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같은 기계문명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계속적으로 진전되게 하기 위해서는 3박자가 맞아야 한다. 과학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터전,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수 인력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15세기 즉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의 사람임에도 신하들의 특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소기의 성과를 얻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천’ 장에서 설명했지만 이천은 감독자로서, 장영실은 기술자로서, 이순지는 이론학자로서 각자 자신의 임무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들 세 분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라 하더라도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경우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게 된다.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이론학자인 이순지가 없었다면 결코 이룩되지 않거나 이름뿐인 졸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전통사대부인 이순지를 이론학자로 발탁〉
명예의 전당에 있는 이순지의 동판. |
그가 누구인지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공식 공적은 다음과 같다 :
'이순지는 전통시기 한국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이다. 20대 후반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갖게 되었다.'
이순지가 어떻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엉뚱하게 과학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그가 천문학자가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25세인 1430년경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세종이 이순지를 신임한 이유의 하나로 『세조실록』 권 35(세조 12년 1465)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誠甫)이며 경기도 양성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행수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세종은 역상이 정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는 우리나라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이라고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자가 역서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입니다”하므로 세종이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했다.’
이 말은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고도(北極高度)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는데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북극고도란 현재로 치면 북위(北緯)를 뜻하는데 현재의 서울은 38선 남쪽에 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이순지도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세종 때에는 도(度)의 뜻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즉 원의 둘레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360도가 아니라 365.25도였다.
『칠정산』내편(좌), 『칠정산』외편(우)(규장각 소장). |
태양이 지구를 한 번 도는데 365.25일이 걸리니까 태양이 하루에 돌아간 정도의 각도가 당시의 1도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38도는 지금의 37도 40분과 딱 들어맞는 값이다. 천문학자들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양반은 강도가 쫓아와도 갈짓자를 걸어야 한다고 했으며 상공업을 천대하던 때를 감안하면 양반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이순지가 천문학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출범한지 몇 십 년 밖에 안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정확한 역법(曆法) 즉 천체 현상의 법칙성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세종은 천문역법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삼국시대부터 주로 중국의 천문계산법 즉 역법을 빌려다가 쓰고 있었는데 고려 때에는 그것을 개성(開城)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고, 서울을 지금의 서울로 옮긴 다음에는 그것을 약간 더 수정하여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이 독자적으로 천문역법을 세운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우선 천체 관측과 정확한 계산 기술이 따라야 했다. 당연히 수준급의 천체 관측 기기가 확보되어야 하며 고도로 훈련된 천문학자들이 확보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로서 이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으로 이순지,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하는 장영실을 투입하는 절묘한 용병술 덕분에 예상보다도 빨리 추진되었다.
1432년에 천문의기 제작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다음해에 벌써 혼천의, 간의, 자격루가 만들어졌고 1434년에 간의대가 준공되었으며 앙부일구를 비롯한 천문의기 제작은 1437년에 끝나 전국 각지로 배포될 정도였다. 1438년에는 그 동안 만들어진 천문의기의 특징을 집약하여 한 눈에 계절의 변화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는 흠경각루(옥루)가 세종의 숙소(강녕전) 옆 흠경각에 세워짐으로써 세종의 프로젝트는 6년 만에 대미를 장식하고 종결되는데 학자들은 세종의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10년(일부학자는 20년 정도 빨랐다고 추정)정도 빨리 이뤄졌다고 추정한다.
〈우주를 한 눈에 본다, 혼천의〉
복원된 혼천의(여주 영릉,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황윤경의 호의로 촬영). |
이순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모든 천문의기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渾儀라고도 함)의 제작이다. 지구상에서 위치를 결정하는데는 위도와 경도를 사용하지만 천구상의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데는 적경과 적위를 사용한다. 적경과 적위는 천구상에서의 경도와 위도인 셈이다.
동양에서는 적도좌표계를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본으로 사용했다. 적경과 적위를 측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다 정밀하고 편리하게 전체의 적경과 적위를 측정할 수 있는 천체 관측의기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제작된 것이 바로 혼천의이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이다.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불린다.
원래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設, 대지를 중심으로 천구가 그 주변을 회전하는 것으로 천동설에 속함)에 기초를 두어 기원전 2세기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인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 3년(1421)에 혼천의의 완성을 위해 장영실과 남양부사 윤사웅에게 ‘중국에 들어가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익혀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라는 특명을 받고 중국 유학에서 돌아왔다고 적었다.
