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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지방 정신사의 흐름을 좇아

_______! 2010. 10. 24. 16:27

2008년 11월 09일 오후 2:08:32
울진지방 정신사의 흐름을 좇아
사상적 조류, 울진과 평해지방으로 구분 해석
남효선
울진지방- 우암 송시열 학풍 이어받은 기호학적 시각 우세
평해지방- 해월 황여일이 퇴계의 영남사림학맥 이어받아


동아시아의 사상적 조류와 철학적 대계를 형성한 성리학은 조선조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제 성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론적 논쟁을 거듭하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의 이론으로 체계화 된다.

전자인 이기이원론은 퇴계 이황(1501~1570)에 의해 주자성리학의 조선성리학적 변용체계가 정착되며 이는 이른바 "영남사림학파"라는 거대한 학단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사회의 사상 조류를 형성해 왔다.

또 율곡 이이(1536~1584)에 의해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기발이승설을 거쳐 주자성리학에 불교철학이 융합된 이기일원론으로 체계화되면서 조선성리학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율곡의 철학적 조류는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하면서 서인으로 지칭되는 "조선성리학파''로 자리잡게 된다.

울진지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존하는 울진지방 유학자들의 문헌기록이나 학제적 관계를 살펴보면 조선성리학의 대전통을 이룬 율곡 중심의 "조선성리학파(기호학파)''와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사림학파''의 영향들이 혼재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남효선
현존하는 고산서원의 액편은 불영사 현판을 쓴 황림(皇林)윤사진(尹思進)선생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같은 혼재양상은 과거 울진지방이 "울진''과 "평해''라는 인문지리적 구분이 뚜렷하게 분할되어 있던 당시에는 두 사상적 조류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먼저 근남면 행곡4리인 "구미''마을 초입에 위치한 주천대와 고산서원(孤山書院)의 성격에서 울진지방의 유학의 성격이 율곡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적 사상체계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서원은 동봉 김시습(東峰 金時習)과 만휴 임유후(萬休 任有後),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서 조선조 숙종 때 국가로부터 사액서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고산서원에 배향된 매월당 김시습은 주지하다시피 율곡 이이의 사상체계의 단초를 제공해 준 조선초의 대 성리학자이며 만휴 임유후와 서파 오도일 선생은 율곡의 뒤를 이어 기호학파의 사상적 체계를 확립한 우암 송시열의 학단에 포함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남효선
울진지방 유학사의 성소로 이름난 근남면 구미마을 주천대. 이곳에는 16~18세기에 이르는 울진지방 유학발흥기를 꽃피웠던 철학자들의 유적이 대거 남아있다.

또 울진읍내리 옥계동에 처음 세워졌다가 봉평 초평리 등지로 이건된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우암 송시열과 석당 김상정, 만은 전선 선생이 배향되었음에서 울진지방의 학문적 체계는 매월당 김시습-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불영사 의상전에 걸려있는 액편인 "십사경시''에 만휴 임유후와 기호학파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풍을 정통으로 이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선생의 액편이 함께 있는데서도 이같은 학풍을 확인해볼 수 있다.

삼연 김창흡선생은 이른바 조선중기 "오창(五昌)''으로 불리던 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의 형제로서 18세기 초 노론학계의 중심을 주도한 인물이자 겸재 정선과 함께 "진경시대''를 주도한 인물이다.    

16~18세기, 울진유학의 발흥기 
격암. 임천. 우와. 황림 등이 주축

당시 울진지방 유학의 흐름의 중심에 있던 격암 남사고선생과 해운 남계명, 임천 남세영 선생을 비롯 우와 전구원, 만은 전선, 이우당 주개신, 황림 윤사진 선생 등이 활발하게 활동한 16~18세기는 울진지방 유학의 발흥기라 할 수 있다.

