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작법.6>창작의 실제(느낌과 표현) | 時調작법(1) 2004/06/04 22:10
임정일(skyman63) http://cafe.naver.com/ipoem/1314
시조 창작의 실제
■
느낌과 표현
발라낸 생선의 뼈를 보면서
푸른 잎 가지런한 장미꽃을 떠올린다
잎새들의 푸른 대칭을 보면서
사하라 한 길에서 뒹굴던 짐승의 갈비뼈를 발견한다
하얗게 삭아가는 갈비뼈를 보면서
겨울숲의 백양나무를 그린다
백양나무 가지를 보면서, 가난한
아버지의 팔뚝에 선명한 힘줄과 마주친다
퍼런 아버지의 힘줄을 보면서
바다에서 자꾸만 키로 자라던 파도에 부딪친다
돌아오고 돌아가는 파도의 길을 보면서
바다 속에서 꼬리지느러미로 파도를
키우던 생선을 생각한다
가스불에 지느러미를 다 태운 채
생선은 접시 속으로 돌아와 놓여있다
- 김경복 "파도의 길"
시인 고은(高銀) 선생은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세상에!
어린 아이들의 기차놀이에서 말꼬리를 이어받아 연결시키는 그 재치가
여기에 이르러 폴 발레리 풍의 세계해석을 실현한다. 제목 "파도의 길"은 실상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제목 하나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공간이 담겨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세계이며 서로 고립될 수 없으며
서로 어울리는 이미지들이 끝내는 이미지가 아니라 엄연히 사실과 진실 그것을 의미하고
있게 된다. 생선뼈■장미 한 송이의 잎새■사하라 갈비뼈■겨울 백양나무■아버지의 팔뚝 힘줄
■파도■생선■식탁 위 접시의 생선에 이르는 오디세이적인 생애야말로 이 세계 자체다.
건달들의 세상에서 진지한 시인이고 큰 포부의 시인이다.
다시 말하면 연상작용, 혹은 말꼬리 잇기 작업을 통해 시적 상상의 세계를 이루어
놓았으며,
폴 발레리풍의 세계 해석을 성취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느낌"을 어떻게 하면 시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절실한 마음을 놀랍도록 아름답게 표현하자!" 이것이 시(시조)의 "느낌"과 "표현"의
요체(要諦)이다." 이것은 중견시조시인 서벌씨의 정의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어떤 일에 마음이 내킨다. 달리 말하면 마음의 동요(動搖)를
느끼는 것이다. 또 그 내켰던 마음이 물거품처럼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내키지 않는 마음의 상태는 어둠과 같은 암흑의 세계이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내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새로와 보인다. 어떤 사물에 대해 감명을 받아 마음이 환하게 등불을
켰기 때문이다.
등불을 켜서 스스로를 밝히는 마음, 그것은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는 일이다.
시조의 길도 스스로 열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내킨 마음은 무엇인가를 느낀(감동) 마음이다. 이것을 생각의 움직임라고도 한다.
사람의 생각은 구름을 보아도 움직이고, 꽃을 보아도 움직인다. 지나가는 택시나
날아오르는 고무 풍선을 보아도 움직이며, 지난 밤 꿈꾼 일을 되새겨도 움직인다.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움직이고,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려 해도 움직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움직이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관람하고서도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움직이는 생각, 가슴 벅차 오르는 감정, 아뭏든 이 "느낌"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는 상태가
여간 아닐 때를 일컬어 우리는 무엇에 "감동"되었다고 한다. 시나 시조는 바로 그 감동 때문에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씌어진다고 할 수 있다.
뜻하지 아니한 충격적인 일, 느닷없이 받게 되는 감격스러움, 이런 때를 사람들은
가끔 겪게
되는데, 그같은 큰 느낌을 받으면 "악!"(불교의 할■喝 같은 경우)하고 소리를 질러서 받은
느낌을 나타내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렷다>(판소리 "심청전"에 나오는 아니리의 한 대목) 시나 시조는
바로 이와 같은 일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느낌"을 언어로 표출하는 일,
그것이 바로 시조 창작의 동인(動因)인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은 중국의 ■시경(詩經■공자가 편찬했다고 함)■이라고 한다.
■시경■의 머릿말에 "마음속에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뜻"이 되고,
그 뜻이 가만있지 못하여 마침내 절실한 말(언어)이 되며, 그 말이 다듬어져서 밖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곧 시이다"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시가 나오지만,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바깥으로 내어보낼
수밖에 없는 절실한 그 무엇 때문에 시가 나오는 것이며, 그것도 다듬어진(여과과정을
거치고 순화된) 언어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나 시조는 가만 가두어 놓을 수 없는 감동적인 마음의 상태(세계)를 언어를
통해 밖에 나타내되, 가다듬고 가다듬었다가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내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인간의 내면(內面)이다.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속의 바닥이다. 열 길 물 속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한 길 사람의 마음
바닥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 속 바닥에 무슨 느낌이 닿고, 그렇게 되면 사람은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견딜 수가 없을 때 말이 찾아온다. 말과 마음은 이상하게도 하나가 된다. 둘이 하나가 되니까
그 세력이 점점 더 커진다. 마음과 말은 서로
끌며 당기며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갈 데가 어디인가. 결국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말과 한 몸이 된 마음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되고, 이렇게 해서
시조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시조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 주는 일이며, 그것도 훌륭하게 보여 주는
일이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나 마리아 릴케도 그의 유명한 작품 "말테의 수기"를
통해서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정말로 쓰지 않고서는 죽었으면 죽었지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그와 같은 마음의
용솟음이 치솟을 때에 시인이 된다고 하였다.
