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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전통무기] 삼국시대의 군대(종합)

_______! 2008. 10. 29. 15:16
[한국의 전통무기] 삼국시대의 군대(종합)


제가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지가 꽤 지난 것 같군요. 요즘 좀 시간적 여유가 나서 또 한번 끄적여 볼까 하는 생각에.

그전에 한가지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지금까지 제시하거나 했던 주장들이나 의견은 저 개인이 제시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간혹 가설과 정설을 혼돈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서 미리 그런 부분은 분명히 해둡니다. 사실 저 같은 일반인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처럼 깊이 파고 들 수도 없고 유물들의 경우도 직접 면밀히 관찰하기 보단 사진 등으로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선 충분히 오류도 있을 수 있고 또 판단착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삼국시대의 군사분야를 조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전투대형이나 전투방식에 대한 문헌적 기록이 희박합니다.

삼국시대에 전투 대형에 대한 기록은 신라가 구사했던 '육화진'이 거의 유일할 것입니다. 그나마도 육화진은 말기에 신라가 나,당전쟁을 대비해 중국의 육진병법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실상 고구려 벽화에 묘사된 무장의 형태와 기타 고분 유물들을 토대로 유추 해낼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뚜렷한 기록은 없다고 해도 무기나 무장의 형태와 각 병과의 구성 등을 보면 개략적인 유추는 가능합니다. 이는 오늘날 보편적인 개인 화기인 소총이 비록 M16이니 AK니 하면서 구분이 되지만 결국 기능은 거의 유사한 소총인 것처럼.......  세계적으로 무장의 형태에 따른 전투 방식은 거의 유사합니다.

고구려



위의 그림들은 제가 예전에 MR에 올린 글 중 고구려군의 분석이란 졸필에 인용하였던 그림으로 고구려군의 각 병과를 제 나름대로 분류한 것입니다. 우선 맨 위의 첫번째가 다들 아시는 중장 기병이고 두 번째가 창만 든 경기병이고 차례로 마상궁수, 중 보병(창 보병), 경보병(칼 보병) 그리고 도끼 병, 궁수 입니다.대략 살펴보면 중장기병은 기수와 말까지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명 '개마무사'라고도 합니다. 중장 기병의 전투형태는 대 보병전의 경우 보편적으로 적의 보병대를 돌파하기 위한 충돌전술을 구사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고... 무장을 보면 상당히 긴 장 창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보통 기병들의 대 보병 전  창술을 보면 달려가면서 창을 표적에 꽂는 방식도 있고 또는 투창을 던지면서 전투를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고구려 기병의 경우는 던지기엔 상당히 긴 창입니다. 일단 벽화상으로 볼 땐 고구려 기병이 투창을 사용하는 듯한 묘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가야의 토우에서 투창과 방패를 든 중장기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 보병 전을 어떻게 전개했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도 약간은 아쉬운 점입니다.




위의 그림은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인데 벽화 상으로 볼 땐 의장 행렬인 듯 하지만 충돌 전법을 사용할 때도 저 대형을 유지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탁본이긴 하지만 보기에도 제법 위용이 있어 보입니다. 무장의 형태를 볼 때 생각 해볼 수 있는 전투의 진행 형태는 우선 밀집 대형을 구축한 다음 상대편 보병의 측면이나 필요 시에 정면돌파로 진격 로를 확보하거나 하는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중장 기병의 또 다른 전투 형태인데 기창술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보통 전후 좌우로 몸을 털어서 창으로 찌르는 기술인데 파르티안 샷과 함께 상당히 고 난이도 기술입니다. 특히 저런 기술은 등자가 필수입니다. 보통 창을 정면으로 겨누고 돌격하는 기술은 등자가 그다지 필요치 않지만 저런 식으로 좌우를 사용하는 기술은 말고삐를 잡지않은 상태에서 창을 전후좌우로 회전시키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등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옆엔 갑옷은 입지않고 있지만 창을 들고 있는 기병입니다. 고구려 기병이라고 해서 모두가 개마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런 가벼운 차림의 경기병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상대방의 목을 치는 기병을 묘사한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에 갑옷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기수만 갑옷을 입은 케이스 입니다.