특히 기호학파의 이론가인 서파 오도일선생이 울진현감으로 있던 17세기 무렵 우와 전구원은 태고헌을 신축하고 울진지방 예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태고헌 향음주례서''를 발간했으며, 격암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함께 정조대왕으로부터 "영동의 교양관''으로 제수된 황림 윤사진선생의 「정관치설(井觀癡說)」과 「예학의변(禮學疑辨」은 울진지방의 유학의 성격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이와함께 울진지방 유림은 조선후기 이후까지도 기호학파의 노론과 소론의 경향을 정통으로 이어 온 간재 전우(艮齋 田 愚)선생과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선생의 학풍을 이어온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울진읍 사계리의 가암 전원식의 유허비에서 간재선생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며 울진지방 각 성씨별 문중 소장 문집에서 해은 강필효선생의 "묘갈명''이나 "찬'' 등의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울진지방에는 간재선생의 학풍을 잇는 가암학파가 있어, 봉림사(鳳林祠)에서 간재 전우선생의 학문을 기리고 있다.

간재 전우 선생의 기발승론의 맥은 울진지방의 정신사를 지탱해 온 버팀목이었다.

간재의 학문적 가르침과 세계관은 간재에게서 직접 사사한 가암 전원식과 무실재 남진영,  경재 정연학선생에게로 이어져 19세기 초엽까지 사실상 울진지방의 유학사의 중심 세계관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
간재 전우선생의 기발승론이 울진 정신사의 핵

간재 전우선생의 정신세계를 천착하는 학술모임이 ‘간재학회’이다.

간재 전우(田愚)선생은 1841년(헌종7) 8월 13일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부친 담양(潭陽) 전씨 청천공(聽天公) 재성(在聖)과 모친 남원 양(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말 마지막 유학자로 일컫는 간재 전우 선생 초상도. 전우선생의 기발승론은 울진 정신사의 궤를 잇는 키워드이다.

간재선생은 한말의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격동기에 나라의 국권이 유린당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 乘 浮于於海, 논어 공야장편)”는 공자의 가르침을 좇아 서해 절해의 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가 부안의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친 구한말 거유(巨儒)이자 도학자이다.

그는 20세에 퇴계문집을 읽고 몸을 닦는 학문이 있음을 알고 매우 기뻐하여 이로부터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한 뒤 21세 때에 당시 유학자였던 신응조(申應朝)의 권고에 따라 충청도 아산의 신양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던 고산(鼓山) 임헌회(1811~1876)의 문하에 들어갔다. 임헌회는 철종 9년에 천거되어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낸 유학자이다. 그는 전우의 학문됨을 알아보고 뒷날 자신의 도를 이을 사람으로 보았다. 스승에게서 전우는 간재(艮齋)라는 호를 받았다.

임헌회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던 간재는 스승의 뜻을 따라 30세 때인 1870년 <근사록(近思錄)>을 모범으로 하여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송시열 등의 글을 발췌하여 실은 <오현수언(五賢粹言)>을 편찬하였다. 이어 34세 때에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유중교(柳重敎)와 14년에 걸친 '심성이기태극설(心性理氣太極說)'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였다.

간재는 이율곡의 주기론적이기일원론(主氣論的理氣一元論)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었으며, 특히 우암(尤庵) 송시열의 사상을 철저히 따랐다.

그의 강직한 인품과 높은 학문은 임금인 고종에게 전해져 1881년 8월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또 9월에는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와 강원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54세 때인 1894년에도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895년 3월 친일개화파 박영효(朴泳孝)가 그를 수구당의 괴수로 몰아 처단할 것을 고종황제에게 주청하였으나 고종황제는 오히려 그를 순흥(順興) 부사(府使)에 제수하였다. 이어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당하자 간재는 상소문을 올려 역적을 처벌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편 1896년에 착수치발(窄袖 髮:옷의 소매를 좁게 하고 머리를 깎음)의 공문을 보고 통곡하며 모든 자손들과 문인들에게 죽음으로 유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3차에 걸쳐 '척참오적'이란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조약을 파기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또한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 '경세문(警世文)' 등을 지어 이등박문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간재는 중국의 양계초(梁啓超)를 비판한 '양집제설변(梁集諸說辨)'을 지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간재는 분함을 못이겨 며칠을 통곡하다가 다시 왕등도로 들어갔다.
1919년 고종황제의 석연치 않은 붕어(崩御) 소식을 접하자 그는 삼년 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 5월에 동아일보 사장 박영효가 주자학의 의리를 비판한 데 대해 이를 성토하는 등 고령에 이르러서도 그의 기개는 숙을 줄을 몰랐다.

