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에 관한 간단 정리 | 2005/07/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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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
1.천황의 유래
천황이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 도교에서 우주지배자를 천황대제라 하였는데 일본이 7세기초에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황제라는 말에 대등한 말로서 도교의 천황대제 앞글자 두자를 따서 천황이라는 말을 생각해냈다 한다. 일반적으로 천황이란 도교계의 신명으로서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오오기미(대왕)라 하였다.
2. 천황의 의미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천황은 국가 및 국민 화합의 상징이다. 천황은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권력도 없다. 황실의 역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황실은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 이어져 내려온 왕조다. 현 아키히토 천황은 1989년에 즉위했다. 미치코 황후와의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앙폐하는 도쿄의 황궁에 거처하고 있다.
3. 천황제의 역사
일본은 알려져 있다시피 입헌군주제의 나라다. `천황(天皇)'으로 불리는 왕(王)이 존재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일본에 천황이 존재하기 시작 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일본의 옛 역사를 담은 고사기(古事記, 712년 편찬)와 일본서기(720년 편찬)는 기원전 660년 초대천황인 진무(神武) 가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천황은 원시적인 형태였고 일본에 고대국가의 모습이 정착되는 4∼5세기경부터 고대 천황제의 모습이 갖추어진다. 천황은 이 때부터 비로소 야마토(大和) 지방의 부족 연맹의 장으로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고 일본 주요부를 지배하게 됐다. 이어 6세기말 아스카(飛鳥)시대의 쇼오토쿠(聖德)태자에 이르러서 천황의 권력이 확립됐다. 이때 쇼오토쿠 태자가 중국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동천황(東天皇)이 서천제(西天帝)에 게'라는 표현을 쓰면서 천황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7세기중엽 다이카(大化)개신 이후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유일 최고의 지위를 갖게 됐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서 천황의 지위는 급락하게 된다. 9∼12세기에 걸친 헤이안(平安)시대의 귀족정치와 13∼14세기 중엽까지의 가마쿠라(鎌倉)막부시대의 무인정치에 의해 천황 의 권력은 무력화됐다. 이 같은 상황은 19세기 중엽까지 계속됐다.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에 의해 일본의 정치체제는 천황중심의 중앙 집권체제가 다시 확립됐다. 1000여년만에 천황의 지위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군부와 우익의 파시즘 운동의 방편으로 천황의 신격화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천황의 `천하(天下)'는 100년을 가지 못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등장한 신헌법에 의해 천황은 `국가 및 국민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격하되는 등 다시 무력한 인간의 하나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은 일본과 일본인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존재이다.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47년 5월 시행된 현행헌법상 천황은 "국가와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헌법에 정한 일정한 국사행위 이외에는 국정에 관한 어떠한 권리의 주장 과 행사도 불가"하도록 돼있다. 구헌법 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 一系)의 천황이 통치하며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고 명기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따라서 천황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며 어떠한 정치문제에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천황과 황족은 피선거권도 갖고 있지 않다.
4. 천황의 지위
일본 헌법은 천황의 지위에 대해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입각한다”고 못박고 있다.
또한 △헌법개정, 법률·조약 등 공포 △국회소집, 중의원 해산 △국무대신 임명 △외국대사 신임장 접수 등의 국사를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받아 행사할 수 있을 뿐 그 밖의 국정에 대해서는 일체 권한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5. 살아있는 신
1945년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믿고 왔었다. 그러던 것이 그해 8월 15일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있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일본국민들은 모두다 신기해 했다. 그 살아있는 신이 일본 국민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이었으니 일본 천황으로도 매우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천황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고 일개 인간이라는 뚜렷한 인식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극단주의자들은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라고 우겨대고 있지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또 한가지 생겼다. 그것은 <히로히토>천황의 아들 <아키히도>가 <오사까>의 어느 실업가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이다. 과거의 관례를 따른다면 황태자가 일반 평민의 딸과 결혼한다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며,(같은 귀족안에서 귀족끼리 결혼을 하였다)이러한 파격적인 일은 황태자가 고만 연애를 하는 바람에 평민의 딸과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일본이 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하여 나아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전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일본 천황은 과거와는 달리 공사간의 일로 외출도 자주한다. 과거에는 천황의 외출이란 일년에 한두번 공식적인 일에 그쳤고, 그가 한번 외출한다면 수백미터씩 두고 교통이 차단되어 동경시민들은 천황의 외출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천황이 공적인 일이나 사사로운 볼일도 자주 외출을 하는 것이다. 경비도 그리고 대단치도 않고 간단한 몸차림으로 다니는 것이다.