 

위의 벽화에 묘사된 기병의 경우가 그런 경우인데 자세히 보면 옆의 말이 면 갑은 쓰고 있지만 마갑을 걸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고구려 기병의 보편적인 모습이 저런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목을 치는 모습이 마치 '스키타이'인을 연상 시킵니다. 스키타이인도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상대의 머리를 취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벽화의 기병을 재현 해본 것]



그리고 다음이 마상궁사 인데 저런 병과가 독립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상궁술시험을 묘사한 벽화가 보이는 걸로 봐선 고구려 기병들이 파르티안샷으로 부르는 마상궁술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위의 벽화는 마상궁술 시험을 치르는 장면으로 흉노처럼 전문적인 수준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기병이 저런 기술도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보통 측면에서 활 공격으로 적의 보병대의 대형을 흐트러뜨렸을 것입니다. 특히 앞에 달려가는 기수는 몸을 뒤로 틀어서 쏘는 전형적인 기술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보병인데 첫 번째 보병을 보면 장방패와 창을 들고 있고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무장의 형태로 볼 땐 중 보병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병용 방패]

왼쪽 것은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에서 소장해온 철 방패인데 한반도 산으로 추정되는 물건입니다. 오른쪽 것은 벽화의 방패를 모조한 것입니다.




[재현해본 이미지]

우선 손에 들고있는 창을 보면 기병들에 비해 무척 짧은 창입니다. 뭐 저게 고구려의 보병들이 사용하는 창의 전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저기에 묘사된 창은 한 손으로도 다룰 수 있는 가벼운 창 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방패와 창으로 무장했을 경우 크게 두 가지의 전투자세가 있습니다.

(1)

(2)

(1)번처럼 창을 위로 드는 방식과 (2)번처럼 아래로 겨누는 방식이 있는데 전투 방식은 방패로 방어, 창으로 지르기의 전투 형태는 대동소이 합니다. 고구려의 중보병은 어떤 형태일 것인가 하는 것은??? 벽화에도 그런 묘사는 없고(기병의 전투모습은 있는데 이건 좀 아쉽죠.)

특별히 문헌에 전해지지도 않아 직접 확인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다만 가야의 기마 인물형 토기에 창을 위로 들고 있는 기병이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의 창 병술을 어느 정도 유추 해볼 수는 있습니다. 다만 저의 사견으론 방패의 형태나 창의 길이 등을 감안 할 때 (1)의 자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 보병도 창을 던지고 백병전에 돌입하는 전술을 구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가야의 토기에서 창을 던지려는 자세의 기마인물 토기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병이 투창을 했다면 보병도 충분히 투창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대형은 (2)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방벽을 구축하는 집단적 대형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중보병과 비교해 볼 때 휴대하기 편한 약간 작은 방패를 들고 있고 손에는 환도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갑옷도 몸통의 핵심 부위만 방호하는 가벼운 군장인 듯 하고 머리에는 투구대신 관 모 같은걸 쓰고 있습니다. 아마 저것은 의장용 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 전투에서 저런 거 뒤집어 쓰고 전투에 임하진 않겠죠.

여하간 전체적인 느낌은 중 보병에 비해서 경량화, 기동화를 추구한듯한 형태입니다.




위의 보병의 전술적 목적은 기동을 살려서 상대편 중 보병의 측면이나 후면을 기습 강타해서 대형을 무너뜨리는 목적이 강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한반도 같은 지형에선 기병의 활동에 적지않은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기차를 타거나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양쪽에 산맥을 끼고 있는 계곡같은 형태의 개활지가 많은 것이 한반도 지형의 특징인데 산림지역이나 산등성이 등을 우회해서 적의 측면을 교란하는 용도로는 기병보단 기동력을 살린 경량화 된 보병이 매우 유용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전사를 보면 유인,매복 및 우회 기습전술이 많이 구사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투 대형도 중 보병처럼 정형화 되어 있지않고 요즘 개념으로 본다면 분대단위처럼 분산된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전투유형도 비교적 각각의 자율성을 많이 보장하면서 독립적인 기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도끼 병입니다. 도끼병의 역할에 대해서는 대 기병용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저의 사견으로는 대 기병전 못지않게 중 보병의 방패를 부수면서 경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도 컷을 것 같습니다.(특히 한반도 내에서는 이 역할이 더 컸을 것입니다.) 일종의 보조 병의 개념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단위별로 배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에 비유하면 분대별로 한 명 또는 소대별로 몇 명 하는 식으로 경보병과 보조를 맞추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도끼는 병장기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공성전시에 적이 쳐놓은 바리케이트를 파괴 한다거나 건물 내부에서 농성중인 적을 소탕할 때 문을 부순다거나 공병용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다목적성을 가진 장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판 갑에도 톡톡히 효력을 발휘 했을 것입니다.




