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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북바위와 서화동원

_______! 2013. 7. 16. 19:43

* 거북바위와 書畵同源

 

아래는 일명 서시과차(徐市過此), 서불과차(徐市過此), 남해각석(南海刻石), 남해암각(南海巖刻),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가로7m, 세로4m의 거북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가로1m, 세로50cm 크기의 남해 상주리 석각(南海 尙州里 石刻)의 사진과 탁본이다.

 

 

 

이는 경남 도기념물 제6호로,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산4~3 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 거북바위의 "남해 상주리 석각"을 둘러싼 구구한 전설과 수많은 학설이 전해지고 있는바,

이는 아직, 이 거북바위에 새겨진 석각이 정확이 해독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것이 겠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석각에 새겨진 것은 분명 文字의 始原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이 거북바위에 새겨진 석각이 "그림과 글씨는 한뿌리" 라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의 흔적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서예계에는 이 석각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것 같다.

자국 보다는 중국의 자료에 너무 경도되어 우리것을 등한시 하여 소홀히 한 것 같아

미약하나마 나름대로 정리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거북바위에 새겨진 석각의 학설은 단군문화와 서불도래에 관련된 전설이 서로 크게 상충하여

檀君文化說과 徐市渡來說로 나누었고, 나머지 其他諸學說의 세가지로 구분하였으니 눌러보기 조인다.

 

위의 사진 왼쪽 하단에 보이는 "天"자는 후세에 누군가 새겨 넣은 것이라 추정하고 있으며,

남해 금산의 이지역 일대에는 거북바위와 같이 알수없는 문양의 암각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1) 단군문화설(檀君文化說)

 

단군문화설은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문헌과 단군유적에 근거하는 설로,

李陌의 太白逸史등 여러 문헌에 이와 관련된 언급이 있고,

이 거북바위가 있는 남해 금산에 檀君聖殿과 扶蘇巖이 있는데,

부소는 진시황제의 장자 보다는, 단군왕검의 차자와 연관이 있는 바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부에서는 이 거북바위의 석각이 사슴 발자국 형태의 문자인 鹿圖文字라 주장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녹도문자에서 加臨土文字가 나왔고, 가림토문자는 훈민정음의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창힐이 이런 녹도문자를 배운뒤 돌아가 甲骨文字를 거쳐 지금의 한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실증사학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황당무계한 설로만 들리는 것은,

환단고기와 같은 사료들이 주류학계에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 식민사관에 의해 단군왕검이 실재가 아닌 설화로 치부해버린 우리 역사교육의 한 단면은 아닐까?

 

아래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선사시대 각석설(先史時代 刻石說)"로

 

 

①번 : 사냥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②번 :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②-1번 : 머리(모자)에 꽂은 두 개의 깃(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②-2번 : 몸을 지탱하여 고삐를 잡은 것이 은밀히 요약됨을 볼 수 있다.
②-3번 : 뒷바퀴(車輪)
②-4번 : 분명치 않지만 소나 말이 수레를 끄는 형상. ②-3번과 ②-4번을 보면

뒤에는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는 수레를 끌고 가는 짐승을 표현하여 (움직이는 수레의 골격을) 모두 갖추었다.

③번 : 짐승이 화살을 맞은 형상이다.
③-1번 : (육지) 짐승
③-2번 : 화살촉 두 개가 짐승에 명중한 형상이다.

 

④번 : 두마리 새와 화살촉 형상이다.
④-1번 : 두 마리의 새가 앞과 뒤에서 서로 연이어 날아가는 형상이다.
④-2번 : 화살촉. 대개 명중의 요체는 화살촉에 있으므로 화살촉을 그려 화살을 쏜 것을 보인 것이다.

⑤번 : 물고기류를 그린 것이다.
⑤-1번 : 물고기 지느러미
⑤-2번 : 꼬리를 비스듬히 그려 헤엄치는 것을 보임

⑥번 : 깃대위에 기수가 있고, 깃대에 두 개의 깃발을 묶는 것이 나와 있고 말뚝도 있어 그 깃대를 말뚝에 꽂았음을 표시한다.
⑥-1번 : 깃대
⑥-2번 : 旗手
⑥-3번 : 위 깃발(잠깐 말리어 자태가 좋다)
⑥-4번 : 아래 깃발 ( 쫙 펴져 날림)
⑥-5번 : 말뚝

 

"사냥개를 뒤에 딸리우고 수레를 몰며, 옆으로 짐승을 쏘며 앞으로는 새를 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건너서

기와 깃대를 꽂았으니 기간(旗竿)을 세우는 것은 요컨대 국경을 표시하던 것인데 물고기의 형상을 격지로 놓고

그 너머에 깃발을 세운 형상을 붙인것을 보면 사냥하던 길에 한 물(경상남도 육지와 남해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건너서

국경을 획정한 어떠한 제왕 대인의 기공명(紀功銘 :공을 기록한 것)인 것 같은데 남해의 지형이 正히 육지에 가까운 섬이니

물고기상(像)을 중간에 놓음이 더욱 들어맞는 바이다."

 

즉, "王 혹은 長上大人이 狩獵을 나와서 멧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旗를 꽂았다"로 해석 하였다.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과 더불어 민족사학의 태두이며 큰 별이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文獻없이 歷史없다"는 實證史學者 들에게 문헌연구와 민속조사의 합일을 제창하는 "書俗一團의 實"을 강조하며,

"文獻이 있기전에 太初에 史實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산 文獻이다" 라며 檀君文化論을 주창 하였는데,

현 초등교과서에 단군왕검을 설화가 아닌 실존인물로 그리기 시작했음은 분명 그 분의 논리가 옳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니

그분의 先史時代刻石說에도 열린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보는것은 어떨까?