1922년 5월에 제자들이 수집한 원고를 친히 강정(剛正)하여 간재문집 후고를 완성한 간재는 7월 4일 격동의 82년의 생애를 끝내 왜인들이 통치하는 내륙의 땅을 밟지 않고 계화도에서 마감하였다.

구한말, 무실재. 가암. 경재선생으로 이어져

간재가 주자학의 정통으로 바탕을 둔 것은 율곡 이이의 ‘주기론적이기일원론’과 이를 계승한 우암 송시열의 ‘예(禮)지상주의’를 강조한 기호학파의 원리이다.

조선 정신사의 한 맥을 세워 온 기호학파는 ‘주자의 학설 계승을 제일 근본으로 삼아’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조광조-이이-김장생- 김집- 송시열’의 학제를 형성하며 조선 정신사를 이념과 실천이 합일하는 비옥한 정신사의 영토를 확보해왔다.

이같은 우암 송시열의 정신세계는 조선 중기 울진 유학 발흥기에 학명을 떨친 격암과 서파, 우와, 황림선생들의 사유와 실천 속에서 유장한 학문의 강줄기를 형성해왔으며 구한말에 이르러 이들이 파놓은 철학의 샘물에 목을 축이던 일련의 울진 유학들이 대거 간재 전우 선생의 수하에서 학문을 연마함으로서 또다시 ‘기일원론’의 실천학문의 전통이 그 뿌리를 이어가게 된다.

이들의 정신세계는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창의론’이나 ‘상소문’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조선후기 울진지방 의병활동과 관련한 기록이나 오래된 문중의 자료에서 면암 최익현의 "의병발기를 촉구하는 서신'' 등이 다수 발견되는 점(울진 장씨 원당파 장림선생의 유품) 도 기호학파적 학풍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평해지방은 영남사림학의 전통 이어
조선 최고의 외교가, 황여일 선생 "우뚝"


평해지방의 학문적 성격은 울진지방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평해지방의 예학의 질서나 관혼상제의 전통에는 영남사림학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효선
해월선생은 그의 삼촌인 대해 황응청선생과 함께 퇴계문파를 드나들며 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혔으며 이로인해 평해지방의 유학적 질서는 이기이원론의 영남사림학적 관점을 견지하게 된다. 사진은 해월헌 전경


특히 이같은 사례는 기성면 사동리 해월헌에서 다수 발견된다.

주지하다시피 해월헌은 울진 평해지방이 낳은 명현 황여일선생의 본가이다.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은 명종 11년인 1556년에 사동에서 태어나 광해 14년인 1622년에 돌아가셨다. 해월선생은 어릴적부터 문명을 떨쳐 당시 평해군수로 재직 중인 구봉 김수일 선생의 사위로 당시 명문가로 자리잡은 의성김씨 문중과 인연을 맺는다.

의성 김씨 문중은 주지하다시피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적통으로 이어받은 학봉 김성일 선생의 친가이다. 해월선생의 장인인 구봉 김수일선생은 학봉선생의 친제(親弟)이다.
학봉은 서애 유성룡선생과 함께 영남사림의 중추를 담당한 유학자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임진왜란과 관련지어 친숙해 있는 분이다.

해월선생은 그의 삼촌인 대해 황응청선생과 함께 퇴계문파를 드나들며 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혔으며 이로인해 평해지방의 유학적 질서는 이기이원론의 영남사림학적 관점을 견지하게 된다.

곧 해월선생에 의해 비로소 울진 평해지방의 유학적 성격이 체계화되는 셈이다. 실제 국학원에서 지난 해에 발표한 "퇴계 이황 학맥도''에 따르면 울진지방의 영남사림학파로서는 해월선생이 유일하게 등재되어 있음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남효선
울진 평해지방의 정신사의 본산인 해월헌. 종손이 해월헌을 찾은 이들에게 황여일선생의 선비정신과 학문적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남효선

그러나 해월 이후의 학제관계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해월선생이 오랜 기간을 중앙정부의 관료로 진출한데서 기인한게 아닌가 싶다. 현 해월헌에 소장되어 있는 액편에는 당시 퇴계학파의 거두들의 시편이 다수 남아 있는 데서도 해월의 학문적 교류의 단면을 엿 볼수 있다.

