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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군사문화재 - 조선시대 등패

_______! 2008. 10. 29. 15:11


우리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란인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전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변화를 몰고 왔다.

군사 분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류의 병법이 전쟁 중 새롭게 조선에 수용되면서 전술·편제·무기가 크게 바뀐 것. 백자총통·호준포 등 화약 무기뿐만 아니라 창의 일종인 낭선 등 재래식 냉병기 분야의 무기에도 명나라풍의 무기가 보급됐다.

등패(藤牌)도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 조선에 새롭게 도입된 무기 중 하나다.

등패는 등나무의 줄기로 만든 방패다. 등패는 형태상으로는 조선 시대 전기의 원방패와 유사하지만 무게가 가벼우면서도 충분한 방호력이 있고 습기에도 잘 견디는 것이 장점이다.

등패의 제조 방법 자체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내구성과 방수 능력을 기르기 위해 1년 정도의 재료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손가락 굵기 정도의 등나무 가지를 15일 동안 물에 담갔다가 3일 동안 말리는 과정을 1년 동안 반복한 다음 최종적으로 완전 건조시키고 오동나무 기름을 발라야 재료 준비 과정이 끝난다. 그다음 과정은 간단해서 소용돌이 모양으로 감아 원형의 틀을 만들고 그 사이를 가는 등나무 줄기나 끈 등으로 보강하면 제작이 끝난다.

측면에서 보았을 때 등패의 중심 부분과 테두리 부분은 밖으로 튀어나오고 그 사이는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방패를 볼륨 있게 만들어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으로부터도 제한된 방호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등패의 안쪽에는 손잡이를 다는데 조선 후기의 종합 무예 서적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등나무로 손잡이를 만들고 조선에서는 산뽕나무로 손잡이를 만든 것이 차이점이다.

조선 시대 등패의 지름은 3척7촌(77.7cm)으로 중국의 등패보다 조금 작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등패가 처음 사용된 것은 남송(南宋) 시대부터이며, 원래 중국 한족(漢族)의 무기가 아닌 주변 소수 민족인 남만(南蠻) 계통의 무기였다. 전통적인 중국식 방패 운용법은 보병은 장방패, 기병은 원방패를 휴대하는 것이 표준이었다. 하지만 남송 시대부터 보병에게 형태상 원방패의 일종인 등패가 보급되기 시작, 명나라 시대 중국 남부 지역의 보병들은 대부분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수록된 원앙진에서는 등패를 휴대한 등패수가 제일 앞에 섰다. 그만큼 척계광류의 병법에서는 등패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중국의 등패수는 등패와 칼의 일종인 요도(腰刀), 표창 등을 휴대했다. 적이 다가오면 등패수는 표창을 던진 후 등패와 요도를 들고 싸우며, 주로 등패로 몸을 가린 채 적 기병을 공격하기도 했다. 조선의 등패수는 등패와 요도만 휴대했을 뿐 표창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등패의 실물 유물은 없으나 1934년 출간된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분과 논문집에 실물 유물의 사진이 남아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그림(사진)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재현품이 전시 중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3. 4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출처 : 재규의 철학사전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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