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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전통무기] 훈족과 신라의 로마문화 (2)

_______! 2008. 10. 29. 15:15
[한국의 전통무기] 훈족과 신라의 로마문화 (2)


훈족과 신라의 로마문화(2)
예전에 훈(흉노)족과 신라고분에 묻힌 로마 및 서방문화의 특성을 지닌 유물들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약간 유추를 해봤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상세히 다루어 볼까 합니다. 사실 근자에 훈(흉노)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의 고분 유물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를 훈(흉노)족이 쥐고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고 요즘 항간에 나돌고 있는 '아틸라는 한민족의 후예'같은 그런 류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신라와 로마 유물들을 조금 더 상세히 대조해볼 생각입니다.


'신라유리'와 'Roman glass'

아마 제가 듣기론 처음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 학자들이 꽤나 머리를 썩혔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유리의 발굴은 놀라운 일로 받아 드려졌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 제품입니다.




이것이 Roman glass입니다.
 
1)
2)
3)

위의 것 들은 디자인이나 제작 공법등에서 비교 해볼만한 것들입니다. 왼쪽것이 Roman glass인데 진품은 아닌 듯 하고 모조품인 듯 합니다. 오른쪽이 신라고분에서 나온 유리제품입니다. 뭐 저 자신은 유리 공예가는 아니라서 전문적인 설명은 못 드립니다만. 1)은 아마 물병 같고 목 부분의 줄 무늬가 특징인 것 같습니다. 2)는 독특한 물결 무늬가 인상적이군요. 3)은 물방울무늬 같은 것이 동일 기법으로 제작된 것 같습니다.
뭐 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확실히 디자인이나 제작 공법에서 공통분모가 느껴 지는 듯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군요.


신라와 로마의 장신구

이번에는 금제 장신구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 저는 금 공예에 대해서 아는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 나름으로 공통 분모가 있어 보이는 공법과 디자인등을 비교 해보았습니다.




신라의 장신구




로마의 장신구





위의 사진들은 금제 귀걸입니다. 위의 것이 로마의 귀걸이 아래의 것이 신라의 귀걸이입니다. 일단 제가 주목한 것은 제작 공법인데 금을 좁쌀처럼 작은 구슬 알갱이로 가공을 해서 장식하는 공법입니다. 대단히 정밀성을 요하는 공법입니다.




역시 동일한 공법으로 제작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왼쪽것이 로마의 것 오른쪽이 신라의 것입니다.




이것은 금을 마치 낙옆처럼 얋게 가공해서 장식하는 공법인데 왼쪽이 로마의 유물이고 오른쪽은 가양의 금동관에서 유사한 장식이 사용된 모습입니다. 저런 장식은 신라의 금관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왼쪽것이 로마의 귀걸이고 오른쪽은 신라금관을 확대한 것입니다. 원형으로 오려 붙인 금제 장식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런 장식은 한국에선 조선 시대에도 여성들이 시집갈 때 족두리에 많이 이용되던 장식입니다.




위의 사진이 역시 로마 귀걸이고 아래의 것은 가야의 금동 장신구입니다. 육옆 꽃무늬 모양과 방울모양 장식등 디자인과 제작 공법에 주목해보시면 될 듯 합니다.




로마와 신라의 금제 목걸이 왼쪽것이 로마것 오른쪽이 신라의 것입니다.


1)2)

이것은 로마와 신라의 팔찌입니다. 1)이 로마의 팔찌입니다. 진품은 아닌 것 같고 모조품인 듯 합니다. 이것은 루비나 사파이어같은 보석을 금장식에 박아넣는 공법으로 제작된 장신구입니다. 이런 방식은 서구세계에선 매우 널리 사용된 방식입니다. 2)가 신라의 팔찌입니다.




역시 같은 공법으로 제작된 신라의 보검입니다.




로마와 신라의 상감옥..... 왼쪽 것이 로마의 상감옥이고 오른쪽이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신라의 상감옥입니다.




옥 구슬을 꽤어만든 목걸이........ 왼쪽이 로마의 목걸이 오른쪽이 신라의 목걸이입니다.


허리띠



이것은 허리띠에 장식되는 부속인데 왼쪽 것이 로마의 것이고 오른쪽것은 가야의 것입니다. 문양들의 디자인과 형태, 제작 공법상의 공통 분모가 엿보인는 유물들입니다.




이것은 로마인의 허리띠인데 사진을 보시면 대략 어떤 형태로 제작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오늘날의 가죽 허리띠와 거의 유사한 구조입니다.




이것은 가야의 금동제 허리띠인데 아마 이것도 로마인의 허리띠처럼 가죽벨트에 저런 장식을 부착해서 허리에 착용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가야 유물의 경우는 가죽벨트는 삭아서 없어져 버리고 금동제 부속만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금제 허리띠입니다. 역시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야와 신라의 허리띠도 대략 이런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군의 허리띠.