주자가례에서 "사당은 정 동쪽에 위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성리학의 이념체계가 비단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전통가옥 구조 또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할 것이다.

사동리 의 해월헌의 사당은 이런 점에서 주자가례의 입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해월헌의 사당이 안동, 봉화 등 의 건축공간배치에서처럼 "정 동쪽''에 위치해 있음에 비해 울진지방 유력 문중의 사당은 대개 "서북방향''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가옥 구조에서도 학문적 해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울진지방의 사상적 원류는 이같은 관점에서 특정한 시각을 구별하기란 여의치 않다.

다만 지난 1914년 3월에 평해군이 울진군과 통합되고 또 63년도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북도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수 백 년 간 뚜렷한 사상적 족적을 남기며 두 개의 학문적성격으로 병립, 발전되어 온 사상적 조류가 행정 차원의 통합과정에서 정신사적 가치부재의 혼재양상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울진지방 유학의 성소...근남면 구미마을

주천대, 孤山서원 ... 울진지방 정신사의 메카
조선조 울진지방 문예부흥기 이룬 萬休堂, 西波선생 숨결 오롯이 남아
울진지방 기호학파의 사상체계 잉태시킨 철학적 聖所

근남면 행곡4리 구미(龜尾)마을은 그 마을 이름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인문지리관인 풍수(風水)적 입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효선
불영계곡으로 통하는 36호 국도에서 바라본 구미마을 주천대. 주천대에는 울진지방의 유학사의 발흥 현장이자 불영사 창건설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구미마을은 왕피천을 끼고 36호선 국도를 따라 불영계곡이 시작하는 초입의 왼편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이름을 명명했듯 구미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듯 감싸고 있는 산이 바로 태백의 허리에서 뻗어나온 통고산이 힘차게 동해로 내지르다 발길을 마감한 거북꼬리산(구미산)이다.

구미산은 그 이름에 걸맞듯 흡사 거북이가 광천(光川, 빛내)을 향해 엎디어 있는 형국이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퇴락한 골기와집을 지키며 추녀 한 끝을 곽 채운 액편 하나가 눈 앞을 가로 막는다.

「고산서원(孤山書院) 」이 그것이다. 고산서원은 당시 울진·평해지방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1682년(인조 6년)에 당시 울진 유학의 중심에 있던 만휴(萬休)임유후(任有後)선생과 함께 만휴공을 따르는 유생들이 정사(精舍)를 신축했다.

1673년(현종 14년)에 고산사를 창건하고 만휴공을 봉안했다. 당시 고산사는 `생 사당'으로 불렸다. 생존하고 있는 선비를 모셨기 때문이다.

이후 1 686년(숙종 2년)에 동봉(東峰)김시습(金時習)을 봉안하고 1709년(숙종35년)에 서파(西坡)오도일(吳道一)을 병향한 뒤 1715년(숙종41년)에 서원으로 승격됐다.

현존하는 고산서원의 액편은 불영사 현판을 쓴 황림(皇林)윤사진(尹思進)선생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고산서원의 존재로부터 구미마을은 현재까지도 "울진 유학(성리학)의 본산''으로 불린다.

구미마을은 울진 유학사의 중심에 서 있는 셈이다.
특히 구미마을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통칭되는 조선철학의 한 봉우리인 「기호학파」의 사상적 체계를 울진지방에 배태시킨 철학적 성소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남효선
울진지방 정신사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동봉 김시습, 삼연 김창흡, 서파 오도일 등 세 유현을 기리는 유허비.

구미마을의 대표적 성소는 「고산서원 유허비」와 「고산서원 배향 3현의 유허비」그리고「주천대(酒泉坮)」, 「주천팔경」, 「우산동천비(愚山洞天碑), 성황당을 들 수 있다.