[고구려 도끼]


마지막이 궁수인데 궁수는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안 해도 다들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원거리 지원이 궁수들의 역할이죠. 




[시리아궁수(?)]

예로부터 활이라면 우리도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었으므로 고대로부터 매우 강력한 궁수들을 보유 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투구]






이것은 제가 위의 투구의 원형을 재현해본 모사도 입니다. 그림솜씨가 없다 보니 디테일 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대략적인 구조만 묘사했습니다. 본인이 저런 행태로 본 이유는 가야지역의 '종장판주'와 대조, 그리고 구조적 측면에서 '켈트'족의 투구와의 유사성입니다.




원래는 가야 투구처럼 볼 가리개(뺨 보호 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저 투구는 위의 '켈트'족의 투구처럼 볼 가리개가 가죽 재질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기질인 가죽은 부패해 버리고 투구만 남아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 벽화들에 묘사된 투구들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장군들이 쓰던 '차양주'의 형태와 거리가 멀며 머리에 완전히 밀착되는 형태의 투구입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철재 뚜껑에 뒤쪽은 뒤통수를 보호하도록 철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투구에 따라서 찰 갑과 같은 재질의 쇠 미늘을 부착하기도 합니다.


 

가야,신라

다음은 가야,신라지역의 군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한반도 내에서 이 지역만큼 군사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된 지역도 드물 것입니다. 고구려나 백제 지역과는 달리 직접 유물로 관찰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지역의 장점입니다. 그것은 매장 풍습의 차이가 상당히 크게 작용해서 비교적 유물이 온전히 보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들은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유형의 투구로 학계 용어로'종장판주'로 분류되는 투구입니다. 철판을 종대로 이어 붙여서 제작되었다고 해서 '종장판주'라고 합니다. 그밖에도 '차양주'라고 해서 모자처럼 창이 달린 형태의 투구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투구의 형태가 일반적인 동양쪽의 상식을 깨는 형태가 많습니다. '켈트족'이나 로마군의 투구에서 볼 수 있는 볼 가리게(또는 뺨 보호대)는 동양권에선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위의 사진은 비교적 투구의 형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각도에서 잡은 것입니다.

(1)은 '볼 가리개'라고 하는 것이며 '뺨 보호 대'라고도 합니다. 얼굴을 보호함과 동시에 턱 끈의 역할도 합니다.
(2)는 뒤 통수 와 목 뒷부분을 방어하기 위해 추가로 보강하는 부분인데 저 위의 고구려 투구처럼 철판을 대기도 하고 위의 투구와 같이 미늘 갑옷처럼 쇠 미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투구에 따라선 그냥 볼 가리개만 달려 있는 것도 있습니다.
(3)은 복 발이라고 해서 투구의 맨 위 쪽을 덮는 뚜껑인데 위의 투구는 복 발이 날아가고 그냥 뚫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냥 뚜껑만 덮여 있는 것도 있고 장식이 달려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라 고분에선 새의 날개 형상의 화려한 황금장식이 출토 되기도 했습니다.










투구의 모사도 입니다. 원래 미술에는 소질이 없어서 이해를 바랍니다.

 






위의 사진은 '켈트족'이 사용하던 투구의 유물과 재현품입니다. 맨 마지막 것은 '로마군'의 투구입니다. 비록 디자인이나 제작 공법은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구조와 원리는 동일합니다.






이것은 투구의 표면을 장식하는 일종의 악세사리인데 고구려 벽화를 보면 투구의 표면을 마치 뱀의 비늘처럼 묘사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삼국시대에 저런 식으로 표면처리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은 아예 쇠 미늘로 제작된 투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것은 '견갑'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목과 늑골 부위를 보호하고 몸통 갑옷을 고정 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견갑'을 착용 하지 않을 경우는 가죽벨트로 갑옷을 몸에 고정 시키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들은 몸통 갑옷들입니다. 제작기법이나 디자인에 따라 학술적으로 매우 다양한 명칭이 붙습니다. 일반적으로 앞부분 중앙과 양 옆이나 한쪽 옆이 분리되는 구조이고 가죽 벨트로 어깨에 고정 시키거나 '견갑'과 조립되는 형태로 몸통에 고정됩니다.




