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77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이상한 유적이 발견됐다. 집도 아니고 고분도
아니면서 성곽 같지도 않은 특이한 구조물 속에서 무려 3000점에 달하는 화살촉과 창·칼이 출토된 것. 오랜 연구 끝에 학자들은 이 유적이
고구려의 소형 군사 요새인 보루(堡壘)였음을 확인했다.
남한 지역에서 화살촉 등 고구려 무기들이 처음으로 대량 출토됐으므로
학계에서는 정밀 분석에 착수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술이 부족, 포항제철의 중계에 따라 일본의 철제 분석 전문가들이 화살촉의 성분 비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구의동 유적에서 나온 고구려 화살촉이 일반적인 철(iron)이 아니라 탄소량 평균
0.51%의 강철(steel)임이 확인된 것이다.
철은 포함된 탄소량에 따라 강도에 차이가 나는데 0.51%의 탄소량을 가진
강철은 현대에서도 특수 공구용으로 사용할 만큼 우수한 재질의 금속 소재다.
2000년 1월 똑같은 재질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을
이용, 삼국시대 갑옷인 철제 판갑(板甲)을 표적으로 관통 실험을 실시했다. 시험 결과 겉보기에 무적처럼 보이는 철제 판갑은 고구려 화살에 손쉽게
관통됐다. 고구려의 화살의 우수성이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고구려 화살촉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것과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비해
고구려 화살촉은 상대적으로 크고 종류도 수십 종류에 달할 만큼 다양하다. 고구려 화살촉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크고 넓적한 도끼날 모양의
화살촉과 일반적인 모양의 뾰족한 화살촉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학자들은 고구려에서는 용도에 따라 별도의 화살촉을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넓적한 화살촉은 갑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무장의 적을 상대로 한꺼번에 큰 상처를 주기 위해 사용한 것이며, 따라서 갑옷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이른 시기에 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대로 뾰족한 화살촉은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것으로 갑옷이 널리
보급된 후대에 주로 사용한 화살촉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살대는 주로 대나무로 만들지만 고구려의 화살대는 싸리나무로 만들었다.
고구려는 대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추운 지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화살촉 외에 화살대와 깃까지 포함한 완전한 고구려 화살이 출토된 사례는 없다.
현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고구려 화살은 전통 화살을 만드는 장인으로 유명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인
유영기씨와 그의 아들인 전수조교 유세현씨가 복원한 것이다. 이들은 화살촉은 실제 유물을 토대로 제작하고 화살대와 깃은 추정으로
복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