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작법.5>창작의 실제(연시조) | 時調작법(1) 2004/06/04
임정일(skyman63) http://cafe.naver.com/ipoem/1315
창작의 실제 / ①
■ 연시조 짓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4수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호우 선생의 "달밤"이다. 시조를 창작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유장한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4수를 연작(連作)하는 일이
그렇게 수월하지 않다. 서벌(徐伐) 시인은 "생각을 엿가락처럼 늘여낸다고 하여
다 연작시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말 저말 아무렇게나 끌어다 놓는다고 하여
그 말들이 모두 조화되거나 통일을 이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연시조 짓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적어도 4수 연작이
가능하려면
① 주제가 하나라 하더라도 4수 각각 독립된 시의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② 4개의 독립된 세계를 하나로 조화시켜야 하고, 전체의 작품이 피가 통하는 통일감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③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로 조화되고 통일된 4개의 세계들이 서로가 뚜렷하면서도
참으로 다르다는 변화 감각을 지니게 하는 일이다. 이렇듯 긴 호흡을 유지할 때는
산만함을 배제해야 하고, 언어의 배치(행마법■行馬法)와 율격
처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처럼 연작이 완성되면 "한 상 잘 차려놓은 밥상과 같다"고 서벌 선생은
설명하고 있다.
밥을 짓는 일, 국을 끓이는 일, 나물을 주물러서 상큼한 맛을 내는 일, 생선을 굽고 김치를
담그는 일■ 등등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전체를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수 한 수의
시조 창작 과정도 이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 과정 처리가 완결되었다는 의미를 비유로 말하면 한 그릇의 밥 그릇이며, 국 그릇요
맛깔스런 반찬 그릇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 각각의 "그릇"들을 멋들어지게 조화시켜
밥상 받는 사람(독자)을 즐겁게 해주는 일, 이것이 바로 연작 시조를 짓는
포인트다.
시조를 처음 짓는 사람은 단시조의 기본부터 익혀야 한다. 그 다음 연작 행위인
연시조로
들어갈 때에도, 앞에서 본 "달밤"처럼 여러 수의 연작 형태는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이유는 초보자가 대들어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 호흡이 긴 여러 수의
연작이기 때문이다.
우선 두 수 정도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배밭 머리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그 소리 배밭에 들어가
하얀 배꽃이
피어난다.
휘파람 휘파람 불며
배밭 머리 돌아가면
개구리 울음소리도
구름결도 잠깐 멎고
잊었던 옛 얘기들이
배꽃들로 피어난다.
- 정완영 "배밭 머리"
이 두 수의 시조가 어떻게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로 통일되며 조화되는가를 알고 나면,
벌써 연시조(連時調)가 어떤 것인가를 터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수에서는 개구리 울음들이 배밭으로 들어가서 하얀 배꽃이 되는,
그런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라면, 둘째 수에서는 시인의 옛 얘기들이 배밭으로 들어가서
배꽃으로 피어나는 느닷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더 살펴야 할 일은, 첫째 수에서는 배밭 머리에 있는 "무논"의
개구리들이 <개굴 개굴■> 운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변하여 둘째 수에서는
<휘파람 휘파람 불며>가 된다는 사실이다. 발상(發想)의 비약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한 이미지의 처리를 아주 딴판인 것처럼 "환치"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시나
시조의 "놀라운 힘"인 것이다. "상상의 공간" 혹은 "창조적 힘" "창조적 능력"이라는 말이
이런 데서 성립되는 것이다.
때문에
개구리 울음소리도
구름결도 잠깐
멎고
와 같이, 하나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러서 고쳐 놓기까지 한다. 즉 다른
세상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시인은 창조 능력이 없이는 "입문(入門)" 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이나 시적 대상을 접근했을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릴 게 아니라 그 대상의
이미지를 한번 뒤집거나, 전혀 엉뚱한 발상을 하여 시적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열어 놓아야 한다.
그것이 시인의 창조 능력인 것이다.
창조
능력, 이 힘 때문에 배꽃은 자연의 섭리대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이렇게 피워내고
싶으면 이렇게 피워내고, 저렇게 피워내고 싶으면 저렇게도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밭 머리"는 하나의 배밭을 두고 그 배꽃들을 개구리 울음들로 피워냈다가, 다시 자신의
옛 얘기들로 피워내기도 하는 두개의 시적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묘하게도 어떤 유기적인 맥락을 가지면서 서로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 연결 고리가 바로 "멎고"라는 말에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시어(詩語)가 얼마나 교묘하면서도
위대한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시조시인은 바로 그 위대함을 발견하는 "견자(見者)" 즉 평범함 속에서 비범한 것을 포착해내는
발견자(發見者)인 것이다.