시는 마음의 움직임, 너무 절실해서 씌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시인은 그 때문에 탄생한다.
어제 밤 실실 단비
산과 들을 다 적수고
새 아침 하늘 문 열고
종달새 비비비 욺은
저 언덕 할미꽃 하나
고개 들라 함이다.
여기 인용한 정완영 선생의 시조 "종달새와 할미꽃"의 3장 구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나타내는 의미 구조이고, 그러한 리듬 체계를 갖고 있다. 얼핏 보아 이 단형시조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벌 시인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매우 복잡한 의미 구조를
갖추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서벌 시인의 해설을
자세하게 들어보자.
우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자면 초장은 과거, 중장은 현재, 종장은 미래에
해당된다.
과거는 "단비"라는 낱말 하나에 의해 이룩되어 있고, 현재는 "종달새"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미래는 야릇하게도 "할미꽃" 꽃망울 속에
예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초장의 의미 구조는 이미 드러나 있는 세계, 중장은 지금 한창 드러내 보여 주는
세계, 종장은 안으로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성의 존재 의식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자연을 빌어서 말하되, 그것을 노래하는 마음의 소리,
즉 리듬(혹은 가락)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초장에 이루어진 "과거"의 의미 구조는 매우 미묘하게 짜여 있다. "실실"이라는
아주 듣기 좋은 소리는 의태어(擬態語)이다. 감미로운 "단비"가 "실실" 내려 산과 들을
다 적셔 놓았다. "어제 밤"의 일이다. 나타낸 말들은 이런 뜻에 머물고 있지만, 얘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한 뜻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일구어 놓았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실실 단비"는 자연의 일로만 내린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고, 그 뜻으로
된 실제의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땅"의 의미인 "산"과 "들"은 하늘의 뜻을 다 받아들여
한껏 젖어 주었다. 서로가 한 뜻이 된
것이다.
중장에서 일으켜지는 "현재"의 의미 진행은 더욱 생생한 리듬 구조를 이루고
있다.
"비비비"는 의성어(擬聲語)로, 단순한 종달새의 울음이 아니다. "새 아침 하늘 문"을 열어
젖힌 것과 같은 의미의 울음이다. 그러면서도 "어제 밤 실실 단비"의 모습까지를 되새기며
연상토록 하는 울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비비"는 현재를 기막히도록 진행시키는 원동력이면서 미래를 끊임없이
촉구해내고
있는 원동력이다. 종달새 울음 "비비비"는 "저 언덕"으로 가는 "비비비"이다. "저 언덕"을
가서 "할미꽃"이 고개 들기를 재촉하고 있다.
종장에 등장하는 "저 언덕"은 "미래"를 상징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빤하게
보여지면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알 수 없이 멀리 있는 세계이다. 적어도 거기에선 "할미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그렇다. 때문에 "할미꽃"은 아직 다 보여지지 않은 ■ 환하도록
열려지지 않은 ■ 세계를 가장 단적으로
상징하는 하나의 대상이다.
고개만 들어올리면 "할미꽃" 꽃망울은 열릴 것이고, 그 꽃망울만 환하게
열려진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미래" 세상의 의미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할미꽃은
그냥 꽃일 수가 없다. 미래를 열고자 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아무도 모르게 만들고 있는
그런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용한 작품 "종달새와 할미꽃"은 시조의 ABC라고 할 수 있는 기본 구조를 고루 갖추고
있다.
즉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기본 구조를 완벽하게 갖춘 하나의 "텍스트■전범(典範)"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초장■중장■종장의 뚜렷한 장 구분을 가지면서, 장과 장 사이의
행간(行間)을 넘나드는 기■승■전■결의 유기체적(有機體的) 연결 고리를 가지는 것
■ 이것이 바로 시조가 지닌 매력이다.
이렇듯 시인의 말은 절실하고도 절실하기만 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뭇 감동적이다.
감동적인 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이 안으로만 불타오르거나 무르녹아서,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밖으로 분출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표현이며 거짓 없는
삶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모든 내킴(감정)이 다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키는 마음을 한번 여과시키고 간추려야 한다. 비슷비슷한 마음의 변화는 하나로 뭉쳐야 하고,
작자의 사유(思惟) 체계를 통일된 흐름으로 통합■조화시켜야 한다. 시나 시조가 다른 글보다
짧고 간결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가 산문이 되지 않고 운문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 기초로부터 출발한다.
이로써 우리는 시조가 하나의 감동적
운문(韻文)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둘 것이 있다. 감동적 운문 세계를 제대로
이룩하려면,
남다른 "그 무엇"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이다. 남다른 "그 무엇"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남들이 이미 다 일구어 놓은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마치 흉내를 내듯 그대로 보여 주면
전혀 의미가 없으며 그것은 절대 창작이 아닌 것이다.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오롯한 창작 행위, 달리 표현하면 창조적 감동의 세계를 일궈내는 행위가 곧 시조 창작이라는
말이 그래서 성립되는 것이다.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시조작법.8> 창작의 실제(어조)/ 윤금초 (0) | 2006.09.15 |
---|---|
[스크랩] <시조작법.7> 창작의 실제(소재/주제의식)/ 윤금초 (0) | 2006.09.15 |
[스크랩] <시조작법.5> 창작의 실제(연시조) / 윤금초 (0) | 2006.09.15 |
[스크랩] <시조작법.4> 양장시조, 옴니버스시조, 동시조/ 윤금초 (0) | 2006.09.15 |
[스크랩] <시조작법.3> 엇시조와 사설시조/ 윤금초 (0) | 2006.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