이 중 성황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중심이며, 우산동천비는 구미마을에서 400여년을 세거해 온 영양남씨 송정공파 남호열(현 울진향교 전교)씨댁에서 관리하는 성소이다.
남효선
구미마을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통칭되는 조선철학의 한 봉우리인 「기호학파」의 사상적 체계를 울진지방에 배태시킨 철학적 성소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남효선

당시 만휴공이 기거하던 송풍정은 현존하지 않는다.

고산서원의 배향인물인 동봉 김시습은 주지하다시피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기일원론을 집대성한 율곡 이이에게 사상적 원류를 제공해준 15세기의 대철학가이다.

동봉선생이 울진과 인연을 맺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현 구미마을의 "동봉 유허비''와 성류굴 인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류사''이다.

동봉은 울진 장씨의 외손으로서 천하를 주유할 무렵에 구미 주천대와 성류사에서 머문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동봉의 철학적 사유가 울진지방에서 오롯이 되살아나는 시기는 서파 오도일선생이 울진현감으로 있던 17세기 말 경이다.

남효선
고산서원의 배향인물인 동봉 김시습은 주지하다시피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기일원론을 집대성한 율곡 이이에게 사상적 원류를 제공해준 15세기의 대철학가이다. 동봉선생이 울진과 인연을 맺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현 구미마을의 "동봉 유허비''와 성류굴 인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류사''이다.

서파 오도일 선생은 생육신이었던 동봉선생의 선비정신을 실천하는데 학문적 자세를 일관해 온 분으로 이름나있다.

서파선생은 20여년 간 구미마을에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만휴공과 함께 울진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 향약인 「훈사절목(訓士節目) 」을 편찬하고 태고헌을 신축한 뒤 우와(愚窩)전구원(田九원)에게 「태고헌 향음주례서(太古軒 鄕飮酒禮書)」를 펴내게 하는 등 울진 유학의 정신적·물질적 파트론 역할을 수행한 선비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파선생은 율곡의 기일원론을 집대성한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당시 울진 유림을 지키고 있던 임천 남세영, 우암 윤시형, 이우당 주개신, 우와 전구원 등과 함께 기일원론에 기초한 철학적 체계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바로 구미마을은 이같은 울진 유학사를 통해 "울진 철학사의 본산''으로 자리잡게 된다.

용이 승천하며 꼬리로 물길을 되돌렸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주천대는 만휴공이 이름한 무학암(舞鶴岩), 송풍정(松風亭), 족금계(簇錦溪), 창옥벽(蒼玉壁), 해당서(海棠嶼), 옥녀봉(玉女峯), 비선탑(飛仙榻),앵무주(鸚武洲) 등 팔경으로 이뤄져 있다.

울진정신사의 산실인 고산서원의 사상적 흐름은 당시 만휴공들이 조직한 수친계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유림들의 모임''을 통해 면면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 유림들은 해마다 4월15일 주천대에서 소회를 갖고 삼현에 대한 추모와 철학적 교류를 나눈다.
고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조직이 사회 상층부를 중심으로 한 결사체라면 구미마을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결사체는 성황당을 중심으로 한 "동제(洞祭)''를 들 수 있다.

구미마을 성황당은 주천대 맞은 편 36호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성황당은 팔작기와집의 당사 형태이며 당 마당에 아름드리 고목이 서 있다.
해마다 정월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삼헌관에 의해 치러지며 제관은 정월달 초에 마을동회에서 선임한다.

동회에서 선임된 제관은 선출과 동시에 엄격한 금기에 들어간다. 제관 집에는 금색이 드리뤄지며 마을 주민, 특히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이른바 비의(秘儀)의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동제에 사용하는 제물은 네 마지기 가량의 동답(洞畓)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충당한다. 과거에는 메(밥)와 나물, 육(쇠고기), 어물(가자미, 방어, 명태, 문어)을 비롯 삼실과와 조라(술), 떡(백설기)을 차렸으나 지금은 간소해져 삼색실과와 포, 떡만 차린다. 마을 공동체적 결속력이 약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월 보름 자시에 동제가 치러지면 이튿날 제수를 장만하는 제관 집에서 음복을 한다. 이 때 마을의 성인 남성만 참석한다. 이로 미루어 동제는 남성중심의 의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남효선
구미마을 성황당은 주천대 맞은 편 36호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성황당은 팔작기와집의 당사 형태이며 당 마당에 아름드리 고목이 서 있다. 해마다 정월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삼헌관에 의해 치러지며 제관은 정월달 초에 마을동회에서 선임한다.