천황은 이렇게 평범한 인간으로서 지내고 있지만 지방 농민들이나 노인들은 아직도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서의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숭앙하여 궁성앞 자갈밭 앞에는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궁성 앞에 잔디밭에는 젊은 남녀들이 뒹굴고 놀고 있고, 밤이 되면 더욱 심하여져서 풍기문제로도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궁성은 25만평이 넘는 넓은 땅이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덕수궁의 약 6배가 넘는 셈이다. 이 궁성은 옛날에는 <에도죠>라고 불렀고 그 당시에 전국 농민들의 부역으로 건설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궁성이 이렇게 넓은 것이 뭔제가 되었다. 땅이 좁고 살기가 어려운데 궁성은 무엇때문에 저렇게 넓게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여론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궁성의 약 10만평을 국립공원으로 내놓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6. 현대의 천황과 일본인
2차대전 이전의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정치대권, 군의 통솔자로서 군사대권을 한 몸에 지니는 동시에 전통적인 제사대권을 가졌으며 또한 천황을 신성 불가침의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1945년의 패전으로 국가신도(神道)가 해체되었고 이듬해 설날 천황이 이른바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신격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일부 일본인의 천황 숭배의 마음은 거의 변함이 없다.
이것은 1945년 12월 미야기현의 청년 남녀 60명이 폭격으로 불탄 황거(皇居)내의 건물을 정리하기 위해 3일간 봉사했던 데서 비롯된 '황거근로 봉사단'을 볼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봉사단원들은 전국각지에서 3박 4일의 일정으로 상경하여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4시까지 황거에 출근하여 미화작업을 한다.
청소는 물론이고 이들의 여행에 소요되는 여비, 숙박비,식대 등 일체의 경비는 자비부담이다. 적지 않은 자기 돈을 써가며 사흘 동안 황거안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50년이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작업하는 동안 먼발치에서 나마 천황부부가 산책하는 모습을 바라 볼 수 있고 더러 운이 좋으면 천황과 직접 한 두 마디 나누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대화 내용은 대개 어디서 왔느냐를 묻고 천황이 그지방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는 식이라고 한다. 마지막날에는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해산한다.
이들은 천황가의 상징인 국화문장이 박힌 담배 한갑과 과자 한봉지씩을 황송스러운 태도로 받아들이고 아쉬운 듯이 황거를 연신 돌아보며 귀향길에 오른다.
1945년 이후 1986년에 이르는 사이에 40년간 일본에도 정치, 경제, 사회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런데도 상징 천황제에 대한 일반 여론은 거의 변함없는 지지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아사히 신문』여론 조사에 따르면 1945년 상징 천황제지지 78%, 폐지5%였으며 30년 후인 1975년에는 지지73.3%, 폐지7%,1986년에는 지지72.4%, 폐지5.6%로 각각 나타났다.
최근에는 지지가 80%로 껑충 뛰어 올랐다. 청년층에서는 천황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하지만 막상 천황제를 폐지해도 좋으냐고 물으면 굳이 있는 것을 없앨 필요까지 없다는 반응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이런 자세가 역설적으로 천황제를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는 정서적 기반이 되고 있다.
적어도 일본인에게 있어 천황제는 논리가 아니다. 천황에 대한 열렬한 지지 기반이 조금씩 풍화되어 가고 있는 징후가 보이지만,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제도를 없애도 좋다는 데까지 지지 기반이 가라앉을 조짐은 없다. 패전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오늘의 경제 대국을 이루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19세기 말 일본 근대화를 단기간 내에 실현시킬 수 있었던 기적도 천황을 구심점으로 한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한다.일본인들은 천황의 전쟁책임 여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항전파들이 일억옥쇄를 무모하게 주장하고 나섰을 때, 이른바 성단으로 무고한 희생을 막아준 역할을 더 평가하고 있다. 성단의 신화는 미화되어 전승되고 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첫회견에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국민을 도와달라" 고 했다는 이 신화는 증폭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장차 유사한 경우가 다시 재현될 경우, 정치가들의 폭주를 견제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권위는 역시 천황일 수 밖에 없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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