②대밭고을: 온 길을 돌아 나와 봉명로로 우회전→약 3㎞쯤 가면 오른편에 있다. 미리 예약해야 한다. (055)852-1537, www.bamboo.co.kr


③비토섬: 봉명로 따라 남쪽으로 직진→서포면사무소 앞에서 '비토' 방면으로 직진하면 된다. 섬에 들어서 첫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해안도로가 나온다. 해안도로 따라 직진하면 월등도 넘어가는 길이다.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다.

비토섬은 굴 양식으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변에 굴구이를 하는 포장마차가 여럿 있다. 굴 1망(2만원)이면 3~4명이 먹을 수 있다.

삼천포항 인근 파도한정식(055-833-4500)과 향원식당(055-832-8810)에선 해산물로 차린 한정식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1인 8000~9000원.

사천읍 수석리의 '재건냉면'도 많이 알려졌다. 냉면에 전분 함량이 높은 쫄깃한 면을 쓰고 후추를 많이 뿌린 게 특징이다. (055)852-2132

비토섬 안에는 숙박하는 곳이 드물다. 삼천포항 인근 삼천포 해상관광호텔의 전망이 좋다. (055)832-3004, www.3004hotel.com 삼천포항 바닷가를 끼고 모텔이 많다.

문의 경남 사천시 문화관광과 (055)83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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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글·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사진·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canyou@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