특이한 것은 현재 행정단위로 분화된 "구미(행곡4리)'', "샘실(행곡1리)'', "내앞(행곡2리)'', "함질(행곡3리)''마을 모두 같은 당을 모시나 제일(祭日)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여기서 과거에는 네 개의 마을이 모두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었으나 자연변화에 의해 마을이 분화된 후 마을 수호신도 분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미마을을 지탱하는 물적 토대는 거북꼬리산을 뒤로하고 형성된 마을의 앞자락에 펼쳐진 분지형 들판이다.

마을의 생산기반인 농토는 `장전(長田)', `새들(신평)', `찰안들', `질밑(노하)', `솔머리' 등 다섯 개의 들로 구성돼 있다.
이 들 농토의 규모는 대략 400여 두락 가량이다.

또 구미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북꼬리산은 `도래끝', `도롱골(회곡)', `황시골', `밤시골(율곡', `독지골', `주천대' 등 여섯 개의 골짜기로 나뉘어 불린다. 당초 구미마을의 생산기반은 현 광천을 끼고 형성된 `장전들'만이 수도작이 가능한 논이었으며 `새들'은 논농사가 불가능한 밭이었다.

새들이 밭에서 논으로 그 생산기능이 전화된데에는 기념비적 사건이 있은 후이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이 극심하던 1930년대 초 구미마을에서는 생산기반을 송두리채 변혁시키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구미마을의 역사와 함께 성소로서의 금역(禁域)으로 여겨오던 `거북꼬리산'을 뚫은 `보(洑,수로)'의 출현이 그것이다.

거북꼬리산 밑을 뚫고 만들어진 `새들보'로 당시까지 밭이었던 `새들'이 논으로 전환되면서 비로소 수도작 재배가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당시 구미마을의 경제적 기반을 대폭 확대시키는 토대를 만든 것이자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면서 구미마을의 위세를 일거에 바꾸는 이른바 혁명적(?) 사건으로 자리잡는다.

이같은 혁명적 발상과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남지원(南志元, 작고)이라는 분으로 마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남효선
일제강점기의 수탈이 극심하던 1930년대 초 구미마을에서는 생산기반을 송두리채 변혁시키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구미마을의 역사와 함께 성소로서의 금역(禁域)으로 여겨오던 `거북꼬리산'을 뚫은 `보(洑,수로)'의 출현이 그것이다. 사진은 추수가 끝난 '새들' 모습

당시 남지원은 구미마을의 형성과 관련한 오랜 금기를 깨트리고 신성공간으로 섬겨지던 거북꼬리를 뚫고 물길을 잡아 `새들', `찰안들'로 불리는 300여 두락의 밭을 논(畓)으로 변화시켜 구미마을의 경제적 조건을 일거에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분으로 현재 마을 주민들 사이에 기억되고 또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선각자적 실천가로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후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간 동안 한반도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념적 대립과 전재의 참혹한 결과에 의해 구미마을의 `거북꼬리 밑을 뚫고 만든 보(수로) 사건'은 선각자적 개척인의 평가와는 달리 `젊은 죽음 대량 초래한' 동기로 상반된 평가 또한 주민들의 인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구미마을 자치규범 혹은 자치조직은 울진의 인근 마을에 비해 그 양적인 면에서 월등하게 나타난다.
현재가지 지속되고 있는 구미마을의 자치조직은 마을동회를 비롯, 당계(擔契), 보계(洑契), 제방계, 임계(林契)와 또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운용되고 있는 `가마계', `그릇계' 등이다.

이 중 마을 전 주민(성인 특히 호주)이 성원으로 참여하는 마을동회는 명실상부한 마을총회 성격을 갖는 자치조직이다. 구미마을은 영양남씨 집성촌이다.