이상 몇가지 유물들을 저 나름대로 비교한다고 해봤습니다만 정작 공예 전문가분들의 견해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뭐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까 비슷하게 보이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시면 저도 할말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저 나름대로 어설프게 나마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만. 저 개인은 극동에서 저런 유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유럽에서 활동했던 훈족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학계에서 간간히 제시되어 온 신라의 흉노 기원설도 관심을 끈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몇몇 서구 학자들 중에 훈족을 거론하면서 가야와 신라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아무 이유없이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설사 가야와 신라가 훈(흉노)족과 직접적인 연계성은 없다고 해도 훈족이 유럽에서 활동 함으로서 신라고분에서 이런 유물이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은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훈족이 신라 유물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훈족이 유럽을 침략하고 약탈하기만 했다는 인식인데 실제로는 로마 등과 교역도 활발히 했습니다. 로마의 경우도 게르만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훈족과 협약이나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접경지역에 시장이 형성되고 엄청난 무역이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교역물들과 문화는 다시 초원 루트를 타고 동쪽으로 전파되거나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 초원 루트의 위력은 훗날 징기스칸에 의해서도 입증 된 바 있습니다.

'요시미즈 츠네요'같은 학자는 교역품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로마인이나 켈트인이 신라에 왔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특히 유리 제품같은 경우는 운반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수천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운반해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로마의 기술자들이 신라로 와서 제작에 참여하거나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라사신 위두의 일화를 보면 눈길을 끄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물왕(마립간) 27년(382년)에 처음으로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위두를 사신으로 하여 전진의 왕 부견(符堅)에게 특산물과 아름다운 머리를 가진 신라의 미녀를 보냈다."

여기에서 굳이 아름다운 머리를 가졌다고 표현한 것은 동양인으로 보기에는 뭔가 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로마에서 온 여인이나 켈트 여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비록 한때 강대함을 자랑했던 흉노제국은 한나라와 선비족의 협공에 무너지고 유럽으로 중앙아시아로 북중국으로 한반도로(?) 흩어졌지만 이들이 완전히 단절 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활동 공간은 더더욱 넓어졌습니다. 몽골군 조차도 훈족만큼 유럽의 심장부 까지 밀고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서로간에 교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내몽골 지역의 대동에서 로마유리와 로마금화가 다량 출토 되었고 한반도 동남단의 신라 고분에서도 로마유리와 로마의 공법과 디자인이 차용된 유물들이 다량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결국 이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유럽과 중앙아시아, 몽골, 한반도를 연결하는 장대한 루트가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흉노가 있습니다.

다만 쟁점은 그것을 흉노가 직접 신라로 가지고 들어왔는가? 아니면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간접 수입된 것인가 하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신라의 흉노 기원설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지금부터는 그부분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도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고고학적으로는 상당히 심증이 가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뒷 바침할 만한 문헌적 자료가 희박하다는 것이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뭐 유목민족의 특성이 기록을 잘 남기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를 학인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이설에는 엄연히 반론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첫번째 설은 김알지의 흉노 기원설인데 근거로서 제시되는 자료가 바로 문무왕의 금석문입니다. 금석문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투후'의 자손이다. 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투후'는 한서에 한무제가 흉노 출신의 김일제를 제후의 왕인 투후로 삼았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김일제는 흉노제국의 이치선우 휘하의 휴도왕의 아들인데 한나라에 투항한뒤 한무제의 신임을 얻어 투후가 된 인물입니다.

이후 그 후손이 왕망의 신을 건국하는데 일조 했다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탄압을 받고 흉노의 본거지로 돌아갔는데 그들중 일부가 신라로 들어와서 신라김씨의 시조가 되고 그 정점에 놓여 있는 인물이 김알지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설은 4세기에 선비족의 일단이 기마 세력을 이끌고 남하해서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특히 흉노가 멸망하면서 상당규모의 흉노가 선비족에 편입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왕조인 전연이 치열하게 충돌하던 고구려 미천왕대에서 고국원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했던