■ 체험과 상상력
#
시적 체험의 재구성
한편의 시조는 체험+상상력+율격(律格 = 규칙■법칙)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시조 창작의
기본이 되는 세 요소이다.
(시조의 율격과 형식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므로 생략)
# 현실적 체험을 시적 체험으로
우리들은 삶의 현실 속에서 많은 사물을 만나고, 또 겪으면서 살아간다. 시적 감동이나 감흥들도
모두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겪은 일들로부터 받은 감정 상태다.
그러나 어떤 감동이나 감흥만으로 시(시조)가 창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현실적 체험이
시적 체험으로 재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술이 거나한 상태에서 앞에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엉덩이)을 보고 도취, 하룻밤 사이에 시 3편(흥분 상태에서 썼으므로 지적 통어에
의한 여과장치가 없었기 때문.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을 끄적거린 적이 있다.
나중에 정신을 가다듬고 봤을 땐 유치찬란하기 이를데 없어 실소를 금하지 못한다.
*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이 있다
직접 체험 = 어떤 사물이나 일에
직접 접촉하거나 참가하여 얻는 경험. 즉 광부■탄광 막장,
밤의 여인■창녀촌, 신문기자■신문사 견학, 여행 등(소설가 공지영■여성 근로자로
위장 취업)
간접 체험 = 언어나 문자(책이나 TV 등 전파매체, 대화, 이야기 등)를 통해 얻는 경험.
신화, 역사,
민담, 전설 등.
* 직접
체험
할머님, 윤달 수의(壽衣) 자손에 좋다시며
흐으연 무명베에 자녀들 뜻을 모아
가슴의 꽃상여 만가 눈물로
새기더니.
훠어이 훠어어이 사각의 목곽(木槨) 안에
당신이 손수 누빈 무명옷 감싸 안고
이제는 인연의 고리 찾아서 가시니까?
- 오경란의 "상여길"
빗장 걸린 가슴 문이 스르르 열리는가
나 아닌 우리 되어 퍼져 가는 풀빛 가락
봄 열 듯 환한
웃음이 구름으로 피어난다.
- 추창호의 "열린 음악회"
오경란의 "상여길"이나 추창호의 "열린 음악회"는 다 같이 "직접 체험"의
산물이다.
열린 음악회를 통해 "빗장 걸린 가슴 문"이 열리고, 남녀노소가 한데 어우러져 어깨를 들썩이는
그 "풀빛 가락"의 신명나는 분위기를 묘사한 "열린 음악회"는 읽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신명을
느끼게 한다.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금남로 걷다보면 생각난다, 민주주의여
푸른 하늘 죄
없어도 떨려오는 가슴 아래
오늘은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머나먼 그리움의.
- 이재창의 "年代記的 몽타주 12"
부분
이재창의 시는 강한 사회의식을 시적 담론(談論)으로 삼고 있다. "이재창의 시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역시 연작시 "年代記的 몽타주"일 터이다"라고 말한 신경림 선생은 "특히
12, 14 등 강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들은 힘도 있고, 치열해서 울림도 크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 같은 것이 있어 시를 팽팽히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고 평가한다.
*
간접 체험
초닷새 눈썹달이 밑그림으로 박힌 사막
태양불이 굽혀지는 좌표 잃은 봇짐 행렬
그들의 둥지며 설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 임성화 "르완다"
저 수평선 너머로 밀려드는
애상 속에
우우우 해조음 따라 「어부사시사」 묻어오고
불현듯
뒷짐진 얼굴 아, 고산의 그림자여.
- 최금령의 "보길도의 밤"
임성화의 "르완다"와 최금령의 "보길도의 밤"은 간접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보길도의 바다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 주옥같은 시조를
남긴 고산 윤선도의 그림자를 발견한 최금령의 시적 발상법이 신선하고 기발하다.
1
눈밭에 찔끔찔끔
노루오줌 누다가
덜 녹은 새끼발자국
까만 발톱 줍다가,
갓 쪄낸 햇감자 들고
툇마루로 오르다가■
2
점박이 꽁무니에
노루꼬리 달고 온 햇살
조숙한 가시내
혼자 감춰 온 젖꼭지처럼
우리집 매화 봉오리
어제보다
더
붉다.
