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도고’ 가 산 거제군수 이겼다
1981년 도고 기념비 복원계획이 화근
도지사는 국민앞에 사과 이봉목 군수는 사표
일본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물리치고 이순신, 영국의 넬슨제독과 함께 일약 세계적인 해군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헤이아지로’ 가 과거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일본 정치권의 우매한 희생양이 될 조짐이다.
“임란 주요해전의 중심에 왜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취도 위령비는 제거돼야 한다.” “도고비석의 모조품을 만들어 고현사거리에 두고 시민은 물론 국민이 밟고 지나가는 행사를 벌이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도고헤이아지로’의 기념비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는 거제시민들은 ‘도고비’ 를 일제잔제청산을 위한 기념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고헤이아지로’는 거제를 발판으로 러시아를 물리쳐 전승의 역사를 알리는 영웅이 됐지만 그 이후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의 역사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하며 군신으로 신사에 올려진 ‘도고헤이아지로’ 가 사후에 경남도지사를 국민 앞에 사죄시키고 거제군수를 혼 줄나게 한 일이 있었다. 도고기념비 복원 계획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1905년 2월 22일 러일전쟁 당시 도고는 함대 42척과 병사 3천500명을 거느리고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해 5월 27일 도고는 러시아 해군 사령관 ‘마카로후’ 가 이끄는 무적 발틱함대를(37척과 3천명) 대한해협에서 전멸시킨다.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려 즉시 출동해 적을 격멸하고자 하니 오늘 날씨는 맑고 파도는 높다’ 1932년 송진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본국에서 도고의 친필을 받아 송진포에 세운 기념비를 세웠고 비문의 내용은 도고가 러시아 함대를 물리치기 위해 출전했던 당시 출전문이다.
이 비는 높이 160, 폭 60㎝ 크기로 장목 송진포 초등학교 뒤 100m 지점에 세워졌으나 1947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에 따라 해군사령부에서 제거됐었다.
장목 지서 앞 돌 다리로 사용
도고의 비는 해군사령부에서 제거된 이후 방치돼 한동안 행방을 몰랐다. 지난 1970년 향토자료 조사차 거제에 왔던 동아대 김동호 교수가 장목 해동병원 김종석 원장과 도고비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김 교수와 김 원장은 우연찮게 장목지서 앞을 지나다 돌다리로 사용되고 있는 징금다리가 비석과 같이 생겨 아래를 거울로 비춰보고 도고 기념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찮은 돌 비석 하나가 결국 당시 거제군수를 사표까지 쓰게 만드는 것으로 기록돼있다.
김동호 교수가 경찰서장에게 치욕적인 문화유산도 문화재가 될 수 있는데 돌다리로 사용해서 되겠느냐고 말했고 당시 서장은 장목지서장에게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 교수가 야단이니 비석을 경찰서로 옮겨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도고 비석은 두 동강이가 난 채로 거제시청 뒤편 창고에 보관돼있다.
도고 기념비는 경찰서장의 꾸중을 들은 장목지서에서 돌다리 때문에 욕을 먹게됐다 며 돌다리를 옮기는 과정에 마구 다루다가 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서로 옮겨진 이 비석은 여러 신문과 방송, 잡지에 보도됐고 일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아대 김동호 교수는 일본 사가현 혜월사에 있던 하청복사종을 보고 그 비석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일본측은 이미 동종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엉뚱한 도고 성역화 사업
치욕의 산물인 도고 기념비가 1981년 들어 엉뚱하게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된다. 그것도 전두환 대통령까지 복원을 결정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다.
성역화의 발단은 1981년 한일문화교류협회(서울) 엄상섭 회장이 일본에가서 비것 복원문제를 논의했고 그해 2월 문화재관리국은 직원과 전문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석복원을 결정했다.
