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도감 설치(1426.2.26)
"지금 우리나라의 화재가 일찍이 이렇게 심한 적이 없었다."(세종실록 권31). 국왕 세종이 크게 우려할 정도로 1426년(세종 8) 조선 도성인 한성에 화재가 그치지 않았다. 특히 2월 15~16일 이틀 동안 발생한 대화재는 수도를 세운 이래 최대 재난이었다.
2월 15일 낮 한성 남부의 한 가옥에서 처음 치솟은 불길은 때마침 세차게 불어온 서북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대부분 집들이 초목으로 지어졌고 닥지닥지 붙어 있는 상태여서 도성 안은 금세 불바다로 변했다. 민가 2천170호와 행랑 160칸이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 23명이 사망했다. 불에 타 재로 변한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날에도 다시 불이 나 민가 200여 호가 소실되었다. 단 이틀 동안 도성 안 가옥의 6분의 1인 2천400여 호가 사라져 버렸다. 화재는 북청·길주·영흥 출신의 유민 7명이 저지른 방화로 밝혀졌고, 이들은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화재를 방비할 전담기관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2월 26일). 제조(提調) 7, 사(使) 5, 부사(副使)·판관(判官) 각 6명으로 구성된 금화도감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기관이다. 금화도감은 그해 6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통합,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이름을 바꾸어 화재 방지와 도성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1460년(세조 6)에 폐지되기도 했으나, 화재가 빈번해지자 1481년(성종 12) 수성금화사(修城禁火사司)로 다시 설립되었다. 수성금화사는 멸화군(滅火軍)을 별도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24시간 대기해 있다가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출동해 진화에 나서는 전문 소방대원이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서산 물막이 공사 성공((1984.2.25)
△소설가 존 스타인벡 출생(1902.2.27)
△영화감독 하길종 사망(1979.2.28)
△포니 1호 첫 출고(1976.2.29)
△피아니스트 쇼팽 출생(1810.3.1)
△버마 네윈, 쿠데타 집권(196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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