- 고정국의 "2월 햇살"
"2월
햇살"에서는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이 함께 한 서정의 특성인 "무시간성" 혹은
"영원한 현재"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 이경철은 "이는 곧 시조라는 정형의 전통성과
현재의 구체성을 무리 없이 결합시킨 시인의 시적 태도, 역량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 그리 편안하고 고적하고 깊이로 남은 전통의 소재■주제의 세계이면서도 "갓 쪄낸 햇감자"
같이 오늘의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지 않느냐"고 평가한다.
# 시적 체험
시적 체험이란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체험(내면의식에 각인된 이미지)을 정리하고,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체험을 말하며 이러한 체험 요소들이 시조의 제재(題材)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인스피레이션■靈感)은 객관성과 보편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인적 사견(私見)이나 낙서, 말장난에 불과하다. 시적 체험을 재구성할 때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 객관성 =
주관(Subject)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오브젝트(Object■객관). 인식이나 지식에서의
객관적 성질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관적 작용이나 영향에 의존하지 않는 것. 문학 작품에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묘사할 때 한 개인(作者)의 주관을 배제■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 보편성
= 모든 것에 두루 미치게 통하는 성질. 일반성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보편성이란 누가 보아도 수긍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일반성을
말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적 체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창조하는 가장 깊은 체험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태(受胎)하고 분만(分娩)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은 몸소 사랑을 경험할 때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우리 속담에 "깊고 얕은 물은 건너보아야 안다"고 했다. 시적 체험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일깨우는
작품 두 편을 보자.
등 푸른
생선이며 풋나물도 마련하고
오붓이 모여 앉은, 우린 늘 가난한 길손
풍성한 사랑이어라. 축복으로 닫는 하루.
- 이지희의 "저녁
식탁"
"저녁 식탁"은 일상적 삶의 이야기를 담은 생활 시조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학인
시조가 먼 곳에 있지 않고 곧 생활 속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어느 날 차를 타고 시골길 지나갈 때
바람에 하늘거리는 고향 풍물 보았다.
어릴 적 뽑아 먹었던
눈물 묻은 삘기꽃
- 장미숙의 "삘기꽃"
"삘기꽃"은
1960년대의 흑백영화나 그 이전시대의 무성영화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눈물 묻은 삘기꽃"이 암시하듯 그 시대에는 보릿고개가 있었고, 가난 때문에 먹을 만한 군것질이
없어 삘기를 뽑아
먹으면서 자랐던 것이다.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 최승자의
"너에게"
"이 시인만큼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면서 존재의 쓸쓸함에 대해 처절하도록 파헤친 이는
없다"
고 말한 천양희 시인은 "사랑한다고 손을 잡을 때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을
알아버린 시인, 그래서 더욱 시인다운 시인.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역설한다.
한밤 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그 골짝
찬바람 소리
그리운 것이다
곧게 뿌리 내려 물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과 쉼
없이 우짖던 세 떼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
듣고 있는 것이다
- 이정환의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이정환 시인은 이
작품의 창작 배경(시작 노트)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쩌다 늦은 밤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가 문득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필시 목조 가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푸르고 싱싱하던 때의 나무를 생각해 보았다. 천지에 온통 봄이 와서 그럴까. 나무도 지난
날이
그리워서 봄밤엔 긴 신음을 토하는지 모른다.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이 땅 위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새 봄을 맞아 더욱 활기
넘쳤으면 한다"고.
# 현실 체험의
시적 재구성 과정
구상(具常) 시인은 "시창작 입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
시적 대상에 대한 집중적 관찰(시적 대상에 대한 심층 취재)
■ 그 까닭은 무엇인지(대상 사물에 대한 연원 탐구,
시적 동기 유발)
■ 자신의 심리 상태는 어떤지(체험의 구체화■가시화)
■ 그
사물과 관계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방계 취재■시적 대상물에 대한 구체화■심화 확대)
■ 그 사물로 인해
생각나는 것들은 무엇인지(작자의 사상■인생관■철학적 사유)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살피고 정리(취사선택)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밟은 뒤에야
비로소 현실적 체험이 시적 체험으로 재구성되고 시조의 제재가 되는 것이다.
(현실 체험을 시적으로 재구성할 때 = 개인적 체험<감동>을 보편적 감동<체험>으로
승화시켜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 상상력
상상력이란 과거의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심상(心象■이미지)을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정신 작용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하여 마음 속에서 그려보거나 떠오르게 하여
구체화하는 구상력이 곧 상상력이다.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석좌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상상력이란 여름에 겨울 옷을 꺼내
입는 것 같은 일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圈屬)이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는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 천년 시장끼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 가는 거다.
