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한국의 군사문화재 - 각궁 (角弓)

_______! 2008. 10. 29. 15:06


조선 시대에 전투용으로 가장 흔히 사용된 활이 바로 각궁(角弓·사진)이다. 각궁은 크기로 분류하면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은 단궁(短弓)에 속하고, 재료상으로는 여러 가지 재료가 조합된 복합궁(合成弓), 형태상 분류로는 심하게 굽어 있는 만궁(彎弓)에 속한다.

각궁의 이런 세 가지 특징은 고구려 활을 포함한 삼국 시대의 활이나 고려 시대의 활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쇠뿔과 참나무, 뽕나무, 대나무, 소의 힘줄 등 여러 가지 재료가 조합된 전형적인 우리나라 각궁의 특징이 완성된 시점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다.

다시 말해 각궁은 고구려 이래 한민족 고유의 활 제작 전통을 계승했으면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수준에 올라선 활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에도 우리나라 각궁과 같은 이름을 가진 활이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각궁은 조선의 각궁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크고 탄력이 떨어졌다.

1488년(성종 19년)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의 동월(董越)은 “조선의 활이 중국 것과 유사하지만 크기가 작으면서도 화살을 쏘는 힘은 더 맹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각궁의 제조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대나무 위에 물소뿔을 가늘게 덧붙여 활의 기본 몸통인 활채를 만든다. 활채 정중앙에 다시 참나무로 대림목을 만들어 붙여 강도를 보강한다.

활채를 만든 후에는 뽕나무를 재료로 활의 양쪽 끝에 꺾인 부분(활고자)을 만들어 붙인다. 마지막으로 소의 힘줄을 활채와 활고자 전체에 얇게 덧붙인다.

이렇게 여러 공정을 거쳐 제작되는 각궁은 제조법이 복잡하고 재료 자체도 희귀한 탓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무기로 대접받았다.

각궁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재료인 물소뿔은 중국 남부 지방이나 동남아에서만 생산되는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각궁의 생산량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각궁은 일반 병사들이 소지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 갑사(甲士) 같은 직업군인이나 무과시험에 합격한 무관(武官)들이 주로 사용한 무기였다.

조선 시대 무관을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한 시험 과목이 바로 활쏘기였다. 선발 이후 무관의 승진에서도 가장 중요한 배점 기준이 활쏘기 성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은 거의 매일 활을 쏘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활쏘기는 무관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였으며 임용·승진을 좌우할 만큼 무관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핵심 잣대였다.

이들 무관이 사용한 활이 바로 각궁이었다. 일본 무사들의 혼을 상징하는 무기가 일본도(日本刀)라면 한국 무인들의 기백을 상징하는 무기는 다름 아닌 각궁이었다. 각궁은 우리나라 무관들의 대표적 무기이자 무관들의 삶 바로 그 자체를 보여 주는 상징적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각궁 실물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각궁이 부패하기 쉬운 유기질 재료로 제작된 데다 각궁의 수명 자체가 짧았기 때문이다.

칼·창·총통 같은 다른 무기류와 달리 활은 수시로 보수하거나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일종의 소모품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장기간 보존되는 경우가 흔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군들이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무기는 칼이 아니라 각궁이었지만 보존된 유품이 주로 칼뿐인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8.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