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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건 정말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까?

_______! 2006. 11. 14. 17:32

조선고서간행회의 <조선미술대관> (1910)에 수록된 이순신 장군의 '도검'.

 

이건 정말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까?

 

1910년 2월에 발간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사진첩이 있다. 그 무렵 서울에 건너와 행세깨나 한다는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의 골동서화를 수집하고 이에 대한 연구자료의 하나로 펴낸 책자이다.

 

그네들이 하던 짓으로 보면 별것 아닌 자료로 치부할 수 있겠으나, 이 사진첩의 가치는 생각 밖으로 솔솔하다. 거의 드물게도 여러가지 고적유물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자료가 온전하게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마다 덧붙인 설명문을 통해 출처나 이동경위를 확인할 만한 단서들을 적잖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리전' 석굴암의 존재를 널리 알린 소네 부통감이 1909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남긴 두 장의 사진자료가 수록된 것도, 김홍도의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투견도'가 수록된 것도 모두 이 책이었다.

 

특히 이 책에는 창경궁 안에 설치된 제실박물관(나중의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는 것도 크게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니까 초기의 박물관에서 어떠한 유물들을, 어떠한 경위로 수집하였는가에 대한 부분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진첩의 말미에 "제6부 의관무기"라는 항목이 들어있고, 여기에 '제5도 도검'이란 제목의 사진 한 장이 나온다. 설명문을 보면, 이것이 뜻밖에도 이순신 장군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본도의 도검은 임진의 역 때 수군을 이끌어 아군과 역전을 벌였던 명의 이순신이 평시 패용했던 것으로 좌의 문자가 해서로 새겨져있다.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상자에는 조각되어 이 일을 적고 있는데 본품은 원래 한국제작의 것이라 사료되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상 관계가 깊은 고로 특히 참고가 되어 이를 등재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명'의 이순신이 패용하던 것이라 적고 있다. 왜 '명(明)'이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 도검은 '궁내부박물관'의 소장품이라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이순신 장군의 칼이라고 믿을 만한 것이기는 할까? 설명문은 무슨 근거로 이순신 장군의 칼이라고 적었을까?

 

도검의 상자에 구체적으로 이순신 장군이라는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던 것인지는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한 검토는 일단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으로 단서로 여길 만한 것은 도검 위에 남아 있는 명문이다.

 

<충무공전서>에는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검의 명문과 어떠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도검이 반드시 이순신 장군의 것이었다는 것을 곧이 곧대로 입증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조선미술대관>에 이 칼이 이순신 장군의 것으로 표기된 것은, 다만 당연히 그렇게 알고 전해들은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그에 대한 고증작업이나 반증을 할 필요가 없었던 탓에, 그대로 그렇게 표기했던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조선미술대관>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칼을 이순신 장군의 것으로 표기했던 것일까? 설명문안에 '궁내부박물관'의 소장품이라 했으니, 일단은 박물관에서 파악하고 있던 사실 그대로 옮겨 적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 칼의 입수 경위에 대한 단서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대한민보> 1909년 9월 19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하나 남아 있다.

 

▲  고물출품(古物出品)  이충무공의 군도(軍刀)와 창해역사의 철추(鐵椎)를 삼작일에 친위부(親衛府)에서 동궐내 박람회에 출품하였다더라.

 

위의 기사 가운데 '박람회'는 '박물관'의 표기착오이다. 결국 동궐내 박물관은 '궁내부박물관' 내지 '어원박물관'을 가리킨다. 어쨌거나 위의 기사로 보면, 이순신 장군의 칼은 친위부(즉 이전의 군부)에서 보관하던 것을 철추와 더불어 박물관으로 넘겨주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칼과 함께 넘겨 졌던 철추 역시 <조선미술대관>에 사진자료로 그대로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대로 입증이 된다.

 

아마도 이 무렵 어원박물관이 막 만들어지던 차라, 박물관에 진열전시할 것들을 수집하기 위해 궁내부나 통감부 쪽에서 이런저런 유품들을 산하 관청에 확인 수습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지 않았을까 한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 칼이 박물관으로 넘겨질 때부터 이미 이순신 장군의 것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언제부터 친위부의 소장품이었는지는 단언할 수없지만, 아마도 오래 전 병조(兵曹) 시절부터 충무공의 칼이라 하여 수습했던 것이고 그것이 세세년년 전해내려 왔던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말 이순신 장군의 칼인지는 엄밀하게 고증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 칼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 때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순신 장군의 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조건 그 칼이 이순신 장군의 칼이다, 아니다 라고 속단할 일도 아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좀 더 단서가 될 만한 자료나 기록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는 동시에 정말 그 칼이 이순신 장군의 칼이 맞는지를 재검토해볼 여지는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칼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궁내부박물관으로 귀속된 유물이니 만큼 그 후로 이왕가박물관, 이왕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을 거쳐 결국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이 되어 있어야만 될 것 같은데, 사실이 그러한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예전에 국립박물관이 '이왕가박물관'의 전래유물만을 따로 정리한 <국립박물관소장품목록 : 구 덕수궁미술관> (1971)을 뒤져보았더니, '금속유물-무기류'의 항목에는 <조선미술대관>에 수록된 '도검'과 일치한다고 여길만한 수장품 목록은 들어 있지 않았다.

 

혹여 진작에 이왕가박물관의 수장품이 다른 곳으로 흘러나갔다는 얘기인지, 그게 아니라면 설령 박물관의 수장고에 들어있지만 수장품목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서 그런건지는 제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무척 아쉽지만, 지금으로서는 '예전에' 이순신 장군의 칼이라고 전해지던 도검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로만 만족할 도리밖에 없다.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을 '아주 꼼꼼히' 정리하는 기회가 온다면, 혹시 그때에 이 칼이 홀연히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하, 칼이 두 자루이니 '칼'이 아니고 '칼들'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겠다.)

 

(정리: 2004.8.31,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추가자료]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2일자 '사조(詞藻)'란에는 '영은생(瀛隱生)'이 투고한 시조 한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아하니 바로 위에서 설명한 이순신 장군의 칼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마도 박물관에 가서 이 칼이 전시된 것을 보고 그 감회를 적은 것 같다.

 

*누구런고*

청춘(靑春)을 작반(作伴)하야 창경궁(昌慶宮)을 도라드니

충무공(忠武公) 쓰든 칼은 의연히 잇다만은

지금(至今)에 뎌 칼 다시 쓸 자 ㅡ 누구런고.

 

 

 

출처 :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글쓴이 : 제자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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