명분은 “치욕적인 문화유산도 문화재가 될 수 있다” 는 근거였다. 1981년 3월과 4월 두차례 엄상섭 회장과 일본문화예술단 대표 3명이 거제군을 방문 이봉목 군수와 민자 3억엔 정도에 복원하겠다고 약정한다. 거제군은 1981년 3월 15일 비복원계획 경과 및 청년회의소 건의사항을 도지사에게 전달한다. 1981년 4월 최종호 경남지사가 두차례 송진포와 가조도 취도를 답사하고 다음해인 1982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초도순시때 건의돼 복원이 결정됐다.
당시 복원비용은 3억엔 정도로 일본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충무공 전적지에 일군망령
도고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1982년 5월 4일 <조선일보> 1982년 5월 7일 <동아일보> 같은날 <경향신문> 등은 “충무공의 얼이 서린곳에 일제식민정책을 두둔하는 러일전쟁 승전비를 세우려한다” “이는 민족적 양심을 저버린 행위다” 며 경남도와 거제군에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독립유공자협회 등은 즉각 성명을 내고 “왜장 전승비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바에야 이완용 등 매국노 유적지를 복원, 역사적 전철을 피하는 산교육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이같은 언론보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언론이 애국심에서 이같은 보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낙종>이 이 사업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말썽의 발단이란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있다. “연합통신에서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했는데 그때 부산일보와 서울 중앙지 등이 보도자료를 받지 못해 본사로부터 질책을 받은 기자들이 치욕적인 일본유물을 복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문화정책이라 반대보도를 하므로써 광복회를 비롯해 3.1독립운동 유가족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가 있었다.”
“언론과 반일감정에 있는 사람들의 반대에 정부나 경남도가 난관에 처해있다” 마치 일본측의 동향보고서 내용 같아 보인다.
결국 1982년 5월 8일 최종호 경남지사는 기자회견을 갖고 도고 전승비 복원계획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건은 결국 이봉목 거제군수가 사표를 쓰는 것으로 국민적 감정을 삭이게 된다. 결국 죽은 왜장이 산 도지사를 무릎꿇이고 거제군수에게는 사표를 쓰게 한 것이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1981년 도고 기념비 복원계획이 화근
도지사는 국민앞에 사과 이봉목 군수는 사표
입력시간 : 2005. 03.29. 10:52
|
“임란 주요해전의 중심에 왜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취도 위령비는 제거돼야 한다.” “도고비석의 모조품을 만들어 고현사거리에 두고 시민은 물론 국민이 밟고 지나가는 행사를 벌이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도고헤이아지로’의 기념비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는 거제시민들은 ‘도고비’ 를 일제잔제청산을 위한 기념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고헤이아지로’는 거제를 발판으로 러시아를 물리쳐 전승의 역사를 알리는 영웅이 됐지만 그 이후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의 역사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하며 군신으로 신사에 올려진 ‘도고헤이아지로’ 가 사후에 경남도지사를 국민 앞에 사죄시키고 거제군수를 혼 줄나게 한 일이 있었다. 도고기념비 복원 계획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1905년 2월 22일 러일전쟁 당시 도고는 함대 42척과 병사 3천500명을 거느리고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해 5월 27일 도고는 러시아 해군 사령관 ‘마카로후’ 가 이끄는 무적 발틱함대를(37척과 3천명) 대한해협에서 전멸시킨다.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려 즉시 출동해 적을 격멸하고자 하니 오늘 날씨는 맑고 파도는 높다’ 1932년 송진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본국에서 도고의 친필을 받아 송진포에 세운 기념비를 세웠고 비문의 내용은 도고가 러시아 함대를 물리치기 위해 출전했던 당시 출전문이다.
이 비는 높이 160, 폭 60㎝ 크기로 장목 송진포 초등학교 뒤 100m 지점에 세워졌으나 1947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에 따라 해군사령부에서 제거됐었다.