기형의 기(璣)는 하늘을 공처럼 둥글다고 생각하고 그 표면에 일월성신의 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천구의(天球儀)를 뜻하고 형(衡)은 천구의를 통해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관(管)을 뜻하며 혼천의의 혼(渾)은 둥근 공을 말하는 것으로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뜻한다. 크기는 『서경』에 따르면 둘레 25척, 기경(璣徑)은 8척, 형장(衡長)은 8척에 그 구경이 한치였다.
구조는 세 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五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계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도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으며 삼진의(三振儀)라고도 한다. 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데 쓰였는데 혼천의와 혼상을 연결하기도 했다. 혼천의와 혼상을 함께 보면 우주를 한눈 안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이 있는데 세종 때 만들었던 것은 수격식 시계 장치로 움직이는 실내용(demonstrational armillary clock)으로 보인다. 세종 19년(1437) 4월 15일에 ‘규표의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는 물을 이용하여 기계가 움직이는 공교로움은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혼천의의 구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증보문헌비고』에 현종 10년(1660) 이민철이 만든 혼천시계의 기계 장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어 혼천의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다.
“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큰 궤를 만들고 물항아리를 널판의 뚜껑 위에 설치하고 물이 구멍을 통해 흘러내려 통 안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 흘러 들어가 번갈아 채워져 바퀴를 쳐서 돌리게 된다. 여러 날에 걸쳐 물을 채워서 법식에 따라 시험하여 보면 혼천의의 환이 함께 일제히 움직인다. 또 그 옆에 톱니바퀴를 설치하고, 겸하여 방울이 굴러내리는 길을 만들어서 아울러 시간을 알리고 종을 치는 기관이 된다. 또한 이 장치가 움직이면서 나무 인형이 종을 치게 하고 시각의 패를 든 또 다른 인형이 번갈아 나타나 그때의 시각을 알려준다”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이 문헌 자료의 연구만으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이토록 정밀한 천문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세종 때의 과학 기술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이었음을 말해준다.
혼천의의 문제는 혼천의를 구성하는 기둥(距)과 환(環)이 많아 구조가 복잡하여 관측에 불편하다는 점이다. 이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의기가 간의(簡儀)이다.
복원된 소간의(여주 영릉). |
세종의 학자들은 혼천의를 간략하게 하는 간의를 만들기 위해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했다. 목간의란 관측의 기본이 되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청동으로 된 간의를 만들기 전에 미리 나무를 만든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한양에서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각과 북극 고도를 중심으로 한 일월과 행성과 천체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해야 했다. 관측한 자료는 행성의 위치표를 만든 후 역법이나 천문도 등의 편찬과 제작에 이용되는데, 간의는 단순하고 편리하여 이런 작업에 매우 유용한 기기였다.
대간의(大簡儀)는 중국 곽수경의 『원사』를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을 위한 관측기기이다. 적도환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일월과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쟀다. 백각환은 1일 중의 시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눈금을 새긴 둥근 환으로 조선 초기에는 1일을 100각으로 했으나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96각으로 했다. 사유환은 적도환과 직교하며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동서로 회전하게 되어 있고, 그 안에 규형이 있어 상하로 움직일 수 있다. 규형은 속이 비어 있는 통으로 이것을 통해 별을 관측한다. 소간의(小簡儀)는 이러한 대간의를 간단히 만들어 휴대용으로 한 것이다.
〈아랍 천문학보다 발전된 조선 천문학〉
이순지는 천문의기프로젝트가 끝나자 서운관원(천문대장)으로 근무했고 여기에서 유명한 『칠정산 내외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란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七政을 七曜라고도 쓴다).
세종은 1431년 우선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七政算 內篇』을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七政算 外篇』을 편찬케 했다. 편찬과정에서 이순지 등은 세종 13년(1431)에 명나라에 연수를 가기도 했다.
『칠정산』의 내편은 중국의 곽수경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하는 등 매우 정확한 수치에 입각한 것으로 ‘세차(歲差)’의 값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수치들이 유효숫자 6자리까지 현재의 값과 일치한다.