위의 것은 '비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손목을 보호하는 보호구입니다. 사진상으론 보이지 않지만 뒤 부분이 개폐식으로 되어 있어서 손목에 채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화 '트로이'보시면 '브래드 피트'가 손목에 비슷한 물건을 차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강이 보호대'로 발목에 착용하는 물건입니다. 역시 개폐식으로 되어 있어서 발목에 착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안쪽에 가죽을 보강해서 피부나 의복이 상하는 것을 방지 했을 것입니다. 손목 보호대(비갑) 역시 같은 원리였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이것은 방패의 중앙을 장식하는 청동제 장식입니다. 형태로 봐선 원형 방패에 달려 있던 것 같습니다. 저런 장식품의 용도는 방패의 방어력을 보강 함과 동시에 방패로 상대방의 안면을 들이칠 때 공격 무기의 역할도 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방패의 중앙에 유사한류의 악세사리가 달려 있습니다. 저것은 크기가 조금 큰 종류 같군요.




위의 그림은 투구와 견갑, 몸통갑옷, 손목 보호대와 정강이 보호대, 방패로 완전 군장을 갖춘 경우의 예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아래 사진과 같은 U자형 철판을 여러 장 연결한 어깨 보호장구를 추가로 착용하기도 합니다.(로마군 갑옷을 보시면 쉽게 이해 하실 듯...)




뭐 저 정도 갖추려면 어느 정도 고관대작이던가 재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듯. 아마 보편적인 군장은 투구에 몸통갑옷 정도가 될 듯 싶습니다. 뭐 가난한 농민들은 딸랑 쇠스랑 하나 들고 참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재현해본 병사]

일반적으로 전투 초기에는 정형화된 대형을 유지한 채 서서히 전진 했을 것입니다. (저런 무장하고 우리가 흔히 보는 사극처럼 초반부터 개때러쉬 하다간 아마 전투에 돌입하기도 전에 지쳐서 누워버릴 것입니다.) 그러다 상대방이 근접거리에 오면 순간적으로 스타트해서 먼저 방패를 이용해서 충 파 전술을 펼쳤을 것입니다. 방패가 단순히 방어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공격용도로도 쓰입니다. 방패의 가운데 장식품이 공격용 무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곳으로 상대의 안면에 카운터 펀치를 먹이기도 하죠. 아마 제대로 걸리면 턱이 날아갈 것입니다. 그런 다음 창이나 검으로 백병전에 돌입했을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가야에서 출토된 기병의 토우입니다. 기본적인 모티브는 고구려의 중장기병(개마무사)와 거의 유사합니다. 다만 고구려 기병이 장 창으로 무장한 것과는 달리 위의 기병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투창을 들고 있어서 고구려의 기병과는 개념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로마군의 기마병[

아마 적의 보병대의 측면이나 후면에서 창을 던지면서 교란 시키거나 대열을 무너트리는 그런 개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위의 예를 단정 짓기는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벽화에는 없다고 해도 고구려에도 저런 기병이 존재 했을 수도 있고 가야나 신라에도 고구려와 같은 장 창 기병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경갑'이라고 부르는 목 보호대로 기병들이 착용합니다.




미늘 갑옷입니다. 미늘 갑옷은 주로 기병들이 착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판 갑의 경우 기병도 착용한 경우가 있었던 듯 한데. 본인의 추측으론 실전을 담당했던 기병은 쇠 미늘 갑옷이었을 것입니다. 판 갑을 걸친 경우는 비교적 지휘관 급이나 의장용 기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갑총'에서 출토된 '마갑'입니다.




말의 얼굴에 쒸우는 '면갑'입니다.




[재현해본 이미지]
 



등자 유물입니다. 등자의 존재는 그 의미하는 바가 대단히 큽니다. 등자의 출현은 기존의 기병들이 할 수 없었던 기술의 구사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고삐를 놓은 채 말 위에 버티고 서서 몸을 뒤로 틀어서 활을 당기는 기술, 창으로 정면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틀면서 양손으로 창을 전후좌우로 공격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발을 확실히 고정시킬 수 있게 됨으로 해서 조금 더 무겁고 강력한 창을 기병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삼국지'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는 그런 기 창술은 실상 등자가 출현한 이후에나 가능했던 기술입니다. 로마의 기병이 사용하던 창을 보면 크기가 상당히 작습니다.(창 이라고 하기보단 큰 화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듯하군요.) 그것은 등자가 없기 때문에 크거나 무거운 창을 던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역할이 적 보병대의 교란이었습니다.




