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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전통무기] 고구려 城의 발굴

_______! 2008. 10. 29. 15:16


고구려 성들은 특유의 모습들(치 같은 것)로 구변해 낼 수 있지만, 치와 옹 같은 성곽의 돌출 방어 시설은 점차 퍼져가면서 한반도에서 하나의 일반화된 경향을 보입니다.

즉, 백제성이나 신라성에서도 치(雉) 같은 성곽 방어 시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 한강 유역에 성들이 어느 쪽 성이냐 하는 것은 성의 외형에 의한 구분이 아닌 실제 발굴조사로 밝혀 내야 합니다.

그러나 간단한 생각해 볼때, 남한에 고구려 유적은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최전성기에 충주지역(신라에선 중원경)까지 남하한 고구려 세력이 한강 유역, 특히 남한강과 낙동강 상류 경계유역, 그리고 신라와 백제 접경 지역에 군사 요충지를 건설했음이 분명합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아차산성이고, 고구려 유물이 그보다 더 남쪽 지역, 즉 남한강 수계나 낙동강 상류 수계 부근에도 있었을 꺼란 사실은 "중원 고구려 비"에 신라 영토내에 고군려 군영이 있었다는 비문의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삼국사시 지리지를 살펴보면, 원래 고구려 영토였던 지역, 그래서 고구려식 지명을 갖고 있던 지역에 굉장히 많이 찾아집니다.

그런데 막상 현재 충주 인근 지역에서 고구려의 유적은 확인하기 어렵죠. 그건 하나의 군사시설, 예를 들어 성곽 같은 것은 비록 세우기는 고구려가 세웠다고 해도 만약 그 성곽을 신라에게 빼았겼다면 신라쪽에서 이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유지보수했기 때문에 신라의 산성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적국의 성을 빼앗았다고 그 성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겠습니까? 아니죠. 그대로 다시 활용합니다.

요동지방의 고구려 성들도 그 후대의 왕조들에 의해서 그런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요령지방의 명청대 성들은 그 기단부가 고구려성이나 고구려의 것인 성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은 성의 유적과 시설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식 유적 유물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큽니다. 즉, 고구려가 지었다 해도 변경이 자주 바뀌면서 그 주인도 바뀌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서울의 한 성곽 유적에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의 유적이 다 나왔던 적도 있습니다. 심층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으로 남아 있는 성이 적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성이 마구 파헤칠 수는 없습니다. 예산 문제도 있고, 타당한 발굴조사 이유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둘째로는 3국의 경계 지역은 한강에서 예성강, 한탄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그럼 이 지역에 당연히 고구려계 산성이 남아 있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발굴할 수 없습니다. 이들 지역이 거의 다 휴전선 지역 혹 휴전선 인근 지역이므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민통선 안쪽에서는 간단한 지표조사만으로도 고구려계 무덤양식인 적석총이 많이 나오고 광범위한 분포를 보입니다. 그러나 군사지역이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고고학적 조사가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우리가 알 수있는 고구려 성의 유적이 적은 것이지, 절대 고구려가 성곽을 적게 쌓았거나 이쪽 지역에 대한 관심을 적게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로서,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나서도 꾸준히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흥왕 이후로 고구려가 몇번이나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는지 헤아려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군사시설이 반드시 성곽에 국한될 이유가 없습니다. 초소적 성격이 강한 곳에는 약간의 토루(土壘)로도 충분하고 기동성 있는 군대를 주둔시킨 군영이라면 목책이나 죽책 따위로도 방어시설은 충분합니다. 성은 확고한 거점기지로서 역할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려진 고구려의 성들이 적다고 하지만, 최소한 예성강 이북지역은 확고하게 점유하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그 이남지역에서 한강 유역까지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들나듦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 한 예가 신라가 당의 요청으로 평양성 부근까지 군량을 공급해 주었을 때, 출발지가 한산주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길어졌지만, 고구려 유적, 특히 성곽이 적은 것은 현실적 발굴조사의 어려움때문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출처 : 재규의 철학사전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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