일단의 선비족의 기마전사단이 신라와 가야 지역으로 남하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에가미 나미오'의 소위 기마민족 이동설과도 묘하게 매치가 되어서 관심이 가는 설이기도 합니다. 기마민족설은 4세기경 기마민족의 일단이 한반도를 종단.... 가야,신라지역을 거쳐서 일본 큐슈와 나라고원까지 진출했다는 설인데 이 외에도 일본학의 거장인 '존 카터 코벨', '개리 레저드', '재리드 다이아몬드'같은 학자들이 대표주자로 꼽힙니다. 특히 '코벨'박사는 가야, 신라인들이 4세기 무렵 일본을 정복했고 일본의 신도는 신라로부터 기원했다는 주장을 펴서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369 ~ 505년까지 구체적인 통치 시기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369년이면 한반도에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연의 모용황에게 고전하다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개로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할 무렵의 전후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공격하던 선비족의 기마전단이 신라와 가야지역까지 남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후 광개토대왕의 행보와도 연결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이 5만이라는 군대를 이끌고 가야지역으로 남하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왜를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부분은 조금 석연치 않은 면도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왜가 동원한 최대 병력은 3만이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광개토대왕이 5만이라는 병력을 동원 해야할 정도로 왜가 강력했는가 하는 점인데(일본인들은 그렇게 믿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선비족의 남하설과 '코벨'박사의 설을 동시에 적용시켜보면 가야, 신라와 일본 큐슈, 나라고원까지 평정했던 그 기마전사단은 바로 선비족이라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가야 제국들은 사실상 이들에게 떨어진 것 같고 신라도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삼국사기의 기록이나 광개토왕 비문의 내용을 분석해 볼 때 신라는 아직 이들에게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듯 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해탄을 건너서 큐슈와 나라고원까지 사실상 손에 넣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제도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들과 행동을 같이 했을 것입니다.

당시 전진에 파견되었던 신라 사신 위두의 일화에서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었음을 감지 할 수 있습니다. 전진의 왕 부견이 위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그대의 말에 해동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인가?”이에 위두는 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과 이름이 바뀐 것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으리요.”라고 답을 해서 당시 신라에 뭔가 심각한 변란이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후에 등극했던 광개토대왕에게는 상당히 신경이 거슬리는 상황일 것은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벼랑끝에 몰린 신라도 결국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광개토대왕으로서도 먼저 뒷마당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로서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야 지역을 공격하게 되고 이에 마지막으로 신라까지 잠식해 들어가던 선비족들은 왜로 진출해 있던 동지들까지 규합해서 대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초유의 전투는 광개토대왕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이로서 당시 이 지역의 선비족은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 상황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문제는 삼국사기 법흥왕조의 기사부분입니다. 선비족의 신라 진입설의 근거의 하나가 바로 법흥왕의 성씨에 관한 부분입니다. 삼국사기에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하였다.'는 구절인데 흔히 이설을 내세우는 쪽의 논리가 법흥왕이 모씨성일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법흥왕이 모용황의 후손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선비족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몸을 낮추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적당한 시기가 되자 다시 수면위로 부상해서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또하나 법흥왕이 집권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가야세력이 급속히 신라에 흡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긍극적으론 선비족이 신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특히 신라는 시대별로 지배자의 호칭이 각양각색입니다. 가장 먼저 거서간이란 명칭이 사용되었고 이후 차차후, 이사금, 마립간으로 칭하다가 법흥왕때에 와서 비로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권력구도의 변화가 심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소위 통치자의 명칭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권력의 주체가 변한다는 것이므로 신라는 숫한 세력이 교체되는 그런 나라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상황이 정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 '코벨' 박사는 이들 기마전사집단의 지배는 505년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일본은 불교를 앞세운 새로운 지배세력이 부상하게 되는데 이들은 신흥 백제계 세력들입니다. 이들 세력은 신도를 숭상하던 기존 세력과 충돌하면서 서서히 일본내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결국 이는 신흥 백제계 세력으로 주도권이 옮겨가게 되고 결국 왜는 백제와 연계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왜는 법흥왕 이후에 신라와 연계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뭐 대략 문헌적인 단서를 살펴 봤지만 역시 제가 내린 결론은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고고학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기원전후에서 4세기 무렵의 흉노와 선비의 무덤, 유물등에 대한 국내 학계의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있어야 할 대목인 듯 합니다. 특히 흉노족의 이동경로를 면밀히 추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로마문화를 모용황의 선비족이 처음으로 들고 들어 왔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이미 그보다 빠른 시기의 무덤인 미추왕릉에서 로마계 유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로마문화는 미추왕(이사금)과 관련이 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추왕은 김씨로써는 최초로 신라의 통치자가 된 인물입니다. 만약 김알지가 흉노계라면 이들은 서천했던 훈족과도 연결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로마계 유물이 미추왕릉에서 최초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선비족은 신라는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나 왜의 지속적 내습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왜는 단순히 바다만 건너온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변에서 신라를 공격한 느낌을 많이 받게 합니다. 즉 당시 신라는 선비족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왜로 불린 이유에 대해선 일본이나 가야지역의 토착민들도 전투에 동원한 것 같습니다. 이는 훈족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훈족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 가면서도 실재 훈족 전사들의 비율은 적었다고 합니다. 그 휘하에는 알란족, 사르마티안족, 고트족등 수많은 종족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15세기 무렵 동중국해의 표족들도 이와 비슷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왜인들을 곧잘 전투에 동원했기 때문에(돈을 주고 고용하는 일종의 용병이었습니다) 이들도 왜인으로 오인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법흥왕이 등극 하면서 신라는 급속히 중국과의 외교에 비중을 두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이는 북위, 수, 당이 선비족 출신의 왕조였던 것과 무관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출처 : 재규의 철학사전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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