이것은 화살통의 유물인데 마구와 함께 발굴되어 신라인이나 가야인도 마상궁술을 구사했음을 입증해주는 실증 유물입니다. 오른쪽 위에 버클이 달려 있는데 아마 벨트로 착용하는 방식인 듯 합니다.
 



안장인데 유기물은 삭아서 없어져 버리고 쇠로 된 부분만 남은 것입니다. 가운데 버클이 있는 것을 보니 안장을 가죽 벨트로 말에 고정시킨 것 같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벽화를 보면 위에서 소개한 유물들이 실재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단 화살 통을 보면 사실 통이 아니라 화살 꽂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합니다. 대략 허리에 벨트로 고정시키는 듯한데 실재 위의 유물을 보면 오른쪽에 벨트로 고정시킬 수 있게 버클이 달려 있습니다. 안장도 위의 유물과 대조 해보시면 일치하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기가 작은 것이 앞부분인 것 같고 큰 것이  뒤 부분인 듯 한데. 아마 뒤 허리부분을 단단히 받치기 위한 구조 일 것입니다.

 




[재현품]

이것은 '환두대도'라고 불리는 칼인데 날은 한쪽으로 서있고 주로 베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위의 것은 비교적 화려한 것인데 어떤 것은 용과 봉황이 새겨진 것도 있습니다. 실전용 보단 의장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실전에 사용했던 것은 이런 칼이었을 것입니다. 손잡이 부분은 삭아서 없어지고 쇠로 된 고리 부분과 날만 남았습니다. 주로 기병이 사용 했을 것으로 봅니다. 말을 달리면서 검으로 찌르기는 어려운 일이고 저런 형태의 직 도로 적병의 목을 노리거나 접근하는 보병들의 머리를 내려쳤을 것입니다.

 






이것은 검입니다. 긴 것은 70cm정도 되는 것부터 짧은 것은 30cm정도 입니다. 용도는 찌르기 용이고 방패를 든 창보병이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근접 무기로도 다양하게 애용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재현품, 이것은 세형 동검을 복원한 것이지만 구조는 거의 동일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서 전체적인 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 중 보병들이 사용하던 단검을 연상 시키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위의 것 들 보다 질은 떨어지는 형인데 실전용 이거나 비교적 하급 병사들이 사용 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손잡이의 유기질 부분은 삭아서 없어지고 쇠로 된 장식과 날만 남은 것입니다. 손잡이 부분의 그리스식 소용돌이 문양은 여러 검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손잡이 장식으로 많이 이용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유물들을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그려본 모사도 입니다. 환두대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검의 경우도 의장용이나 지휘관급이 쓰는 것과 실전용 내지는 하급 병사들이 쓰는 용도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창의 날들인데 크기들로 봐선 거의 4 ~ 5 이상 되어보이는 장 창(어쩌면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보병이 사용한 장 창도....)에서 한 손으로도 다룰 수 있을 듯한 작고 가벼운 창까지 종류별로 다 있는 것 같군요. 다양한 창의 종류로 볼 때 보병의 편제도 대단히 분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케도니아의 Phalangist같은 장 창 보병대나 그리스의 Hoplite와 유사한 중 보병대도 운영되었을 것 같습니다.




낫처럼 생긴 이 물건은 대 기병용 병장기의 일종인데 도끼와 한조가 되어서 기병을 찍어서 말에서 끌어내리면 도끼병이 와서 내려찍는 순이 보편적이지만 용도는 다양하게 활용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 보병전투에서도 중 보병들을 찍어서 걸어 넘어뜨리기도 하고 방패를 걷어내서 방어력을 무력화 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진의 유물은(위의 것) 못이 박히는 곳인 듯한 구멍의 위치나 굽은 각을 봐서는 자루가 기억자형이 아니라 곡도처럼 꽂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유형에 가까운 병장기가 아닌가 싶군요. 기억자형의 낫하고도 약간 다른 개념의 병장기인 것 같습니다.(일명 '곡도'라고 부르는) 대 기병용이라면 자루의 길이만 충분히 길다면 말의 취약점인 다리를 노려 봄 직도 하고. 혹은 위의 사진처럼 저런 용도로도 사용 되었는지도 모르죠.