- 정완영의 "감"
木手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角木
어느 古典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生涯의 무늬
물 젖는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패밥이
쌓아가는 赤字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 서벌의 "어떤 經營"
허리 가는 바람이 자꾸만 간지러워
뿔대
말간 달팽이 천천히 옮겨가고
장다리 푸른 꽃대엔 봄을 물고 앉은 새
낮달도 풀물이 든 여울목 한나절은
피부 하얀
햇빛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다
호밀밭 지나서 오는 메아리도 은빛이다
- 유재영의 "여울목 한나절"
들끓는 적도 부근
소용돌이 물기둥에
우우우 높새바람, 태평양이 범람한다.
엘니뇨
이상 기온이 내안 가득 밀린다.
날궂이 구름 덮인 심란한 나의 변방.
이름 모를 기압골이 상승하고 소멸하는■
엘니뇨 기상 이변이
거푸 밀어닥친다.
바닷가재, 온갖 패류, 숨이 찬 산호초에
우리 친구 물총새 끝내 세상 뜨는구나,
저마다 세간을 챙겨
브릉브릉 뜨는구나.
*엘니뇨 현상 : 이상 조류가 갑자기 밀려오는 기상 이변 현상.
- 윤금초의 "엘니뇨, 엘니뇨"
여기 인용한 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상상력의 세계가 얼마나 광대무변하고
다양한지! 정완영의 "감"이나 서벌의 "어떤 경영", 그리고 유재영의 "여울목 한나절" 같은 작품은
몇번씩이고 베껴 쓰고 베껴 써서 줄줄이 외우는 것도 시조 창작 방법을 터득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한편의 시조가 체험이나 선험(先驗)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주제의식이 작용하고
상상력을 첨가해 경험을 심화■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상상력은 대개 유사 연상(호밀■맥주, 누룩■술, 사과■하트표 ♥), 접근 연상(강물■바다,
산■숯),
반대 연상(앞집 처녀■뒷집 총각, 막걸리는 홍탁■맥주는 골뱅이) 등의 연상 작용에 따라 발전하며,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현실적 대상(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것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의미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한편의 시조(내용)는 체험요소와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시 세계가 언어로 표출되는 것이다.
날(刀) 선 그믐달 하나 섬뜩하게 걸려 있다.
스스로
목에 匕首 꽂고 또 누구를 단죄하려는가
파르르 떨리는 殺意, 지레 숨이 멎는다.
- 김낙현의 "그믐밤"
김낙현의 "그믐밤"은 그믐밤의 하현(下弦)을
날 선 칼날로, 단죄하려는 비수로, 그리고 서슬 푸른
살의로 본 발상법이 참신하고 이지적이다.
혹독하게 내려치는
망치의 그 매질도
탄력 있게 받아내며
당당히 박혔었지
벽면을 쩡쩡 울리며
자리잡고 으스댔지
걸 것
못 걸 것
모두 걸어 힘들었고
게다가 무심한 벽은
더 힘들게 만들었어
나날이 야위어가며
탈출을 꿈꾸었지
지리 옮김 다짐하고
벽에서 뽑혔을 때
반쯤은 휘어지고
벽면도 뚫어졌어
한자리 박힌 그대로
그냥 살걸 그랬어
- 나순옥의 "못 2 - 이혼녀"
여기서 중요한 것은
* 어떤 시조가 현실적 경험 요소에만 의존하고
있을 경우 현장성(사실성■리얼리티)은 획득할 수
있겠지만 작품성(예술성)은 잃게 될 것이고, 상상력에만 의존할 경우 작품성은 갖출 수 있겠지만
사실성(현장성)을 잃어버려 공허한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조는
사실성 플러스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결정체(結晶體■에센스)와 같은
것이다.
달빛을 흔들고 섰는 한 나무를 그렸습니다
그리움에 데인 상처 한 잎 한 잎 뜯어내며
눈부신 고요 속으로
길을 찾아 떠나는?
제 가슴 회초리 치는 한 강물을 그렸습니다
흰 구름의 말 한마디를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울음을
삼키며 떠나는 뒷모습이 시립니다.
눈감아야 볼 수 있는 한 사람을 그렸습니다
닦아도 닦아내어도 닳지 않는 푸른 별처럼
날마다 갈대를 꺾어
내 허물을 덮어주는 이.
기러기 울음소리 떨다 가는 붓끝 따라
빗나간 예언처럼 가을은 또 절며 와서
未完의 슬픈 수묵화,
여백만을 남깁니다.
- 민병도의 "가을 揷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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