동회는 해마다 정월초하루날 열린다. 요즈음은 마을회관에서 열리며 리장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주도한다. 주로 마을 개발과 행사에 관한 내용이 주된 토의내용이다.
동회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성황제를 주관하는 제관선출이다.

구미마을의 성황당은 현 36호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나이들어 쇠락한 팽나무 군락 사이에 팔작기와집의 당이 구미마을의 성황이다. 특이한 것은 이 성황당은 구미마을의 소유만이 아니라 샘실(행곡1리)마을과 내앞(행곡2리)마을 등 세 마을 공동 성황당이라는 점이다.

실제 울진지방에서 하나의 성황을 두고 각기 다른 마을이 모시는 곳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이다. 더구나 세 마을 모두 제일(祭日)이 다르다. 구미마을 성황당의 수호신은 `처녀'로 알려져 있다.

구미마을은 정월보름날 자시에 제를 올린다. 제관은 2인이다. 선출된 제관의 집에는 금줄이 드리워지고 바깥출입을 삼가는 등 금기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이른바 비의(秘儀)의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성황제에 쓰이는 제물은 선출된 제관이 손수 장만한다. 과거에는 성대하게 지냈으나 최근에 와서는 그 규모가 많이 약화됐다 한다. 성황제가 치러진 다음 날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을 갖는다.

구미마을 당계(擔契)의 역사는 마을의 형성과 함께 비롯된다. 당초 구미마을에서는 구담계(舊擔契)와 신담계(新擔契) 그리고 신신담계(新新擔契) 등 세 조직이 있었다. 20여 년 전에 구담계가 해체되고 구담계에 속해 있던 성원들은 신신담계에 추입되었다 한다. 구담계의 해체는 성원들의 작고, 이주 등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담계는 이른바 상여계이다. 곧 죽음의 의례를 치루기 위한 `노동품앗이'를 위한 협업노동관행을 규정지어 놓은 조직이다.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치규범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담계의 규정은 "완의(完儀)''로 문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며, 또한 매우 엄격한 규정을 보유하고 있다. 담계완의는 당계를 조직하는 배경과 운영규정을 담은 `절목(節目)' 그리고 구성원을 표기하는 `좌목(座目)', `식이질(殖利秩)'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식이질은 담계의 성원들이 정기적으로 적립하는 계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용을 담은 항목이다.

완의에 따르면 신담계는 장자(長子)상속을 원칙으로 하며, 성원의 장례 시에 반드시 건장한 성인 1명과 계금을 제공하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완의를 통해 18세기 이후 정착된 것으로 알려진 `제사 장자상속 관행'을 여기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또 완의는 담계에 축적된 재물을 빌려갈 경우, 이자율과 변제규정도 제시하고 있으며, 새로 가입하고자 하는 자의 결정 등도 규정하고 있다.

또 이를 관리하는 유사 2인의 선출방법과 부조 관행도 규정하고 있다.

구미마을에 두 개 이상의 당계가 존재하는 까닭은 담계가 장자상속의 원리로 운영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도 구미마을에는 두 개의 당계가 운영되고 있으며 신담계의 경우, 매년 12월16일에 담계회의를 개최한다.

보계와 제방계는 수도작재배와 직접인 연관을 갖는 협업노동관행의 정수를 보여준다.
보계는 주로 몽리자를 구성원으로 하며 제방계는마을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구미마을의 보계는 당초 `장전보계'만 있었으나 30년대 `새들보'가 만들어지면서 두 개의 조직으로 나뉘었다가 이후 농지정리와 수로정비사업이 이뤄짐에 따라 `합보계'로 통합되었다.

또 산림과 관련한 조직으로는 `흥림계'가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 당초 흥림계는 마을 채취림의 성격으로 운용되었으나 신탄에너지에서 석유에너지로 전화되면서 오늘날에는 목재용이나 땔감용보다는 산송이 채취가 주된 사업으로 변화되었다.
이 외에도 구미마을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마계'와 '그릇계'의 흔적이 왕성하게 남아있다.


남효선 기자 nulcheon@ingo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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