장목 지서 앞 돌 다리로 사용
도고의 비는 해군사령부에서 제거된 이후 방치돼 한동안 행방을 몰랐다. 지난 1970년 향토자료 조사차 거제에 왔던 동아대 김동호 교수가 장목 해동병원 김종석 원장과 도고비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김 교수와 김 원장은 우연찮게 장목지서 앞을 지나다 돌다리로 사용되고 있는 징금다리가 비석과 같이 생겨 아래를 거울로 비춰보고 도고 기념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찮은 돌 비석 하나가 결국 당시 거제군수를 사표까지 쓰게 만드는 것으로 기록돼있다.
김동호 교수가 경찰서장에게 치욕적인 문화유산도 문화재가 될 수 있는데 돌다리로 사용해서 되겠느냐고 말했고 당시 서장은 장목지서장에게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 교수가 야단이니 비석을 경찰서로 옮겨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도고 비석은 두 동강이가 난 채로 거제시청 뒤편 창고에 보관돼있다.
도고 기념비는 경찰서장의 꾸중을 들은 장목지서에서 돌다리 때문에 욕을 먹게됐다 며 돌다리를 옮기는 과정에 마구 다루다가 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서로 옮겨진 이 비석은 여러 신문과 방송, 잡지에 보도됐고 일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아대 김동호 교수는 일본 사가현 혜월사에 있던 하청복사종을 보고 그 비석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일본측은 이미 동종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엉뚱한 도고 성역화 사업
치욕의 산물인 도고 기념비가 1981년 들어 엉뚱하게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된다. 그것도 전두환 대통령까지 복원을 결정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다.
|
명분은 “치욕적인 문화유산도 문화재가 될 수 있다” 는 근거였다. 1981년 3월과 4월 두차례 엄상섭 회장과 일본문화예술단 대표 3명이 거제군을 방문 이봉목 군수와 민자 3억엔 정도에 복원하겠다고 약정한다. 거제군은 1981년 3월 15일 비복원계획 경과 및 청년회의소 건의사항을 도지사에게 전달한다. 1981년 4월 최종호 경남지사가 두차례 송진포와 가조도 취도를 답사하고 다음해인 1982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초도순시때 건의돼 복원이 결정됐다.
당시 복원비용은 3억엔 정도로 일본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충무공 전적지에 일군망령
도고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1982년 5월 4일 <조선일보> 1982년 5월 7일 <동아일보> 같은날 <경향신문> 등은 “충무공의 얼이 서린곳에 일제식민정책을 두둔하는 러일전쟁 승전비를 세우려한다” “이는 민족적 양심을 저버린 행위다” 며 경남도와 거제군에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독립유공자협회 등은 즉각 성명을 내고 “왜장 전승비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바에야 이완용 등 매국노 유적지를 복원, 역사적 전철을 피하는 산교육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이같은 언론보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언론이 애국심에서 이같은 보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낙종>이 이 사업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말썽의 발단이란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있다. “연합통신에서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했는데 그때 부산일보와 서울 중앙지 등이 보도자료를 받지 못해 본사로부터 질책을 받은 기자들이 치욕적인 일본유물을 복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문화정책이라 반대보도를 하므로써 광복회를 비롯해 3.1독립운동 유가족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가 있었다.”
“언론과 반일감정에 있는 사람들의 반대에 정부나 경남도가 난관에 처해있다” 마치 일본측의 동향보고서 내용 같아 보인다.
결국 1982년 5월 8일 최종호 경남지사는 기자회견을 갖고 도고 전승비 복원계획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건은 결국 이봉목 거제군수가 사표를 쓰는 것으로 국민적 감정을 삭이게 된다. 결국 죽은 왜장이 산 도지사를 무릎꿇이고 거제군수에게는 사표를 쓰게 한 것이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단독]여의도 화려한 벚꽃뒤엔…일본 ''검은 속셈'' 있었나 (0) | 2006.11.14 |
---|---|
취도 기념탑, 철거냐 보존 "논쟁" (0) | 2006.11.14 |
[스크랩] 이건 정말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까? (0) | 2006.11.14 |
[스크랩] 우리말) 싸가지/소갈머리 --> 늘품/� (0) | 2006.11.14 |
[스크랩] 세계의 삼족오가 한자리에 모인다!! (0) | 2006.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