내편의 중요성은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계산했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위도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으나 이를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바로 잡은 것이다. 이로서 세종 이후의 우리나라 천문학은 해와 달은 물론 모든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되는데 가장 알기 쉽게 말하여 서울에서 일식과 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한편 『칠정산 외편』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로 넘어온 아랍 천문학(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알마게스트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것)보다 발전된 이론을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은 태양, 태음, 교식, 오성, 태음오성능범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에서는 태양의 운행, 태음에서는 달의 운행, 교식에서는 일식과 월식, 오성에서는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등 5개 행성의 운행, 태음오성능범에서는 달과 오행성이 별을 가리는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당시까지 중국적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았던 것을 그리스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변경하여 계산했다는 점이다. 이 외 칠정산 외편의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평년의 1년은 365일로 하되 128년에 31일의 윤달을 두었다는 것, 1태음력의 길이를 354일로 하고 30년에 윤일을 11일 더 넣었다는 것, 1년의 기점을 춘분점에 두었다(중국에서는 동지점을 그 기점으로 하였다)는 것, 황도를 30도씩 12등분하였다는 것, 태양은 7월 초에 원지점에, 1월초에 근지점에 있고 속도는 원지점 부근에서 더디고 근지점 부근에서 빠르다는 것 등이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동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선 중국의 천문학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아랍 천문학은 더욱 퇴조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칠정산』에 해당하는 『정향력(貞享曆, 일본인이 만들어 일본에 맞는 역법)』은 조선보다 240년 후인 1682년에 등장한다. 이 역법을 만든 시부카와 하루미는 164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왔던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가 수학적 해법을 알려주어 이를 바탕으로 『정향력』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1643년 조선의 손님 나산(螺山)이란 인물이 에도에 와서 역학에 관해 오카노이 겐테이와 토론했다는 말이 『춘해선생실기』에 보인다. 하루미는 바로 이 겐테이로부터 역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나산이 어떤 내용을 전해 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에는 15세기 천문학의 최성기에 『七政算 內篇』을 낸 바 있는데 이는 수시력(授時曆) 연구의 뛰어난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 말에는 중국의 역산학 전통이 어느 정도 쇠퇴한 다음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역산학을 배우려던 태도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이 글을 보아서도 『칠정산』이 얼마나 돋보이는 작품인지 알 수 있다.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세종의 천문의기 프로젝트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천문대인 간의대에서 천문연구를 계속하면서 『칠정산 내외편』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정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칠정산(七政山)』,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천문유초(天文類抄)』,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등이 있다.
『제가역상집』 4권 3책은 세종 27년(1445) 그의 나이 40세 때 완성되었는데 임금의 명을 받아 천문 역법 의상(儀象) 구루 등 세종 때 만든 여러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의상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간의(大小簡儀)·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혼의(渾儀) 및 혼상(渾象)이요, 구루(晷漏)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대소 규표(大小圭表) 및 흠경각루(欽敬閣漏)·보루각루(報漏閣漏)와 행루(行漏)들인데, 천문에는 칠정(七政)에 법받아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고,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서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28수(宿)의 돗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돗수를 일체로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석판(石版)으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다.’
『천문유초』는 중국의 천문학 이론을 소개한 책으로 상 하 두 권으로 각각 구성되었는데 동양 기본 별자리 28수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오고 은하수도 설명되어 있다. 하권에는 천지, 해와 달, 5행성, 상서로운 별, 별똥별, 요성, 혜성, 객성 등의 순서로 설명이 나온다. 지금 천문학과는 달리 이상한 천문 현상에 대해서는 점성술적인 설명이 따른다. 특히 바람, 비, 눈, 이슬, 서리, 안개, 우박, 천둥, 번개 등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천문학으로 분류할 수 없는 기상 현상 등도 상세하게 풀이했다.
이순지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 소재. |
세조 3년(1457)에는 김석재와 함께 『교식추보법』 2권 1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세종 때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세조의 왕명을 받고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인 것이다. 시와 노래는 원래 세종이 만들었고, 이순지와 김석재는 가사와 시구에 포함된 뜻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책은 뒤에 천문 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 초시의 시험 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그 외에도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 명나라에서 전해진 『대통력법통궤』를 김담과 함께 교정했으며 특이한 것은 국가 중요행사를 위해 택일이나 길흉을 판별하는 방법을 모은 『선택요략』 3권을 편집했다. 상권에는 간지에 따른 길흉의 판별법을 적었고, 중권에는 길흉을 관장하는 신장(神將)에 대해, 하권에서는 결혼, 학업, 출행, 풍수, 장례 등 일상생활에서 살펴야 할 길흉의 판단법에 대해 다루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음양학과 풍수학에 관여한 것은 조선 전기에는 이들이 천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지는 풍수지리학 분야에서 대가로 알려져 그는 세종과 세조 시대에 왕실의 장지를 결정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세조는 음양, 지리 따위의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논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1436년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났다. 이 동안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으로 승정원은 젊고 유능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을 추천했다. 김담은 당시 20여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천문학자로서 이순지에 버금가는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20살의 김담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후 상중인 이순지를 정4품의 자리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억지로 다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3년 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이순지는 세조 11년(1465)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의 과부 딸이 여장(女裝) 노비 사방지(舍方知)와의 추문에 휘말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산 과학자였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고 후에 정평군(靖平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에 있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