이것은 다양한 형태의 도끼 날입니다. 가야 지역에서도 도끼가 중요한 병장기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끼의 다양한 활용도에 대해서는 고구려 편에서 설명 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은 가지 창 이라고 하는 것인데 농기구를 병장기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언뜻 서양 민담에 나오는 악마들이 들고 다니는 삼지창처럼 생겼습니다.

 




이 특이한 물건의 용도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병장기라는 의견도 있고 일종의 조형 물이라는 견해도 있고. 본인의 의견은 요즘으로 치면 사단기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발굴지역에 따라서 특색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떤 지역은 소용돌이 문양(or 고사리 문양)이 많이 나오고 어떤 지역은 새의 형상이 주종을 이루고 하는 식으로. 아마 저기에 군기를 달고 악세사리 같은 것으로 치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대략 이런 것과 유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왼쪽처럼 아래에 군기를 달고 악세사리로 치장을 한다거나 오른쪽 처럼 쇠 같은 것으로 도배를 하거나(뭐 워낙 철이 남아도는 동네였으니. 천보다 철이 더 저렴했을 듯 합니다. 요동 지역과 함께 동북아 최대의 철산지의 하나였다고 하죠)

 
이제 슬슬 마무리 단계군요. 뭐 여기에 본인이 끄적여 놓은 것이 절대적인 것이다라고 할 순 없겠지요.

사실 고대의 군사분야를 고증한다는 것이 전문가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저의 이론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일종의 비교론 비슷한 것입니다. 타 문명권에서 우리의 것과 유사한 무장의 형태나 병장기가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전투 유형도 분석해낼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 합니다. 뭐 어떤 분은 외국의 사례를 들어서 너무 비약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신 분도 있습니다.

일단 본인도 하나의 가설로서 세워 보는 것이니 독자들도 한번 판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M16이던 AK소총이던 K시리즈던 방아쇠 당기면 총알 나가는 원리는 마찬가지지요.

물론 위의 유형이 지속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략 6 ~ 7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은 중국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정세의 급변등에 기인한 것 같습니다. 사실 한반도의 경우 전장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 적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강을 기점으로 한 경기 일원과 지금의 영호남을 나누는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일원에서 대부분의 전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중국의 경우처럼 군대가 수백km이상을 이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의 경우는 조금 예외지만.......아마 그런 환경이 결국 기동을 그다지 필요없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삼국시대의 우리 군대가 중장화해가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낫이나 곡도, 도끼, 가지 창 같은 둔기에 가까운 병장기가 사용 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보면 그런 병장기로 잡아야 했던 상대들이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발칸반도에서 Hoplite같은 중 장보병이 출현 했던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은 되리라고 봅니다.실재로 백제권에서도 횡장판갑과 철제 차양주가 발견되어서 백제도 만만치 않은 중장 보, 기병을 보유 했음을 간접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백제권에서 군사유물이 회귀한 것은(고구려도 비슷하지만) 매장 풍습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가야, 신라권도 후기에 가면 유물의 매장 양상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대규모화 해가는 양상에서 병장기 하나도 아쉬운 마당에 무덤에 그런 것을 껴 묻는다는 것은 더 이상 사치였을 지도 모릅니다. 이는 일본 쪽과 비교 해봐도 확연히 나타납니다. 일본 쪽은 이후에도 비교적 많은 판 갑들이 출토 되지만 한반도는 갈 수록 출토량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입니다.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는 당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군대와 전투를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니까 기존과 전혀 다른 양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당장 전장의 무대가 서남해 일대에서 멀리는 이전까지는 거의 가보지 못했던 지역까지 북진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실재로 고구려 유민들과 요동에서 작전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기존의 전술개념을 전면 재검토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는 비교적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봐도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우리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경량화 하기 시작해 지금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군대로 변화 했던 것 같습니다.


[ 유물 사진들 출처 ]

  • http://www.nonsanmuseum.net

  • http://museum.kma.ac.kr

  • http://todori.inje.ac.kr/~kaya

  • http://www.swords.po.kr

  • 출처 : 재규의 철학사전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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