 

 

(2) 서불도래설(徐市渡來說)

 

서불도래설은 진시황제의 명으로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려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에 童男女 수천명과 함께

배를타고 渡來하여 이곳 남해 금산에 한동안 수렵을 즐기다 떠나며 발자취를 남기려 새겨 놓았다는 전설을 근거하는 설로

제주도와 더불어 남해안 일대에는 서불에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서불관련 최초문헌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조선 성종2년(1471년) 신숙주가 저술한 "해동제왕기"에 처음 보인다 하니

남해안과 제주도에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정확히 언제부터 전해 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서복(徐福)의 福자는 市(불)자와 음을 혼용하기에, 일명 서불(徐市)이라 불리우고, 4획으로 쓰는 "앞치마불(市)"과,

5획으로 쓰는 "저자시(市)"의 글짜가 비슷하여 현지인 들에게는 "서시과차(徐市過此)"의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徐市過此(서불과차)나, 徐市起拜日出(서불기배일출)등의 4자 혹은 6자의 글짜로 추정 하였으나,

최근 경남 남해군이 서울대 국제서복학회에 분석을 의뢰해 열린 서불과 남해라는 주제의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아래와 같은 "徐市起禮日出(서불기례일출)" 이라는 6자의 조합으로 해독 하였다.

 

 

그러나 서불기례일출설은 독립운동가요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부친(오경석)이 1860년, 연경에 탁본을 가지고 간 뒤

당시 금석학에 조예가 깊다는 하추도(何秋濤)의 감식을 받은 것을 그대로 옮긴것에 불과한 것으로,

 

아래는 '96년 3월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오세창 선생 서예 특별전"에 선보인 작품중

위창 선생이 남해 상주리 석각을 臨書하고 작품 하단에 설명을 곁들인 문구이다.

 

"此刻立南海郡錦山是磨崖刻
書體奇詭人莫能解但傳云徐巿題名
我先君曾携拓本至燕京通徵於博古之
釋得徐巿起禮日出六字是秦時遺跡在李斯
作篆之前乃籒文也間焉東邦石墨之冠"

"이 석각은 남해군 금산에 있는 마애각자다.

서체가 이상하고 괴이해사람들이 능히 해석하지 못했다. 다만 전해 오길 서불제명 이라 한다.
나의 선친이 일찍이 이 탁본을 갖고 연경에 가 옛것에 박학한 선배들에게 징험해

서불기례일출 여섯자란 풀이를 얻었다. 이는 진시황 때의 유적으로 이사가

전서를 만들기 이전 주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석묵이라 믿는다."

 

그러나 하추도가 해독한 것이, 무슨 古文字나 畵象文字의 구성원칙에 따라 해독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형상에 따라 맞추어 유사한 글짜를 끼어 맞춘 것 같은 불안감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3) 기타제학설(其他諸學說)

 

이 거북바위 석각에 대한 기타 여러 학설 에는

데세판데의 수렵선각설, 이청기의 거란문자설, 최남선의 고대문자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선사석각화설, 

그밖에 화상문자, 그림문자, 새모양선화, 추상선각, 한웅출렵삼신치제문 등의 여러 다양한 학설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라는 인도의 데세판데 박사의 狩獵線刻說을 살펴보면,

데세판데 박사는 이 석각이 1200~1300년 전의 刻字가 아닌 線刻이라 판독하며,

그림의 주제는 이곳은 이 어른의 사냥터이다 라는 어느 귀인의 사냥터나 사냥 기념의 표지라는 것이다.

 

데세판데 박사의 수렵도(狩獵圖) 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 하였다.

 

 

①부분은 주인공인 왕 또는 귀인이 가마모양의 의자에 앉아 사냥을 구경하고 있고

②는 주인의 애견이며

③은 주인공에게 무엇인가 진상하고 있는 시종

④ 사냥감

⑤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사냥꾼

⑥ 사냥도구인 창

⑦ 사냥한 짐승

⑧ 관 등으로 해독 하였다.


특이하게 정인보의 선사시대각석설과 하추도의 서불기례일출설에는 빠져있는 ③번이 侍從이라 해독했고,

예전부터 그림의 ⑤와 ⑥을 서(徐)로, ④를 불(市)로, ①③⑦⑧을 과(過)로, ②를 차(此)로 해독한 것과 다르게

이 그림의 해석이 거북바위의 석각과 너무나 닮아있어 묘한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또 어느 고대사연구가는 그림의 주인공이 김해 수로왕 또는 왕비이거나 그 직계왕족일 것이라 추정 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위의 거북바위(南海 尙州里 石刻)를 두서없이 소개 하였으나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이는 필자가 직접 이 거북바위를 관찰하고 집필하려 하였으나 현지 남해도 금산의 거북바위 쪽으로는

자연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로 국립공원 측에서 출입을 통제하여, 열흘전 뜻을 이루지 못하는 헛걸음으로

보다 심도있게 분석하지 못하고 다른분들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 하였다. 삼가 제현의 질정을 구한다.                               

                                                 

                                                                                      - 2008년 12월 24일, 석담 최형식 識 -

 

※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 인터넷 정보의 바다

 

출처 : 渚 蔚 世 舍
글쓴이 : 저울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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