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한국의 군사문화재 - 태조 어궁구(御弓具)

_______! 2008. 10. 29. 15:07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궁은 다름 아닌 조선의 태조 이성계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용비어천가’ 등 여말선초(麗末鮮初) 시대를 다룬 각종 역사서에는 이성계의 전설적인 활 솜씨에 대한 일화가 수도 없이 실려 있다.

고려 공민왕 19년(1371)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1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 압록강을 건너 원나라의 우라산성(현 중국 지안현)을 공격했다. 우라산성에 포진한 원나라 군대는 성문을 닫아 걸고 저항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70발의 화살을 쏘아 원나라 병사들의 얼굴을 모두 명중시키자 원나라 군대는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렸다고 한다.

이성계가 화살로 왜구의 수괴 아기발도의 투구를 벗겨 버린 것도 유명한 일화다.

고려 우왕 6년(1381)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입, 충청·경상·전라 지역을 휩쓸면서 노략질했다. 당시 왜구 중에는 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내달리면서 고려군을 위협하던 ‘아기발도’라고 불리는 청년 장수가 있었다.

토벌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아기발도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제는 아기발도의 일본식 갑옷이었다. 일본식 갑옷은 투구와 별도로 얼굴을 보호하기 위한 ‘멘구’(面具)까지 장착하는 탓에 몸은 물론 얼굴에도 틈이 없었다.

고민하던 이성계는 투구의 윗부분 정중앙에 화살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화살은 철로 만든 튼튼한 투구를 관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충격으로 투구를 고정시키는 끈이 끊어지면서 투구가 벗겨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성계의 부하 이두란이 아기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이처럼 거의 전설적 명궁이었던 이성계가 사용하던 활과 화살·활집·화살통 등이 일제 시대까지 보존돼 왔으며 일제 시대에 촬영한 사진도 남아 있다. 임금이 사용한 활 관련 도구라는 뜻에서 어궁구(御弓具·사진)라고 불리는 이 유물들은 함경북도 함흥에 위치한 조선 왕실의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돼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1408년에 승하한 점을 고려하면 600년이 넘게 보존돼 온 것이다. 금속 재질이 아닌 유기질의 활이 이렇게 장기간 보관돼 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광복과 남북 분단, 6·25전쟁을 거치면서 이 활의 소재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함흥본궁은 6·25전쟁 당시 불타 버린 후 폐허로 방치되다가 1980년대 후반에야 복원됐다. 그 와중에 태조 어궁구가 제대로 보존됐는지 여부에 대해 북한 당국도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1998년 북한은 남북 화해·협력 차원에서 총 8800점의 북한 문화재 사진을 우리 문화부에 제공해 왔다. 이 문화재 사진 중에는 300여 점의 전통 무기 사진도 포함돼 있었지만 태조 어궁구는 없었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인 궁시장 유세현씨는 “조선 왕실이 함흥본궁에 소중히 보관해 온 이성계의 활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며 “어궁구가 제대로 북한에 보존돼 있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라고 말했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8.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