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한국의 군사문화재 - 전통(箭筒)

_______! 2008. 10. 29. 15:10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훈련원 봉사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순신은 직속 상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다가 파직을 당했다.

이순신은 파직당한 울분을 활터에 나가 활을 쏘는 것으로 풀었다. 마침 이순신이 출입하던 활터에는 정승 유전(柳琠·1531~1589)도 자주 나왔다.

하루는 유전이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전통(箭筒·화살통의 일종)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에게 줄 수 없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세속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절호의 복직 기회를 만난 셈이지만 이순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까짓 전통 하나쯤 드리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이것 하나 때문에 저와 정승께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다면 그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이순신의 단호한 대답에 유전은 “그대 말이 옳다”고 거듭 말하며 더 이상 전통을 탐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일화 속에 등장하는 전통은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정승마저 탐낼 정도였을까. 전통(사진)은 활의 부속 도구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화살을 담는 통이다. 70~100cm 길이로 어깨에 메도록 돼 있다. 활을 주 무기로 사용했던 조선 시대의 무인들은 고급스럽게 장식되고 튼튼한 전통을 마련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칼을 멋지게 장식하는 데 노력했다면 조선 시대 무사들은 아름답게 장식한 전통을 마련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활은 수명이 길지 않고 성능에 지장을 주는 장식을 함부로 넣기도 힘들지만 전통은 한 번 만들면 수십 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왕이면 좋은 것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전통은 뚜껑이 달린 밀폐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비가 올 때도 화살을 습기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덮개가 부착된 탓에 실전 상황에서 화살을 신속히 꺼내기 힘든 단점도 갖고 있었다.

그 탓에 전통은 주로 훈련 때만 사용됐으며 실전 상황에서는 좀 더 간단하게 만든 동개 방식의 화살통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통은 무기류라기보다 하나의 공예품으로서 더 높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전통을 재료별로 구분하면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이 가장 흔했고 오동나무를 사용한 각전통(角箭筒), 벚나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전통(花皮箭筒)도 있었다.

종이를 재료로 한 전통도 많았다. 종이로 만든 지전통(紙箭筒), 종이를 실처럼 꼬아 만든 지승전통(紙繩箭筒), 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다시 칠을 해 만든 지칠전통(紙漆箭筒) 등이 그것이다.

좀 더 고급스러운 전통으로는 거북 껍질로 만든 대모전통(玳瑁箭筒), 투갑상어 껍질로 만든 어피전통(魚皮箭筒), 그리고 나전칠기 방식으로 장식한 나전칠전통(螺鈿漆箭筒) 등을 들 수 있다.

이순신의 전통은 정승이 탐낼 정도였으므로 일반적인 전통 수준을 넘어서는 고급스러운 전통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예로부터 한국의 전통 생산지로는 전주·광주·예천·나주·담양·경주 등이 유명했다. 전통 제작은 다른 무기류와는 달리 제작 전승이 끊기지 않아 마산 박씨 노인이 만든 조각전통, 경북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 등이 근래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현재는 전통 제작 장인 중에 포항의 김동학(金東鶴)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